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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11. 둘과 두 사람(1)

by 넴 박 2024. 7. 28.

둘은 오순도순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댔다. 엔젤라는 습관처럼 무릎에 책을 뒀고 헤나는 그녀의 어깨를 탐냈다. 그녀가 익숙하게 책장을 넘긴다. 꽃은 책에 몰두한 엔젤라가 생소했어도 새로운 면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제가 부재중일 때 왜, 왜! 잃어버린 시간에 헤나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 엔젤라에게 제 옹졸함을 들키기 싫어 눈을 감았다.

"4월이 감미로운 소나기로 3월 가뭄을 뿌리까지 꿰뚫고..."
그녀가 좋아하는 구절을 읊는다. 지금까지 그녀와 책을 엮어볼 생각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데.

"그러고 보니 하얀 도시는 어떻게 됐어?" 꽃은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와 수도를 향하던 길에 봉변을 당했지. 헤나는 마음속으로 그 남자를 죽이고 또 죽였다. 몇 번을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수도야." 엔젤라가 다음장을 태연하게 넘겼다. 헤나는 작게 입이 벌어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게 바뀌었다. 장소도 그녀도 전부 변해버려서 빈 공간을 파헤치고 싶었다. 꽃은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니까. 우정이라는 특권을 행사하고 싶으니까.

"언제 도착했어?"
"그냥... 어쩌다 보니."

그녀가 우물쭈물 대답을 미룬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녀를 헤나가 빤히 봤다. 옆에서 부담스러운 시선이 활활 타올랐다. 엔젤라는 손을 올려 헤나의 얼굴을 멀찍이 밀었다. 왜 그러냐고 헤나가 허둥거리지만, 냉정한 그녀는 꽃을 무시하고 까만 글자에 집중했다.

"여기서 얼마나 머물렀어?" 지치지 않고 또 물었다.
"넌 궁금한 것도 많다." 그녀가 결국 책을 덮었다.

헤나가 성공했다. 그녀가 대답을 돌려줄 거란 기대에 발이 동동 구른다. 들뜬 감정에 발끝이 흔들렸다. 맨발이 엔젤라의 신발에 닿았다. 다리끼리 가지런하게 붙어있으니까 거리가 생생했다. 헤나가 그녀의 팔에 찰싹 붙었다. 엔젤라는 살가운 애교를 가느스름하게 봤다. 하얀 손을 올려 뺨을 매만진다.
"빌어먹을 마법사가 우리를 습격한 뒤로." 부드러운 감촉에 그녀가 입가를 느슨하게 푼다.
"너는 깊은 잠에 빠졌어." 너를 업고 버려진 헛간까지 걸어가는데 무거웠다고 볼을 꼬집었다.
 
"그곳은 문도 없는 허술한 공간이었지. 썩어가는 밀짚에 널 눕혔어." 엔젤라는 볼에서 손을 떼고, 제 어깨에 기댄 머리에 뺨을 댔다. 둘 사이에 틈이라곤 없다.
"네 옆에 누워서 같이 잤어. 일어나면 네가 인사를 건넬 거라 생각했는데." 엔젤라가 머리를 살짝 들었다가 헤나에게 꿍 부딪혔다.

"네가 늦잠을 잤지." 꽃은 정수리가 얼얼했다. 울적한 목소리에 꽃은 가만히 눈에서 눈물을 짜냈다. 뚝뚝 흐르는 눈물은 엔젤라의 옷에 톡 스며들었다. 헤나는 팔을 올려 엔젤라의 옷을 붙들었다. 건드면 풀어져버릴 미적지근한 손길이었다. 그녀가 푹 꺼진 뒤통수를 봤다. 
참 알 수가 없지. 무참히 마법사를 도륙했던 주제에 제 앞에선 이토록 처량하게 군다. 흉터투성이 손 위로 하얀 손을 올렸다. 헤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엔젤라가 제게 동정표를 쉽게 얻어가는 불쌍한 꽃을 바라봤다.
 
"네가 대단하다고 느꼈어." 꽃이 어깨를 떨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댔다. 왜 타박 아닌 칭찬을 주는 거야. 왜. 어째서......
 
"새벽이 너무 길더라." 뒤통수에 입술이 닿았다. 헤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엔젤라와 눈을 골몰히 마주했다. 그녀가 먼저 움직였다. 손을 올려 헤나의 볼을 매만지다가 귀를 주물러댔다. 여전히 꽃은 대답을 기다리는데 엔젤라는 손만 움직인다. 죄인은 대답을 보채려다가도 까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외로움 따위 몰라도 되는데. 꽃이 침묵을 지키자 엔젤라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엔젤라가 헤나를 제 쪽으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볼에 입맞춤을 보냈다. 앙 하고 살짝 물기도 했다. 헤나는 엔젤라를 봤다. 연두색 눈을 마주하자 꽃이 파랗게 깜빡였다.

"그래, 이거지 이거." 그녀가 말캉한 살을 즐겼다. 헤나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어서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넌 딱딱했거든." 마주했던 눈빛을 거뒀다. 엔젤라가 헤나의 품에 기댔다. 허리에 팔을 감아 꽃을 제게 이끌었다. 헤나도 팔로 그녀의 목을 감았다.
"부드럽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그리웠던 품에 비비적거린다. 엉덩이가 땅에서 떨어지자 헤나와 엔젤라는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주홍빛과 노란 머리카락이 바닥에서 섞였다.
"마룻바닥을 조심해야 돼. 가시가 있을지도 몰라..." 헤나가 목을 깊게 껴안았고, 엔젤라는 킬킬 웃었다. "팔이나 푸셔."
 
 


 

겨울 동안 이곳에서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엔젤라는 책만 봤다고 했다. 헤나는 그 대답에 고개를 푹 숙였다. 축 쳐진 모습에 엔젤라는 피식 웃더니 다가왔다. 그녀가 하얀 손으로 주홍빛을 헤집었다.
 
"난 도시탐방을 같이 하고 싶었는데. 넌 아닌가 봐?" 
"아니야. 나도 그래..." 꽃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럼 얼굴 좀 펴." 엔젤라가 양손으로 헤나의 볼을 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바보 같은 얼굴. 그녀는 금방 손을 뗐다. 웃음이 계속 나와서 배를 부여잡고 깔깔거려야만 했다. 꽃은 그만 놀리라며 떽떽거렸다. 그녀의 옷도 잡아당겨봐도 짓궂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더 컸다. 하소연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고 꽃은 구부정한 엔젤라의 등을 흔들며 그만하라고 졸랐다. 둘은 거리에서 낯간지럽게 시시덕거렸다. 타인과 부딪히든 말든 상관없이 둘만의 세계에 풍덩 빠졌다.
 
서로가 서로를 너무도 보고 싶었으니까. 꽃은 살아 숨 쉬는 그녀를 봐서 좋았고 엔젤라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친구가 돌아오자 신나게 꽃을 이끌고 다녔다.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시작해 중앙 수도까지 왔다. 하얀 성벽을 자랑한다던 그곳에 들어온 지 오래되었지만 내부를 누비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성벽에 손을 대고 둘은 벽돌이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이대로 쭉 가볼까?" 엔젤라가 꽃을 옆으로 끌었다. 
"어디가 끝일까?" 헤나는 눈을 곱게 접었다.
 
둘은 하나처럼 보였다. 강이 보이면 징검다리를 차례대로 건넜다. 미끄러울까 봐 조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물을 건넜다. 중간에 엔젤라가 신발로 물을 찼다. 헤나는 치마가 젖었다. 지지 않게끔 꽃도 엔젤라를 슬쩍 잡아당겼다. 삐끗하며 부츠가 물에 빠졌다. 그녀가 인상을 팍 구기고 물을 마구 찼다. 덕분에 꽃은 물로 흠뻑 얻어맞았다.
맞은편으로 건너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돌에서 땅으로 발을 옮겼다. 엔젤라가 넘어지지 않게 헤나는 먼저 내려가 그녀를 지탱했다. 땅에서 둘은 옷을 꽉 쥐어짰다. 밑으로 수분이 쭉 빠졌다. 손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렀다. 그녀가 옛 생각이 난다며 히죽 웃었다. 젖은 옷이 무거워도 바람이 더 강했다. 그녀가 들판을 배경으로 둔 채 치마를 나풀거리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왜 넋을 잃었어?"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겼다.
"너무 예뻐서......" 그림 속 여인처럼 엔젤라가 멀었다.

꽃은 눈앞이 희미해졌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엔젤라가 깜짝 놀라 헤나에게 다가왔다. 바닥을 향한 고개를 억지로 들었다. 하얀 손으로 목에 난 흉터를 매만졌다. 올곧은 연두색 눈이 꽃을 꿰뚫어 본다. 제 시꺼먼 마음이 들켰을까 봐 헤나는 시선을 피했다. 닿을 때마다 행복했던 손길을 거두고 싶었다. 엔젤라를 잡아떼려고 했지만, 힘 빠진 흉터투성이 손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그녀가 양손으로 하얗게 볼을 감싸 얼굴을 올렸다. 헤나는 눈을 꾹 감았다.

꽃은 하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눈물이 날까? 
 
"뭐가 그렇게 슬퍼?" 고요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랑 눈 마주치기도 싫어?" 헤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꽃은 궁상맞은 제 모습에 엔젤라가 질릴까 봐 눈을 확 떴다.
"아, 깜짝이야." 그녀가 뺨을 붙잡던 손에 힘을 줬다. 손아귀에 얼굴이 짓눌려 우스운 꼴이 됐다.
"푸훗, 후후... 하하하!" 엔젤라가 상쾌하게 웃었다.

헤나는 영문도 모르고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그녀가 꺽꺽거리면서 숨을 삼키자 꽃은 입술을 삐죽였다. 얄밉게도 엔젤라는 더 크게 웃었다. 그만하라고 꽃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었다. 
 
"앤지, 바보!" 귀여운 투정에 엔젤라는 볼을 양손으로 꼬집었다. 부드러운 살결에 그녀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너무해, 너무해!" 꽃이 손으로 어깨를 툭툭 때려도 엔젤라는 웃었다. 

헤나가 손을 휘두를 때 엔젤라는 기우뚱 넘어진 척을 했다. 꽃은 당황해 엔젤라를 앞으로 잡아끌었지만, 힘이 사방으로 흩어져 둘은 파란 들판에 쓰러졌다. 엔젤라 위로 헤나가 엎어졌으니 꽃이 미안하다며 팔에 힘을 줬다. 그때 그녀가 허리에 팔을 감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눈앞에서 엔젤라가 히죽거린다. 꽃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가만히 있으라며 그녀는 팔에 힘을 줬다. 식물은 그녀에게 시간을 뺏겼는지 뚝하고 멈췄다. 엔젤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하고 싶은 대로 꽃을 어루만졌다. 제 어깨에 닿은 주홍빛 머리카락을 하얀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얇은 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꽃이 순종적으로 구는 동안 엔젤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따뜻한 숨결에 헤나가 움찔거렸다.
 
예쁜 들판 위에서 그보다 아름다운 그녀가 꽃을 안고 누웠다. 잔디가 엔젤라를 간지럽혔다. 햇살도 노곤하게 그녀를 비췄고 꽃도 덩달아 데워졌다. 주변이 노을빛으로 익었다. 둘은 노란색처럼 따뜻하게 굴었다.
엔젤라는 제 위에 널브러진 꽃을 봤다. 고장 난 꼴이 답답하지만 사랑스러운 꽃한테 엔젤라는 유치하게 또 장난을 쳤다. 헤나를 확 끌어안고 귓가에 바람을 훅 불었다. 꽃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허리가 꽉 고정된 채라 품에서 우습게 파닥였다. 몰아치듯 장난을 치니까 꽃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채웠다. 엔젤라는 볼록해진 뺨에 입을 댔고 그대로 바람을 불었다.
 
"뭐야, 진짜!" 헤나가 어깨를 꾸역꾸역 밀며 진저리를 쳤다. 떨어지지 않겠다며 엔젤라가 팔에 힘을 준다. 억지로 벗어나다간 그녀가 다칠지도 몰라서 꽃은 고집을 접었다. 엔젤라가 얌전해진 목덜미에 얼굴을 댄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끔은." 턱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꽃은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를 가만히 쳐다봤다.
"됐다. 안 알려줄래." 그녀가 혓바닥을 얄밉게 내밀었다. 계속된 장난에 헤나는 그녀의 어깨를 확 밀쳤다. 몸을 일으켜 잔디밭을 벗어났다.

"맨날 놀려... 맨날..." 엔젤라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줄 모르고 헤나는 발끝으로 땅을 후볐다. 그녀는 헤나의 등 뒤까지 도착했지만 그림자가 졌다. 헤나는 바닥에 그려진 그림자를 봤다. 엔젤라가 아쉽다며 휘파람을 불었다. 꽃이 그녀를 살짝 째려봤다. 
꽃은 흙, 그녀는 잔디를 밟았다. 이게 뭐라고 동떨어지는 느낌을 줄까.

짓궂어도 사모하는 당신에게 붙지 않을 수 없다. 헤나는 느지막하게 엔젤라에게 한걸음을 뗐다. 꽃은 하얀 손을 보았다. 흉터로 가득한 손이 깨끗한 손을 마주 잡았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까만 미소가 샌다. 헤나는 엔젤라의 손끝을 올렸다.
"손바닥에 흉이 없어서 다행이야." 쪽. 애절한 구애가 원하는 곳에 닿기를.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었지만 여전히 성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얗던 성벽이 노을에 물들어 발갛게 탔다. 둘레길이 몹시도 길었던 탓에 엔젤라가 먼저 지쳤다. 무릎을 접고 털썩 앉았다. 
 
"넌 지치지도 않니." 그녀가 투덜거린다.
"업어줄까?" 헤나가 손을 내민다.
 
그녀는 됐다며 흉터투성이 손을 찰싹 때렸다. 엔젤라는 벌떡 일어나 목표 없이 걸었다. 목까지 달아오른 주제에 그녀는 고집이 셌다.
빨간 목덜미, 따뜻한 피부. 뒷모습만 보고 걷다가 엔젤라가 멈춘 줄 몰랐다. 꽃이 등에 꿍 부딪쳤고 힘없이 휘청거렸다. 엔젤라가 옷깃을 붙잡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가까스로 헤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칠칠맞긴." 그녀가 짓궂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덩달아 꽃도 입을 작게 벌린다. 엔젤라는 웃지 말라며 옷을 확 놓았다. 너무하다고 꽃이 엄살을 부렸지만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일 뿐인데 이토록 웃음이 넘친다. 그녀도 저와 같기를 소원했다. 꽃이 무심코 하늘을 봤다. 옛날부터 엔젤라와 함께 별자리를 그리고 싶었는데 지금이 딱 그때였나 봐.
 
서쪽으로 해가 꺼졌고 하늘에는 먹이 번졌다.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빛깔은 꽃을 사로잡았다. 마치 엔젤라처럼 저절로 눈길을 끄는 예쁜...
곧이어 동그란 달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얗고 동글동글한 자태가 귀엽고 앙증맞다. 달이 외롭지 않게 별도 은은하게 하나둘 씩 따라 나왔다. 사이좋은 단란함에 헤나가 눈을 접었다. 엔젤라는 친구를 따라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이 특별하진 않아도 헤나는 귀엽게 키득거린다. 엔젤라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또각또각 걸어와 헤나의 등을 퍽 쳤다.

"왜 때려?" 꽃이 눈을 껌뻑였다. 
"네가 한 눈 팔아서."

엄청난 대답에 헤나가 입을 멍청하게 벌렸다. 엔젤라가 손으로 턱을 닫고 휙 돌아선다. 소란스러운 야시장을 향하는 그녀를 따라서 꽃은 허둥지둥 발을 헛디딘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더욱 바보처럼 군다고, 사람구실도 제대로 못한다고 엔젤라가 실실 웃었다.
엔젤라는 친절히 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꽃은 늘 그랬듯이 하얀 손 위에 제 흉터를 올렸다. 엔젤라는 붙잡던 손을 힘주어 당겼다.

엔젤라는 나풀거리는 꽃을 이끌고 시장으로 갔다. 그녀가 혼자서 질리도록 갔던 이곳도 둘이 되니 새로웠다. 헤나는 노란 뒷모습을 따라갈수록 눈이 반짝거린다. 엔젤라는 시장의 모든 길목을 외웠는지 이리로 들어가서 저리로 나왔다. 사람은 많고 길도 복잡한데 엔젤라는 잘도 갔다. 시끄러운 군중 사이에서 엔젤라의 발걸음만이 선명했다.

그녀가 자그마한 어린아이 때와 똑같이 제 손을 붙잡고 앞서 걸었다. 엔젤라가 가는 곳을 따라가면 항상 즐거운 일이 펼쳐졌다. 헤나는 앞으로도 하얀 손을.
 
"야." 꽃이 전혀 집중하지 못하니 그녀가 붙잡은 손을 위로 쭉 올렸다. 어정쩡한 헤나가 그녀의 가슴에 부딪쳤다.
"계속 헛 생각할래?" 꽃이 우물쭈물거렸다. 엔젤라는 꽃한테 먹구름이 끼기 전에 팔을 뻗었다. 헤나와 예쁜 얼굴이 가까웠다.
 
"도시까지 왔으니 상권을 섭렵해 볼까." 하지만 말은 멀찍했다.

친구가 화분이 된 사이 책을 읽은 덕분일까. 엔젤라는 이제 어려운 말도 할 줄 안다. 꽃은 제게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던 소녀가 기억을 스쳤다. 지층이 뭐냐고 물어보던 어린아이는 쑥쑥 자랐다. 제 변화를 알아달라는 듯 엔젤라가 입꼬리를 씰룩거린다.

사실, 그녀가 책 따위 볼 필요도 없었는데.
헤나는 방안 곳곳에 늘어져있던 책을 전부 없애고 싶다. 제가 빠진 빈 공간을 책이 메꾸다니. 꽃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고갯짓 한 번에 방향을 달리하는 시야처럼 마음도 쉽게 바뀌면 좋겠다.

"책에서 뭘 봤어?" 아래를 보며 헤나가 묻는다.
"이것저것." 엔젤라는 하나씩 손가락을 접다가 툭 내뱉는다. 
"어디부터 갈래?"
"옷이 궁금해."

헤나는 늘 그녀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답에 엔젤라는 들떴다. 빨리 가자고 그녀가 팔을 잡아끈다. 헤나는 그녀의 입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엔젤라가 발이 왜 이렇게 무겁냐며 팔을 때렸고 꽃은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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