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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9. 화분(1)

by 넴 박 2024. 7. 28.

"난 정상이길 포기했나 봐."
엔젤라는 창문을 배경 삼아 놓인 화분 앞에서 읊조렸다. 새초롬하게 새싹을 자랑하는 작은 풀잎을 그녀가 어루만졌다. 푸릇푸릇한 새싹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그대로 손목을 돌리자 구부러진 가지가 일자로 얇게 펴진다. 엔젤라는 잎이 살짝 찢어지자 화풀이를 멈췄다. 그녀가 묵묵히 창문 밖을 본다. 가지에서 잎은 떨어진 채 삭막한 가지가 앙상했다. 연두색 눈은 제 화분과 바깥을 비교했다. 엔젤라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눈치 없긴." 깨진 화분을 양손으로 든다. 갈라진 틈으로 흙이 흘러나왔다. 엔젤라는 화분에 박힌 단정한 얼굴을 봤다. 흙이 들어갈까 봐 눈을 꼭 감은 걸까. 엔젤라는 화분과 억지로 시선을 맞춰 보지만, 곧장 그녀도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멀쩡한 머리를 화분에 심다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꽃한테 고백한다.

"내가 널 위해 어디까지 할지 모르겠다." 엔젤라는 소중히 화분을 제 품에 안았다. 옷에 흙이 묻어도 포옹은 풀리지 않았고 그리움은 화분에 똑떨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서로가 함께한 첫 무대가 끝난 뒤였다. 가을을 맞이한 마을을 내버려 둔 채 화기애애하게 둘은 떠났지만, 공동묘지의 꽃이 자아낸 향기는 오랫동안 그곳을 머물렀다. 
 
향기가 마을에 둥둥 떠다녔다. 이곳에 있던 생물은 향기에 모든 의지를 뺏겼다. 축 처진 인간은 바닥에 무릎 꿇고 턱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콕 박혀서 호흡을 잊어버린 개체는 픽 쓰러졌다. 어떤 이는 파리가 잔뜩 꼬였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는지 입을 쩍 벌렸더라.
비척거리던 것이 하나 둘 생을 마감하자 벌레가 열띤 환영사를 보냈다. 어딜 봐도 온통 새까맣다. 사람이었던 동상과 먼지 쌓인 사물에 벌레가 득실거렸다. 파리가 시끄럽게 징징 날고 바닥에서 개미는 먹이를 옮겨댔다.
 
마을의 자랑거리인 가을축제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을구성원은 손님을 맞이하고 못하고 물건을 생산하지 못했다. 마을은 관리를 요구했으니 벌레가 인간역할을 대신했다. 절망에 형체가 존재한다면 이런 곳일지도 모른다. 과거 노란 밀밭이 풍요롭던 이 마을은 주변이 검은 숲으로 우거진 독특한 곳이었지만, 이제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의 군락지로 뒤바뀌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마법사가 고향을 찾아왔다. 그는 고독한 남자로 떠들썩한 분위기를 반기지 않았다. 일부러 가을축제가 끝날 무렵에 방문시기를 고를 정도로.
왠지 고향에 돌아와도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낯선 정적에 남자는 목에 식은땀이 났다. 긴장한 채 어릴 적부터 밟아왔던 돌담길을 올랐다. 촉촉했던 흙은 폭싹 말라버렸고 까맣던 돌벽에 담쟁이덩굴이 길게 자라났다. 올라가는 길에 파리가 많았다. 벌레가 귓가를 징징 울리자 팔을 휘적이며 쫓아냈어도 끝이 없더라. 그가 언덕을 올라와 중심가를 봤다. 까만 형체가 중앙에 빽빽했다. 장식대에 올려둔 과일은 썩었고 그릇에서 곰팡이가 폈다. 사방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마법사는 코를 틀어막고 앞으로 나아갔다.
 
남자는 눈으로 어디를 봐야 할지 헤매다 가까이에 있던 검은 형체를 놓쳤다. 그것과 마법사는 어깨를 퉁 부딪혔다. 자연스럽게 마법사는 옷을 털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손을 제 쪽으로 돌렸다. 개미가 드글드글했다.
"으악!" 마법사는 손바닥을 옷에 마구 뭉갰다. 그가 야단법석을 떠니까 까만 장애물과 또 부딪쳤다. 마법사는 땅에 넘어졌고 검은 형체는 무너졌다. 머리를 찧은 고통에 마법사가 제 갈색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이 넘치게도 통증은 짧았다. 잠깐 사이에 마법사의 몸 위로 개미가 온통 쏟아졌으니. 벌어진 입으로 벌레가 들어오자 정신을 놓을 뻔한 그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타닥거리더니 주변이 번쩍 빛났다.
 
생명이라곤 벌레뿐인 참혹한 광경에 그는 바닥에 속을 전부 게워냈다. 벌벌 떨면서 지팡이를 잡지만 손이 미끄러운지 자꾸만 놓쳤다. 양손으로 지팡이를 붙들고 마법사는 넘어진 까만 형체에 지팡이를 쑤셨다. 옷이 보였다. 지팡이 끝으로 옷이 보이는 부분을 긁어봤다. 마법사는 슬픈 진실을 마주한다.
눈에 보이는 이것도 저것도 전부 똑같았다.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 두고 그는 터벅터벅 걸었다. 발을 질질 끌다가 울퉁불퉁한 땅을 발견하지 못하고 퍽 넘어졌다. 개미가 자글거리는 곳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개미가 제 얼굴을 타고 다녀도 넘어진 채 눈을 깜빡였다. 축축한 흙에서 향이 났다. 소름 끼치는 냄새에 마법사가 몸을 일으켰다. 달콤하게 뒤집어진 땅은 무언가 뽑힌 흔적이 남아있다.

"괴물꽃." 모든 게 꿈이길 바라는 마음이 그에게 단서를 주었다.
 
 




"이곳은 무척 아름다워." 헤나가 떨어진 잎을 주웠다.
"잎이 너랑 닮았네." 사랑스러운 대답에 꽃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둘이서 까만 잎이 우거진 어두운 숲을 거닐었다. 바람이 잎사귀를 거칠게 때렸다. 잎과 잎끼리 부딪히며 예쁜 소리가 둘을 감싼다. 꽃은 맨발을 질질 끌면서 수줍은 티를 한껏 냈다. 엔젤라는 뒤로 처지는 헤나에게 혀를 찼다.

"그만 부끄러워해. 좀 걷자고."
수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엔젤라가 헤나의 팔을 쭉 잡아당긴다. 꽃은 조근조근하게 굴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순식간에 얼굴에 표정을 지워내는 꽃을 보면서 엔젤라는 팔에 닭살이 돋았다. 엔젤라의 손가락을 헤나가 확 움켜잡았다. 꽃은 뒤를 노려보더니 손을 붙잡고 앞으로 뛰었다. 그녀의 몸이 기우뚱 쏠리고 어정쩡하게 팔이 앞으로 당겨진다. 엔젤라가 손을 확 쳐냈다.

"이유라도 설명하지 그래?" 얼얼한 손을 주무르면서 엔젤라가 읊조렸다. 헤나는 또 묵묵하게 손을 붙잡고 뛰었다.
"야! 설명하라니까!" 식물이 식물답게 굴자 엔젤라는 언성을 높였다. 여전히 꽃은 침묵을 유지한 채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엔젤라가 또 딴지를 걸려던 때에.

"앤지, 이곳을 벗어나야 돼." 헤나가 엔젤라의 허벅지에 팔을 걸어 단번에 올렸다. 엔젤라는 흉터투성이 목을 확 끌어안았다. 대범한 행동에 그녀는 입이 간지러웠다. 휘파람 대신 입을 삐죽이고 주홍색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뒤에서 누가 쫓아와." 꽃이 허공을 본다. 헤나는 품 안에 위치한 엔젤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축 처진 눈썹에 앙 다문 입술이 안쓰러웠다. 타인에게 이기적인 그녀였지만 늘 헤나에게는 관대했다. 
"나중에 꼭 설명해." 엔젤라가 목을 단단하게 안았다. 오붓한 순간을 방해하듯 발치에 불꽃이 날아온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이 엔젤라를 껴안은 채 앞으로 달렸다.

좋은 옷으로 향기를 숨겼어도 축제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흔적이 깊게 남았을까. 헤나는 맨발을 빠르게 뗐다. 제 뒤통수에 눈을 만들었다. 눈알이 또록또록 굴러가다가 눈꺼풀을 가늘게 떴다. 제 복장과 비슷한 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얼굴에 증오를 담고 무섭도록 쫓아왔다. 어째서? 왜 따라오지? 예민하게 주변을 알아챘어도 헤나는 재빨리 굴 수 없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냐!" 남자가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소리를 빽빽 질렀다. 시끄러운 방향으로 엔젤라가 고개를 돌렸다. 턱이 왔던 길을 향했다. 

꽃을 태우겠다는 의지가 가득 실린 불은 뜨거웠다. 식물이 앞만 보고 뛰니까 마법사는 조급해졌다. 노리던 방향을 바꿨다. 그는 검은 잎이 울창한 나뭇가지를 향해 불꽃을 쐈다. 까만 잎사귀는 불길을 달고 엔젤라에게 무수히 떨어졌다. 헤나는 팔로 방해되는 불꽃을 죄다 쳐냈다. 매서운 불길에 꽃은 발을 빠르게 놀렸지만, 마법사가 좀 더 간절했다. 그는 손을 쭉 뻗어 평화롭던 길목에 화염벽을 세웠다. 헤나가 불을 바라보며 우뚝 섰다.

마법사는 화염구를 던지고도 모자라서 벽까지 세웠다. 꽃은 얼굴에서 인간성을 지웠다. 돌아보지 않고 뒤통수에 달린 눈을 굴렸다.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는 퉁퉁 부운 눈을 뭉개고 둘에게 외쳤다.

"그곳에 원수라도 있었나? 설령 그렇다고 한들 왜...!" 마법사는 슬픔을 호소했지만 헤나는 무덤덤하게 머릿속에서 해답지를 뒤졌다. 식물이 식물을 자처하니 그는 지팡이로 엔젤라를 가리켰다.

"저 인간이 시키더냐?" 엔젤라는 잠자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리가요." 나긋한 대답에 남자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서 인간을 학살했지?"
자만한 마법사는 집요하게 물었다. 그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주변에 불길이 타올랐다. 빙 둘러싼 화염벽은 무척 뜨거워서 헤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품 안에서 엔젤라는 꽃이 겁을 먹은 줄 알았다. 본래 들러붙기를 좋아하는 식물이지만 지금은 유독...
그녀가 헤나의 어깨를 툭툭 쳤지만 꽃은 반응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안긴 채로 마법사에게 이죽거린다.

"왜 그렇게 속이 긁혔어?"
"마을이... 내 고향이 개미로 뒤덮였다."
"유난스럽긴. 사람은 원래 가는 곳마다 벌레가 꼬이잖아." 그게 뭐가 대수롭냐며 그녀는 대답한다.
"볼품없는 남자군." 엔젤라가 쿡쿡 웃었다. 마법사는 신랄한 조롱에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괴물꽃이 전부 망쳤어. 저 괴물이 내 고향을 초토화시켰어!" 헤나를 향한 원망에 그녀가 대신 꽃의 귀를 가려줬다.
"추잡하게 굴지 마." 엔젤라가 눈을 가늘게 뜨자 마법사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뾰족한 막대 끝에서 불씨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엔젤라는 헤나의 머리를 감쌌다. 하얀 손이 주홍 머리카락을 헤집었고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튀어나온다.
그 틈 사이에서 뒤통수의 눈이 천천히 눈꺼풀을 감는다. 그가 불씨를 불덩이로 키우는 동안 헤나는 발바닥에서 뿌리를 뽑아냈다. 뿌리는 꽃이 정한 목표를 향해 길게 늘어졌다. 그가 지팡이에 힘을 주자마자 땅밑을 파고들었던 뿌리가 솟아올라 사람을 절반으로 똑 쪼갰다. 끈적하고도 새빨간 광경에 엔젤라는 헤나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불쌍한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끝내 제 몸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갈색 머리카락이 허공에 비척거렸다. 몸속 장기가 철퍽거리며 땅 위로 존재를 비췄다. 꿈틀거리는 심장, 폐... 꽃이 그를 조각내자 마법사는 책에서만 보던 내부 장기를 직접 보았다. 남자가 굴러다니는 눈알과 눈이 마주쳤다. 평생 보았던 익숙한 색깔이었다. 

혀가 떨어져 나갔어도 마법사는 되뇌었다. 계속 중얼거렸다. 하나뿐인 눈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혓바닥은 터졌다. 주문을 방해하는 조건이 많았지만 마법사는 계속했다. 옹졸하고 새까만 마음을 한데 지팡이 끝으로 모았다. 제 가족에게 돌아가기 전 마법사는 혼신의 역작을 완성했다.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는 손으로 지팡이를 힘없이 올렸다. 그때 엔젤라가 고개를 폈다.
 
"헤나!" 그녀는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왜 그러냐고 헤나가 되묻지만 엔젤라는 품 안에서 신체를 빼내려고 들었다. 갓 만든 뿌리는 쉽게 흔들렸어도 헤나가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엔젤라가 땋은 머리를 아래로 확 잡아당겼다. 안정적인 자세가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하지만 몸이 바닥에 닿기 직전 마법이 헤나의 팔을 스쳤다. 까만 덩어리가 소매를 물들더니 금방 사라졌다. 엔젤라는 깜짝 놀라 소매를 걷었다. 꿈틀거리는 까만 지렁이가 피부를 파고 들어간다. 벌레를 쥐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당장 그 팔 뽑아!"
그녀가 헤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꽃은 그녀의 명령대로 어깨에서 팔을 뜯어냈다. 투박스럽게 뜯긴 단면에서 검은 지렁이들이 꿈틀거렸다. 머리로 향하지 못해 벌레는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엔젤라는 벌떡 일어나 벌레를 짓밟았다. 자비 없이 발길질을 해대자 밑창이 새까매졌다. 끈적한 액체가 신발에 묻었어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벌레를 무차별로 정리한 뒤에야 엔젤라는 마법사였던 것을 노려봤다. 
 
"빌어먹을 새끼." 그녀가 끈적한 발걸음을 떼고 널브러진 머리를 발로 찼다. 발끝으로 뇌가 조각났다. 벌레나 사람이나 짓밟으면 똑같이 터졌다. 끝없이 발로 형체를 잘게 다졌다. 씩씩거리며 다지기를 멈추지 않았던 엔젤라가 숨을 가다듬고 허공을 봤다. 그녀가 다시 발을 들자 허리와 팔 사이로 흉터투성이 손이 파고들었다. 손이 올라와 어깨를 매만졌다. 목 근처에 입술이 닿았다.
 
"앤지, 진정해......" 귓가에 꽃이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언제 다시 팔이 자라났을까.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괴물꽃이다. 헤나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하얀 볼에 입술을 댔다. 뜬금없는 감촉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헤나가 목에 고개를 댔다. 뒤에서 팔이 축 쳐졌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엔젤라가 분노로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빌어먹을 마법사가 헤나에게 무슨 짓을 했다.
 
"나, 계속... 눈이 감겨. 이상하다......" 지금까지 꽃은 잠을 잔 적이 없다. 엔젤라는 그 말에 몸을 휙 돌렸다. 헤나를 붙잡아 흔들지만 눈꺼풀이 올라올 기미가 안 보인다. 그녀가 손바닥을 올려 헤나의 뺨을 세게 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정신 차려!" 정신이 몽롱해져도 꽃은 사모하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서 좋았다. 흐릿한 시야에 그녀가 보였다. 미안해. 하나도 모르겠다. 헤나는 해맑게 웃었다. 
 
 



 
어릴 적에는 헤나가 그녀에게 긴 시간을 요구해도 놀랍지 않았다.
엔젤라가 뺨을 내려찍어도 헤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왼손으로 멱살을 잡고 오른손으로 얼굴을 때렸다. 오른손이 얼얼해 엔젤라는 주먹을 접었다가 폈다. 허공에 손을 털 때쯤 통증을 알아챘다. 그제야 그녀는 폭력을 그만뒀다. 왼손에 힘을 풀고 헤나를 가지런하게 바닥에 눕혔다. 엔젤라는 단정한 얼굴을 가만히 봤다. 엔젤라는 식물 옆에 털썩 앉았다. 붓지도 않는 뺨을 그녀가 어루만졌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손가락으로 뺨을 꼬집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왜 저를 혼자 두냐는 마음을 담아 더 꼬집었다. 그녀는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기댔다. 손등으로 식물을 살살 쓰다듬었다.
 
숲은 금방 어두워졌다. 창자가 펼쳐진 길목에서 엔젤라는 능숙하게 헤나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고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잃고 축 쳐진 꽃은 무거웠지만 엔젤라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릴 때 생각나네." 꽃이 처음부터 잘 걸었다고 생각하는가? 꽃이 사람답게 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서툴었던 시기 소녀는 꽃을 업고 다녔다. 아련하게 붕 떠오르자 엔젤라는 고개를 털었다.

까만 숲은 태양이 사라지자 하늘과 잎사귀가 똑같아 보였다. 어디가 하늘이고 나무인지 모를 곳에서 엔젤라는 숨이 거칠어졌고 꽃은 다리가 질질 끌렸다. 등에서 꽃을 떼어내지 않은 채 엔젤라가 나무에 기댔다. 숨을 깊이 쉬었다가 마신다.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이 그녀의 눈에 들어갔다. 그녀가 한 손으로 식물을 들고 다른 손으로 빠르게 이마를 닦았다. 이마에 얼핏 닿았던 소매가 축축해질 정도로 그녀는 잔뜩 지쳤다.
짧게 멍 때린 사이 엔젤라가 뒤로 나자빠졌고 충격에 꽃이 튕겨져 나갔다. 그녀는 다급하게 기어와 헤나를 만졌다. 이럴 때 숨을 쉬지 않는 꽃은 어디를 살펴야 될까. 가슴에 귀를 대봐도 고동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엔젤라는 몸을 떼고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던 그녀가 몸을 확 일으켰다. 엔젤라는 헤나를 내버려 둔 채 후다닥 뛰어 제가 본 것이 확실한지 알아보려고 했다. 헉헉거리며 시끄럽게 발자국을 뗐다. 집이었다. 찾아낸 건물에 문짝은 없고 나무기둥도 죄다 썩어서 꼴이 형편없었지만, 엔젤라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버려진 헛간에 헤나를 질질 끌고 와 냅다 던졌다. 꽃이 떨어지니 눅눅한 밀짚이 아래로 폭싹 눌렸다. 헤나는 머리가 밑을 향해도 잠잠했다. 엔젤라가 답답한 어깨를 붙잡고 돌렸다. 가려졌던 얼굴을 뒤집자 밀짚이 잔뜩 묻었다. 그녀는 얼굴에서 밀짚을 떼다가 하품을 했다.

"자고 일어나면 인사해 줘." 엔젤라가 헤나의 팔을 옆으로 쭉 폈다. 꽃을 베개로 삼으며 헤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틋한 뺨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고, 그리움을 반죽하다가 허리로 손을 옮겼다.
고독한 새벽이었다. 엔젤라의 연약한 숨소리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 혼자뿐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헤나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곧 조금씩 어깨가 들썩이지만 꽃은 알지 못할 비밀이다.
 
엔젤라는 식물이 제 관대함에 토를 달까 그저 기다렸다. 

습기진 밀짚이 온기에 닿아 썩어가도 헤나는 눈을 뜨지 못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부드럽던 피부가 가지처럼 딱딱해진다. 엔젤라는 굳어가는 친구의 얼굴을 이마부터 턱까지 손가락으로 꾹 쓸었다. 시선도 덩달아 턱으로 내려갔다. 목이 갈색이었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곧장 소매를 걷어올려 팔을 살핀다. 각질처럼 딱딱한 헤나의 팔을 접었다가 폈다. 우지끈. 나뭇가지가 꺾였다.
 
"젠장!" 엔젤라는 손가락을 물어뜯었고 눈에 실핏물이 섰다. 엔젤라는 그를 발길질로 꾹꾹 다졌어도 여전히.
"개자식! 망할 놈! 아악!" 원망은 지금쯤 짐승이 몽땅 먹어치웠을 마법사에게 향했다.

바스락바스락. 작은 음이었다. 소중한 친구한테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친구를 보다 입을 앙 다물었다.

기다릴 차례가 바뀌어서 친구 대신 새벽보초를 섰다.
오늘도 어제처럼 허기를 대충 때우고 문짝 없는 헛간으로 그녀가 돌아왔다. 밀짚에 얌전히 누워있는 헤나 옆으로 엔젤라가 풀썩 주저앉았다. 밀짚이 푹 꺼지며 고여있던 먼지가 날렸다. 더러운 공기에 엔젤라는 기침이 나왔다.

"뭐야 이게..." 콜록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얀 손으로 푹 눌린 밀짚을 거둬냈다. 어떡해, 헤나가 온몸에서 뿌리를 내뿜었다! 몇 개는 이미 바닥에 파묻힌 상태였다. 엔젤라는 욕을 내뱉고 엉덩이를 급하게 뗐다.
 
다급한 몸짓은 먼지를 일으켰다. 엔젤라는 헛간을 뒤집다가도 헤나에게 달려와 뿌리를 살폈다. 꿈틀거린다. 뿌리가 땅을 탐내며 꿀렁 스며들었다.
그녀가 옷깃을 부여잡고 헤나를 땅에서 잡아당겼다. 무심하게도 흙을 사랑하는 식물로 하여금 하얀 손목에 파랗게 핏대가 선다. 땀으로 손이 미끌거렸다. 그녀가 바닥에 엉덩이를 꽈당 찧었다. 엔젤라는 눈을 부릅 떴다.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순 없다.

엔젤라는 헉헉거리던 숨을 다듬었다.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했다. 기다란 앞머리에서 땀이 송글거리더라. 그녀가 손으로 앞머리를 넘겼다가 밀짚 밑에 깔려있던 녹슨 낫을 찾았다. 

"불만 있으면 당장 일어나." 그녀는 위험한 농기구의 손잡이를 잡고 쇠를 봤다. 쇠는 빨갛게 녹이 슬었고 날은 울퉁불퉁했다. 그녀가 휘파람을 불었다.
"난 기회를 줬어." 엔젤라는 현명함을 완전히 버렸다. 낫으로 헤나 밑을 긁어댔다. 흙을 얕게 팠다. 뿌리가 보였다. 엔젤라는 낫을 높게 들고 뿌리를 찍었다. 뿌리가 허우적거렸다. 그녀는 손이 머뭇거렸지만, 계속했다. 뿌리를 힘으로 비틀어봐도 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차 낫으로 뿌리를 퍽퍽 때렸다. 먼지가 날리고 더러운 공기가 폐를 더럽혔다. 기침이 나와도 엔젤라는 잘라낸 뿌리를 잡아뗐다.

이제 보이는 곳에서 뿌리를 찾을 수 없었다. 헤나를 세워서 제 등에 엎으려고 했다. 여전히 꽃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헤나의 목만 세워봤다.
"하..." 엔젤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벌써 척추에서 뻗었더라. 낫으로 자를 수 없는 굵직한 뿌리가 이미 있더라.

엔젤라는 낫을 꽉 부여잡았다.

"넌 내가 인간성을 포기하게 해." 그녀는 말대꾸가 그리웠다. 땋은 머리를 붙잡고 위로 당겼다.
"여기는 터가 별로잖아. 햇빛도 없고. 그렇지?" 꽃을 옮겨 심을 때가 되었다며 엔젤라는 헤나의 목에 칼을 댄다. 친구가 인간이 아닌 걸 알아도 손이 떨려댔다. 낫을 들었던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잡았다. 낫을 목에 다시 댔다. 한 번에 끝내자. 엔젤라는 녹슨 낫을 확 당겼다. 헤나는 쉽게 댕겅 잘렸다. 친구가 목만 남게 되자 엔젤라는 토악질이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고 구석으로 갔다. 바닥을 노랗게 꾸민 뒤에야 무릎으로 헤나에게 기어 왔다. 제대로 입가를 닦지 못한 채 친구를 살폈다. 잘라낸 단면은 깔끔했다. 나이테가 보였다. 얼핏 봐도 나이테는 빽빽했다. 어른스럽게 굴더니 정말 오래 살았나 봐. 그녀는 헤나가 몇 살인지 세고 싶었지만 손으로 머리를 털며 이마를 짚었다.

친구를 제 옆에 뒀다. 엔젤라는 머리를 잃은 몸뚱이를 봤다. 옷끈을 풀고 로브를 펼쳤다. 엔젤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온몸이 갈색 식물이었다.

옷은 구멍이 송송 났지만 가릴 때가 아니었다. 엔젤라는 관절이었던 것을 꺾었다. 가지가 우지끈거려도 애써 무시했다. 어느새 헝겊으로 전락한 옷으로 꽃을 감쌌다. 그녀가 제 친구를 들고 마주했다. 엔젤라는 감긴 눈에 입맞춤을 보냈다. 그리고 친구를 꼭 안았다. 그녀가 친구를 어루만지다 천으로 감쌌다.

그녀는 저번처럼 꽃만 챙겨서 헛간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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