그간 참아왔던 호기심이 방출되는지 엔젤라는 중앙시장에서 눈을 반짝였다. 길을 다 외웠어도 제대로 된 구경은 오늘이 처음이라면서 그녀가 관심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그토록 좋아하는 장신구와 옷이 주변에 천지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은 죄다 빛이 나서 엔젤라는 질 높은 사치품을 매만지다 입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곱디고운 옷감과 깔끔하고도 수려한 마감에 엔젤라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가 옷에 매료된 사이 꽃은 엔젤라만 봤다.
어두운 밤이어도 그녀는 보석보다 빛났다. 헤나는 반짝이는 눈빛을 제 속에 담고 싶다고 소원했다. 그동안 만끽하지 못한 관심을 모두 앗아갈 수만 있다면. 꽃은 그렇게 할 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까맣게 미소 지었다.
한참 까다롭게 옷을 만져대던 엔젤라는 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상인은 큼큼거리더니 그녀에게 옷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엔젤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상인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옷은 당신에게 어울릴 겁니다." 웃음과 함께 덧붙인다. 진실이 섞인 추파에 헤나는 상인을 빤히 쳐다봤지만, 텅 빈 시선을 상인은 휙 돌아 무시하고서 엔젤라를 향했다.
그녀는 흔치 않은 고귀한 외모를 지녔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흰 피부는 귀족으로 오해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얼핏 보면 뒤에서 후광이 빛나는 듯 존재감이 주변과 남달랐다. 상인은 엔젤라를 바라봤다가 홀릴 뻔했다. 아름다움이란 무섭군. 형편없이 열린 입을 추슬렀다. 상인은 슬쩍 헤나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마법사인가? 상인은 남몰래 혀를 찼다. 가벼운 여자와 달리 이쪽은 입을 통 열지 않았으며 로브를 두른 까닭에 고고한 차분함이 헤나를 꾸몄다. 오해가 비싼 값을 치러 꽃은 배운 지식인처럼 보였다.
둘은 무시하기 힘든 아우라를 가졌지만 걸친 옷이 낡고 헐거웠다. 겉보기로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험악한 세상에서 상인은 무례한 질문을 했다. 어쩐 일로 둘이서 이 도시까지 왔느냐고. 엔젤라도 옷을 펼치며 씩 웃었다.
"실력으로 돈 많이 굴렸겠어." 지저분한 손으로 옷을 그만 들추라는 상인의 구질구질한 핀잔이 들린다.
"토박이 사이에서 유명한 곳은 어디지?" 엔젤라는 옷을 펼쳐서 안감을 봤다.
제 말에 다른 이야기만 꺼내는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상인은 어서 이 진상에게서 금화를 뜯어내고 다음 돈벌이를 준비하고 싶었다. 능숙하게 상인이 손님대접을 하려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달콤한 향이 났다. 숨을 들이쉴수록 몽롱했다. 상인은 물건을 사고파는 자답게 욕심이 그득했다. 재물을 향한 욕망은 뜨겁고 무서웠지만, 어쩌겠는가. 엔젤라가 너무 예뻤다. 지금까지 타인의 주머니를 갈구했지, 먼저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니. 그녀를 위해 모든 걸 갖다 바치고 싶단 갈망에 상인은 입이 간지러웠다.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해줘야만 했다.
"아는 게 없나?" 상인이 어깨를 들썩이자 엔젤라가 보챘다.
상인은 위대한 수도를 자랑하고 싶어 침을 튀겨댔다. 입이 쩍 벌어지자 침이 이빨에 달라붙은 꼴이 훤했다. 엔젤라는 추잡함을 마주하자 눈매를 구겼다. 상품을 들어 상인을 가렸다. 그는 무례한 행동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떠들어댔다. 상인이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여기까지 왔다면 주점에 가보라고 추천했다. 각지에서 사람이 모여드니 온갖 소문이 판치는뿐더러 그곳이 자랑하는 맥주는 목 넘김이 기막히다며 엔젤라를 꼬드겼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옷가지를 쭉 내리더니 상인이 음흉하게 웃었다. 입안이 까맣지도 않은데 왜 이토록 어둡게만 보일까.
"여자 둘이서 그곳을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악의가 깃든 미소는 새까맣더라.
"상관없어. 믿는 구석이 있거든." 엔젤라는 손에서 힘을 뺐다. 힘이 아래를 향했으니 옷은 흙 위로 툭 떨어졌다. 상인은 먼지 묻은 옷을 땅에서 줍고 털었다. 물건을 고르지 않을 거라면 썩 꺼지라고 중얼거렸고, 그녀는 흉터투성이 손을 끄집어서 당겼다.
서점이 아닌 다른 곳을 갈 때가 왔다며 엔젤라가 신난 티를 냈다. 더러운 미소 봤냐면서 그녀가 킬킬 웃었다. 엔젤라는 어딜 가든 남자에게 시달렸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남자가 거칠게 굴 때마다 그녀는.
"네가 있어서 든든하더라." 그녀가 토로한다.
"둘이라서 다행이야." 엔젤라는 일부러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꽃은 온몸이 간지러웠다. 울컥거린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사실 뭐가 맞는지 몰라서 헤벌쭉 웃었다.
투박한 문을 엔젤라가 손으로 퍽 밀었다. 문은 힘이 없어서 휙 돌아갔고 벽에 부딪쳤다. 투박한 소음에 몇몇이 입구를 쳐다봤어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또각 부츠가 발자취를 남기니 헤나는 얌전히 뒤따라갔다. 상스러운 곳답게 무례한 시선이 둘에게 잔뜩 꽂혔다. 본능에 충실한 눈알들이 떼굴떼굴 굴러간다. 각각의 색깔로 이뤄진 징그러운 눈알이 많았다. 저것이 전부 아름다운 그녀에게 향할 테니 헤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점잔을 떨다 예의를 상실한 상인이 내뱉은 소개다운 술집이었다. 다들 더럽게 술을 흘려댔다. 어떤 이는 머리를 상에 묻은 상태였으며 어떤 이는 의자를 발로 찼다. 사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엔젤라는 귀를 손으로 막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꼴깍거리는 목 넘김에 옆자리에서 조용히 술을 들이켜는 남자를 봤다. 그가 잔을 입에서 떼니 입가에 거품이 하얗게 묻었다. 맥주를 발견한 그녀가 휘파람을 불었다.
엔젤라가 입술로 휙휙 음률을 탔다. 꽃은 휘파람 속에서 빈자리를 찾았다. 헤나는 옆 사람과 부딪혀도 차분하게 의자를 뺐고 그녀에게 먼저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엔젤라는 헤나가 골라준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앉자마자 그녀가 도도하게 다리를 꼬았다. 치마가 살짝 올라가서 흰 피부가 천 사이로 보였다. 더럽게 끈적이는 술집에서 보드랍고 말랑거리는 살결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지만, 헤나가 말없이 치마를 통통 털어 주름을 펴주었다. 뒤에서 야유가 들렸다. 꽃이 등 뒤를 확인하려던 순간 그녀가 말을 건다.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앉아." 엔젤라가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마주 보는 곳에 좌석이 있어서 꽃은 의자가 바닥에 끌리지 않도록 조심히 뺐다. 헤나가 느리게 굴자 엔젤라가 발로 탁자를 쳤다. 그녀에게 살포시 눈을 접고는 꽃은 의자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헤나는 널브러진 차림표를 들었다. 꽃이 목록을 살피는 동안 엔젤라는 제게 향한 시선이 몇 개인지 세보기로 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도 눈동자를 안 마주칠 수가 없었다.
"역겨운 새끼들." 그녀가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볼품없는 녀석들 뿐이라며 차가운 평가를 내린다. 한 남성과 눈을 마주쳤더니 그가 맥주를 먹다 칠칠치 못하게 웃었다. 술은 밑으로 싹 흘렀고 입에서도 침이 질질 나왔다. 엔젤라는 욱 하고 올라오는 토악질을 이를 악물어 참았다. 엔젤라는 눈을 감고 탁자를 발로 찼다. 뾰족한 발끝에 맞춰 탁자가 덜컹덜컹 움직였다.
"술이라도 마셔야 내가 이곳을 버티지."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골을 짚었다.
"어여쁜 아가씨. 맞는 말씀이세요." 등 뒤에서 한 손에 맥주더미를 들고 있던 여인이 말을 건넸다.
"뭐야?" 엔젤라가 손에서 머리를 뗐다.
"우리 가게의 자랑 거품맥주 어떠신지요."
여인은 자신을 가게주인이라 소개했다. 아직 주문하지 않았음에도 미리 이곳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사람을 발견하는 재주는 확실하더라. 주인은 거품맥주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렸다. 술이 잔 속에 아낌없이 부어진 탓에 조금 넘쳤다. 보글거리는 거품을 보자 엔젤라는 웃음이 샜다.
"탁월한 안목이군." 엔젤라가 잔을 부딪히자며 헤나를 보챘다. 꽃은 맥주를 따라 들었다. 멋없는 소리에도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가게주인이 통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끄러운 가게에 걸맞은 주인답게 제 자랑을 떠들어댔다. 이곳은 역사적인 가치가 드높고 오래된 주점이라고. 자신은 몇 대로 이 장소를 물려받았는지. 옛 것의 향수가 짙은 주점은 자랑을 늘어놓을 만했으니 주인은 쉬지 않고 주점의 화려한 이력을 뽐내기 바빴다. 그러다 엔젤라는 지루해져 하품을 했다.
"그 잔은 그냥 드세요." 얼굴이 새빨개진 주인이 허둥지둥 자리를 비켰다.
안주를 고르진 않았어도 엔젤라는 만족스럽게 술을 들이켰다. 그녀가 목을 꿀꺽 울리다가 잔에서 입을 뗐다. 하얘진 그녀의 입가에 헤나는 엉덩이를 떼고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엔젤라가 좀 더 빨랐다. 그녀는 손등으로 입술을 슥 문댔다. 목표를 잃은 손이 둥둥 떠 있자 엔젤라는 다시 앉으라고 턱짓을 했다. 천천히 자리를 찾으면서 꽃은 엔젤라와 잔을 번갈아 쳐다봤다.
"마음에 들어?" 헤나의 잔은 처음과 마찬가지로 가득했는데 엔젤라는 벌써 술이 바닥을 보인다.
그녀는 대답 대신에 남아있던 술을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간다. 꼴각거리는 소리에 맞춰 총명했던 눈빛이 흐려지고 얼굴은 분홍색으로 달아올랐다.
아, 눈에 띄게 사랑스럽다. 헤나는 살살 녹았다. 꽃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익숙하게 귓가에 걸어주려고 했다. 그때 갈색머리가 보였다. 낯선 남자가 의자를 뺐다. 끼익, 딱딱한 의자는 바닥을 시끄럽게 긁었다.
"이봐. 못 봤던 얼굴인데." 남자는 마치 소음처럼 뻔뻔한 친화력을 보였다.
술을 마시던 엔젤라의 잔에 손을 대고 그녀에게 어울리고 싶다고 그가 말을 건넸다. 앞뒤를 모르고 덤비는 행동을 엔젤라가 내버려 둬서 꽃은 눈을 껌뻑였다. 혼란스러운 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축제에서 그랬듯이 엔젤라는 술을 마시면 얼굴이 달아올랐다. 꽃은 남자를 잊고 드물게 피어난 홍조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남녀가 가까워졌다. 당장이라도 꽃은 타인을 그녀에게서 떼내고 싶지만 어쩐지 엔젤라가 웃더라. 꽃은 모든 이유를 술에서 찾기로 했다. 헤나는 시선을 내려 지금까지 손에 대지 않았던 잔을 입술로 옮겼다. 맥주 한 모금에 꽃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타깝게도 맥주는 식물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꽃은 잘못 선택한 자리에서 맞은편을 봤다. 엔젤라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는 자연스럽게 주문을 추가했다. 탁자에 팔을 걸친 그 남자는 갈색 머리로 쩍 벌어진 어깨에 입가는 시원스레 올라갔다.
"팔이 두껍네." 엔젤라가 맥주에서 입을 뗐다. 그는 예고 없이 벌떡 일어나 의자 채로 엔젤라를 번쩍 들었다. 그가 들어 올린 의자를 제 어깨에 탁 걸쳤다.
"당신은 깃털 같군!" 쾌활한 웃음소리가 주점 내에 퍼졌다.
엔젤라는 어이가 없는 듯 욕을 내뱉었다. 그녀가 남자의 어깨를 발로 툭툭 쳤다. 처음 만났음에도 두 사람은 단란했다. 잘 어울리는 모습에 헤나는 맛없는 맥주를 곱씹었다. 셋에서 하나를 빼고 싶었다. 둘. 단 둘이어야만 했어. 마법사를 난도질했듯이 남자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고 싶었다.
꽃은 둘 뿐이었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린다. 몹시도 소중해서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헤나의 기억.
매일 둘이서 걸음연습을 했다. 노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헝클어져도 소녀는 붙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보자 손깍지를 꼈다. 헤나는 한 걸음을 떼려고 했다. 무릎을 굽혀봐도 잘 되지 않았다. 갓 형성된 연약한 다리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서 움푹 파인 흙자국에 헤나는 발을 삐끗했다. 꽃은 제 걸음을 도와주는 엔젤라 위로 넘어졌다. 차라리 혼자 넘어졌다면 더 나았을 텐데. 욕심내어서 만든 다리는 무용지물이었다. 꽃은 소녀에게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위에서 훌쩍거렸다. 접질려진 발목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수치심은 그대로였다.
꽃은 소녀 위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거워." 엔젤라는 투덜거리지만 자상한 손길로 꽃을 들어 올렸다. 본래도 빨갛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파란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떨어진 눈물에 소녀의 낡은 상의가 축축해진다. 엔젤라는 턱을 매만지던 손을 위로 올렸다. 촉촉한 눈가를 어루만지고 닦아도 끝이 없다. 어수룩하게 굴던 꽃이 제 앞에서 또 바보가 됐다.
"식물주제에 물이 귀한 줄 모르네." 엔젤라가 상체를 일으켰다. 꽃은 미끄러져 소녀의 무릎에 앉은 모양이 되었다. 소녀는 헤나를 떼어낼 생각은 없었다. 하나도 안 무겁고 가까워서 좋고. 더군다나 식물이 펑펑 우느라 일어나려고 들지 않았다. 끝없이 훌쩍이니까 덩달아 엔젤라도 촉촉해진다. 코앞에서 젖은 얼굴을 마주했다. 엔젤라는 붓지 않는 눈이 신기했다. 유약하게 굴면서 가진 눈매는 짙더라. 하얀 손가락으로 눈매를 쓸다가 씩 웃었다. 소녀가 꽃을 끌어안았다. 헤나의 어깨가 흠칫했지만 엔젤라는 쉽게 무시했다. 그리고 손을 올려 등을 토닥였다.
"지금까지 역사에 걸어 다니는 꽃은 없더래." 다른 손으론 기댄 머리를 쓰다듬었다. 얇은 손가락 사이로 주홍빛 실이 삐져나왔다. 제 형편없는 모습에 무뚝뚝하게 매번 혼을 냈었으면서 지금은 이토록 다정하게 굴다니. 헤나는 꾹 다물었던 까만 입을 벌렸다.
"꽃도 엉엉거리니?" 엔젤라는 위로에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꽃은 서툰 모습도 너무너무 좋다. 흉터투성이 손으로 낡은 옷을 꽉 쥐었더니 헐거웠던 옷이 찢어졌다.
"내 옷 어떡할 거야?" 소녀가 혀를 쯧쯧 찼지만 토닥임은 여전했다. 엔젤라는 찌릿찌릿한 다리를 애써 무시했어도 결국 다리에 쥐가 났다. 못 참고 주홍빛 땋은 머리를 잡아끌었다.
차라리 꽃이 아파서 울었으면 좋겠다. 소녀는 꽃을 내려다봤다. 헤나가 손에 얼굴을 파묻었고 히끅거리는 울음이 손가락 사이로 샜다. 넘치는 눈물이 흉터를 촉촉하게 만들었다. 엔젤라는 속이 울렁거렸다.
엔젤라가 억지로 팔을 당겨 꽃을 일으켜 세웠다. 하얀 수의에 흙이 묻자 소녀가 치마를 툭툭 쳤다. 엔젤라는 헤나의 옷을 빳빳하게 정리했다. 슬그머니 무릎이 까졌나 살펴봤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식물은 튼튼했다. 헤나는 엔젤라가 몰래몰래 자신을 힐끔거릴 때마다 깊은 곳에서 울림이 퍼졌다.
낯선 쿵쿵거림에 꽃이 얼떨떨하게 굴었다. 엔젤라는 혼란스러운 꽃 앞에 무릎 꿇었다. 헤나는 작은 등을 봤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등에 손을 올렸다. 엔젤라가 뒤를 보더니 팔을 목에 걸라고 했다. 헤나는 천천히 몸을 등에 기댔다. 허벅지 사이로 하얀 손이 들어왔다. 소녀는 별 어려움 없이 익숙하게 꽃을 업었다. 꽃은 참 가벼웠다. 금방이라도 날아갈지도 모른다고...
헤나가 해맑게 소녀를 껴안았다.
"앤지, 앤지." 귀여운 미소가 등 뒤에서 방긋방긋 피어났다. 꽃이 귓가에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운 살결에 헤나는 헤헤 웃었다. 엔젤라도 몰래 입꼬리를 당겼다. 자세를 추스르고 몇 걸음 걸었다. 이제는 눈물을 그친 헤나가 신이 났는지 발을 동동 흔든다.
"가만히 있어야 될걸." 무뚝뚝한 엔젤라는 헤나가 넘어질 때마다 꼭 업어줬다.
"너도 나중에 업어주던지." 빨개진 귀로 소녀가 투덜거려 봤자 하나도 밉지 않다.
누가 봐도 갓 태어난 이의 걸음은 형편없었다. 사람이 아닌 것이 사람을 따라 하니 얼마나 볼품없었겠는가. 엔젤라가 마을에서 핍박받던 무렵 헤나는 소녀에게 업혀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등 뒤에서 어깨를 껴안고 발을 동동 굴리던 헤나의 작고 따뜻했던 추억.
그 기억이 낯선 남자로 인해 처참하게 오염되더라. 꽃은 한 손으로 엔젤라를 떠받드는 남자를 봤다. 불쾌함이 발 끝부터 징글징글하도록 올라온다. 헤나는 잊힌 꽃이 되었다. 주점 안에 벌레는 없었지만, 근처를 빙빙 돌던 개미가 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제 신체를 뒤덮고 까맣게 물들인다고. 꽃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아주 깊이, 바닥이 없는 깊은 곳까지. 우울한 눈이 파랗게 텅 비었어도 엔젤라는 술에 취해 남자의 넓은 등에 업힌 채였다. 그녀가 곧이어 남자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얼굴을 괴었다.
"네 이름이 뭐라고?"
눈앞에 아름다운 미인이 있는데 제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며. 갈색 머리의 재치 있는 대답에 엔젤라는 입가를 만족스럽게 올렸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주제에 합이 오죽 좋았던지 헤나를 잊고 대화하기 바빴다. 건물 안이 점점 어두워졌다. 볼품없는 조명이 더욱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일렁이는 촛불을 보면서 헤나는 그것을 엎고 싶더라. 자그마한 촛불로 시작해 커다란 불씨가 된다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을까? 음흉한 상상에 살을 보탰다. 그늘이 바뀌도록 둘은 신나게 떠들어댔다. 헤나는 엔젤라가 말을 걸어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지만 그녀는 친구를 잊은 것 같다.
식물이 식물로서 대우받으니 헤나는 잎이 시들고 뿌리가 썩어갔다. 부패한 발바닥이 가려워서 돌바닥에 살을 문댔다. 꽃은 봉오리를 숙이고 술이 가득 찬 잔을 봤다. 맛없는 맥주에, 원치 않는 남자까지.
헤나의 시야가 질투로 산산이 쪼개진다. 헤나는 나뉘어버린 엔젤라를 보면서 꿈을 떠올렸다. 단정한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지자 헤나는 악명에 가까워졌다.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걸!" 어떤 이가 남자에게 맥주를 뿌려대며 외쳤다. 엔젤라는 옷이 더러워졌다고 진저리 쳤고 그는 어디선가 천을 구해와 그녀를 샅샅이 닦아주었다. 오붓한 모습에 헤나는 손을 꽉 쥐지만, 사모하는 당신은 웃는다.
아, 모질다. 세상이 꽃을 무너뜨리고 싶은지 시련은 늘 한꺼번에 온다. 제발 절 가꿔주세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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