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미친 짓을 상기하자 엔젤라는 머리를 짚었다. 꽃을 위해 물어보지도 않는 변명을 속으로 만들었다. 언제쯤 눈을 뜰까. 엔젤라는 눈 감은 친구를 물끄러미 봤다. 단정한 얼굴은 점점 나무껍질처럼 투박한 표면을 자랑했고 피부에서 싹이 피어올랐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제 친구가 인간이 아니라고 세상이 못 박아준다.
엔젤라는 귓가에 나긋한 환청이 들렸다. 곱게 접혔던 눈은 가물가물하다.
줄곧 함께였으니 엔젤라는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들었던 화분을 창가에 뒀다. 엔젤라는 제 몸을 팔로 감싸며 몸을 숙였다. 어깨가 작게 떨렸다. 다시 친구랑 놀고 싶다. 자신이 깨기만을 기다렸던 식물에게 비법을 물어봤다.
"너는 어떻게 그 새벽을 혼자 버텼니?"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풀리지 않는 호기심 대신 헤나에게 물을 뿌렸다.
"뿌리가 썩기 싫다면 얼른 일어나던가..." 얄궂은 마음을 담아 물을 아낌없이 줬다.
친구가 없던 시기 엔젤라는 도망치기 바빴다. 집은 뺏겼고 집 안에 있던 물건은 전부 장작으로 쓰였다. 그래서일까, 진열대에 놓아진 책을 멀뚱히 봐도 구분할 줄 몰랐다. 무슨 책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더라.
"여기부터 저기까지." 엔젤라는 상인에게 턱짓을 했다. 거만한 자태에 상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돈은 있수?" 그녀가 주머니를 책 위로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리가 났고 주머니 끈이 헐거워졌다. 그 안에서 반짝이는 금화에 상인은 표정을 밝게 폈다. 싹싹하게 책을 그녀에게 챙겨줬다.
그녀가 양손으로 들었던 책을 폭신한 침대 위에 떨어뜨렸다. 얇고, 두껍고, 화려하고, 단조로운 책이 이불 위로 와르르 펼쳐졌다. 몇 개는 바닥에 떨어졌다. 엔젤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대강 닦았다. 손에 묻은 땀을 털다 바닥을 봤다. 널브러진 책에 시선이 꽂힌다. 작은 방에 책이 수북했다. 엔젤라는 책을 치우기는커녕 발로 툭툭 찼다. 무심한 발길질에 책이 창문가에 처박혔다.
"개미가 자글자글 끓네." 창문가에서 엔젤라는 발치에 떨어진 책을 주웠다.
창문가에 놓아둔 화분은 하얀 풍경과 따로 놀았다. 바깥은 앙상한 나뭇가지를 흰 눈으로 꾸몄지만 화분은 푸르렀고, 달달한 향기가 났다. 고여있는 공기에 향이 살그머니 퍼지더니 방안을 몽실몽실 채웠다. 창가에는 새가 자주 놀러 왔고 화분 밑은 개미가 꼬였다. 엔젤라는 개미를 손으로 밀거나 입으로 바람을 후 불어서 벌레를 화분에서 떨어뜨렸다. 때때로 개미를 잡아서 새한테 던져주기도 했다. 방 안에서 만만한 개미를 괴롭히며 엔젤라는 화분을 지켰다. 작은 미생물을 괴롭힌 대가를 이렇게 치르는 걸까. 한두 마리는 괜찮았다. 하지만 작아도 떼로 모이면 감당하기 힘든 상대로 바뀌더라.
개미가 초록 잎사귀 위로 까맣게 기었다. 화분 밑에서 개미가 서로를 짓밟으며 득실거렸다. 의리 따위 모르는 몸짓으로 잔뜩 엉켜있다. 역겨운 광경에 그녀는 책에 눈을 돌렸다. 빳빳한 책 양장을 살피다가 손가락으로 표지를 톡톡 쳤다. 딱딱한 소리에 그녀가 책을 들었고 아래로 내리쳤다. 어릴 적 개미를 바위로 찍어 누르듯 그녀가 벌레를 퍽퍽 때렸다. 손길 한 번에 여러 마리가 터졌다. 새 책은 금세 더러워졌다.
엔젤라는 책을 읽기는커녕 제 무식함을 개미한테 선보였다. 창가는 벌레에서 터진 진물로 얼룩졌다. 개미가 비명 대신 뿜어낸 체액은 창문까지 튀었다. 더러운 창틀에 엔젤라는 손목을 꺾어 책을 봤다. 터져버린 곤충, 떨어진 머리, 따로 노는 다리. 단조롭던 표지를 아작 난 개미가 장식했다.
"어차피 남아돌아." 그녀가 방구석으로 책을 던졌다. 손짓에 미련이라곤 없었다. 엔젤라는 침대에 풀썩 누웠다. 어정쩡했던 책이 이불 위로 널브러진다. 그녀가 눈만 내려 깔아 책을 봤다. 친구처럼 단정한 표지에 엔젤라는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엔젤라는 가위로 옷을 자르다 화분을 봤다. 피부에서 튀어나온 싹이 쑥쑥 자랐다. 갈수록 엔젤라는 물렁해지는데 헤나는 가지로 자신을 단단하게 무장했다. 그녀는 천과 가위를 내팽개쳤다. 침대에 널브러진 채 다리를 꼬고 천장을 봤다.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니 다리에서 쥐가 내린다. 깔린 다리가 찌릿찌릿하다. 쥐가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오면서 무료한 고독이 뇌를 건드렸다. 엔젤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주룩주룩 내려온다. 이불이 점점 촉촉해진다. 눈물에 돌아오는 답이 없으니 그녀는 고요 속에서 하루하루 병이 났다.
언제 헤나가 눈을 뜰지 몰라서 엔젤라는 하루종일 방에서 뒹굴거렸다. 폭신한 침대 위에 엎드려 책을 펼쳤다. 몇 장 넘기다 지루해 그녀는 책을 베개 삼아서 잤다. 게으르게 낮잠을 즐겨도 꽃은 한결같은 모습만 고집했다.
베개로 쓰이던 책이 드디어 제 역할을 찾았다. 엔젤라가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올렸다. 좋아하는 외출을 관둔 채 엔젤라는 책을 폈다. 책에서 종이를 한 장을 넘겼으면 대단한 성과였다. 뚱한 얼굴로 그녀가 책을 덮었다. 고개를 돌려 화분을 째려봤다.
"네가 단어를 알려주면 좋을 텐데." 하나하나 직접.
끝말잇기를 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헤나가 천천히 알려줬다. 손가락도 제대로 못 피는 주제에 친구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꽃은 언제나 엔젤라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그리움에 목이 꺾여도 책을 읽었다. 아, 글자가 번진다.
제게 지층을 알려주던 헤나를 정말 좋아했다. 그녀가 책을 꽉 부여잡는다.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서다 이내 잠잠해진다. 고개를 들어 화분을 봤다. 엔젤라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헤나에게 칭찬받고 싶다. 종이가 손가락에 밀리며 꼬깃 구겨진다. 엔젤라는 하얀 종이에 적힌 검은 글자를 바라봤다. 친구를 더 알기 위해 이상한 백과사전을 선택했다. 야속하게도 책은 지루한 내용밖에 없었다. 한 문단마다 인내심을 강력하게 시험할 정도로.
요령이 없으니 엔젤라는 하나씩 부딪히기로 작정했다. 그녀가 늘어진 몸을 똑바로 폈다. 어려운 백과사전을 뚫어져라 봤다. 글자는 흰 종이 위로 빽빽하게 늘어졌다. 엔젤라는 눈으로 빨리 읽는 법을 몰라서 글자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하나씩 소리 내면서 문장을 읽었다. 눈이 껌뻑껌뻑 졸음과 싸우면서도 새벽까지 읽었다.
어느덧 창문가에 햇빛이 스며든다. 엔젤라는 퀭한 눈을 껌뻑이다가 별빛으로 읽었던 책을 덮었다. 베개에 얼굴을 떨어뜨리며 물은 나중에 주겠다고 칭얼거렸다. 그러다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방해되는 딱딱한 물체가 없자 엔젤라는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방안에 숨소리가 새근새근 올라왔다.
신기하게도 한 권을 덮으니까 다음 권은 쉬웠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그녀를 채워나갔다. 뜻을 모르는 단어도 많았지만 어차피 책은 많았다. 읽다가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녀는 어려운 책을 하나둘씩 끝냈다. 풍경을 보자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났더라. 엔젤라가 이번에는 헤나와 눈싸움을 하지 못했다. 뭉클한 추억에 그녀가 고개를 털어댔다. 엔젤라는 다시 백과사전을 펼쳤다.
"몇 번을 읽어도 모르겠군." 엔젤라가 턱을 괴고 낄낄거렸다. 딱딱한 표지가 어느덧 손에 길들여졌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종이에 그녀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재밌는 책은 아니지만 읽을 만했다고. 이상하고 복잡했다고. 책이 자랑하는 방대한 지식이 엔젤라를 골 아프게 했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장을 봤다. 여러 번 읽어도 같은 단락에서 막히고, 읽을 때마다 재밌는 문단도 똑같다.
"볼 때마다 찢고 싶어." 그녀가 책 위로 엎드렸다. 고개를 구겨진 종이에 처박고 엔젤라는 웅얼거렸다.
손수 만든 무덤에 가면 꽃이 있었다. 누구든 캘 수만 있다면 단번에 금과 보석을 얻는다던 유명한 괴물꽃. 겁도 없이 매일 꽃과 함께 담요를 덮었다. 엔젤라는 꽃잎을 잡아당기거나 발로 잎사귀를 쳤다. 가끔 엎드려서 꽃을 바라봤다. 턱을 팔로 괴면서 꽃을 톡톡 건드렸다. 하필이면 뿌리내릴 곳을 여기로 골랐을까.
소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홀로 펴 있는 저 가련한 꽃과 제 처지가 똑같았다. 제 목을 꺾어달라며 괴물꽃이 뻔뻔하게 고개를 드니 잠겼던 입술이 벌어져 웃음이 샜다. 아무 말 없이 덩그러니 까만 꽃잎을 피우는 저 꽃이 엔젤라를 덜 외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한 존재감이 엔젤라에게 힘을 줬다. 친구가 화분이 되어버렸어도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고개를 들어 버거운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
"오!" 그녀가 눈을 반짝이고 발을 동동거렸다. 익숙한 단락이 보이자 엔젤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번이고 읽었던 그 장을 무릎 위에 펼쳤다. 헤나 들어봐.
"괴물꽃 전설. 공동묘지의 꽃이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마을로 내려와 가까이 지냈던 친구와 애인,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바꿔치기했다는 전설. 늦게까지 눈을 부라리는 어린아이를 위한 자장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괴물꽃의 서글픈 향기에 홀려 가짜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고통으로 빠진다."
"다 틀렸어, 전부 틀렸잖아…" 한 문단을 다 읽자 엔젤라는 쿡 웃었다. 낮게 비죽이면서 종이를 손가락으로 문지렀다.
"내가 작가라면 이 문장을 넣겠어. 괴물꽃은 사람을 좋아해 어수룩하게 따라 하는 미련하고 바보 같은 꽃이다..."
엔젤라는 한 단어, 한 단어를 삭막하게 이야기하지만 연두색 눈동자는 촉촉해진다. 고개가 바닥으로 떨궈져 한참 동안 올라오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종이를 망쳤다. 드러난 얼굴은 눅눅했다. 그리움으로 물씬 젖어버린 눈은 친구를 보았다.
"헤나, 착한 나의 꽃." 오늘도 물 조절을 못 했다. 실수로 많이 줬다.
엔젤라는 매일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에서 가슴을 울리는 문장도 찾았다. 이제는 책 장르도 안다. 시장에서 책도 옷도 취향대로 고를 수 있다. 엔젤라는 계절이 바뀌자 독서가 습관으로 바뀌었다. 읽다가 흥미로우면 종이를 접었다. 어떤 책은 접힌 부분이 많아서 처음보다 옆테가 두툼해졌고 어떤 책은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구김살로 두툼해진 책이 여러 권이 되었다. 무엇부터 시작할까. 착한 헤나는 어떤 이야기든 눈을 곱게 접어줄 거야. 화분은 엔젤라의 속도 모르고 푸릇푸릇하다.
개미를 무찌르고 구석에 던져버린 책에 먼지가 자욱할 무렵 기적이 찾아왔다. 침대에서 종이를 넘기다 엔젤라는 화분을 봤다. 아무렇지도 않게 헤나가 눈을 깜빡인다. 엔젤라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헤나도 덩달아 깜빡였다. 미처 재회를 준비하지 못했던 엔젤라는 손으로 종이를 잔뜩 구겼다. 그녀는 태연하게 찌그러진 종이에 눈을 휙 돌렸다.
"꿈이라도 꿨니?"
"꿈? 그게 뭐야?" 화분이 뻐끔거렸다. 바스락바스락. 껍질이 부서진다.
"네가 눈 감고 있던 동안 본 거."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두 번 다시 잠들고 싶지 않다고 헤나는 중얼거렸다. 제 몸이 어디에 있는지 의문을 표하기보다 헤나는 하나뿐인 눈을 깜빡였다. 한 번 깜빡인다. 엔젤라의 머리카락이 조금 자랐다. 두 번 깜빡인다. 주변에 책이 널브러졌다. 세 번 깜빡인다. 화분과 엔젤라가 눈이 마주쳤다.
언제 봐도 예쁜 얼굴이지만, 조금 변했다. 주홍 눈썹이 축 쳐진다. 나무껍질을 타고 물이 또록 내려간다. 눈이 파랗게 깜빡일수록 흙은 물을 쭉 삼켰다.
식물이 우울하게 시들기 전 위에서 물이 쏟아졌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헤나는 엔젤라가 머리맡에 두고 키우는 화분으로 전락했으니. 꽃은 시선을 돌려 물뿌리개를 봤다. 물뿌리개에서 물방울이 달랑거린다. 떨어진 물방울은 헤나에게 톡 떨어졌다. 텅 빈 시선은 물뿌리개 끝을 타고 올라갔다. 물뿌리개, 하얀 손, 그리고 엔젤라.
"물 줄 때가 됐어." 그녀가 투명스럽게 말했지만 손길은 자상했다. 눈물을 닦을 수 없는 헤나를 살살 어루만진다. 본래 부드러웠던 볼이 딱딱해 엔젤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앤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손 많이 가는 화분 같으니..."
식물주제에 물을 빨아먹지 못할망정 내뱉고 있냐. 엔젤라가 타박했다. 화분은 사람의 손길을 요구했지만 엔젤라는 화분을 가꾸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 그런 꼴로 있을 거야." 엔젤라가 이파리를 잡아당겼다. 쭉쭉 잡아당겼다. 차분한 녹색을 자랑하던 잎은 살짝 찢어졌다.
"빨리 날 따라 하지 않으면 네 잎... 떨어질걸." 제 손길을 빨리 내치길 바라는 듯 식물을 계속 당겼다. 손은 식물을 못살게 괴롭혔지만, 그리움이 잔뜩 묻어났다. 헤나는 설렘을 감추지도 못한 채 용기를 냈다.
“잠시만 방에 혼자 있고 싶어.” 딱딱한 피부가 갈라졌다.
부탁을 듣자마자 엔젤라는 화분에게 등을 보였다. 또각거림이 멀어진다. 책이 발에 걸렸는지 툭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곧장 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엔젤라는 닫힌 문에 등을 살짝 기댔다.
헤나가 돌아왔다! 엔젤라의 하나뿐인 친구가 돌아왔다! 가슴에 손이 저절로 올라온다. 손으로 옷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서 심장이 느껴졌다.
"아, 아......" 엔젤라는 탄사를 작게 내뱉는다.
덜커덩. 삐걱삐걱. 그녀는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뻔히 알지만, 궁금했다. 꽃이 제 몸을 어떻게 조립할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호기심을 참고 복도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뒤에서 찰칵거리는 금속음이 났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다며 말을 건네온다. 문에서 등을 떼니 문고리가 돌아갔다. 틈 사이로 흉터투성이 손이 보였다.
"앤지." 늦잠꾸러기가 헤헤 웃는다. 조심스럽게 엔젤라의 양손을 마주 잡았다. 엔젤라는 손 끝을 보다 헤나와 눈이 마주쳤다. 꽃이 수줍게 눈을 접는다. 익숙한 모습에 엔젤라는 녹아내렸다. 여태껏 기다렸던 따뜻함은 바로 이것이었다. 방금까지 화분이었던 친구가 금세 인간을 흉내 낸다. 헤나를 제 옆에 둔지 오래되었지만 엔젤라는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어둡고 습한 지적감정체. 사람을 괴롭히는 못된 괴물꽃은 세상에서 눈치를 많이 보는 바보 같은 제 친구다. 엔젤라는 친구가 제 눈물을 모르게 헤나를 꽉 껴안았다.
익숙한 품. 익숙한 감촉, 익숙한 냄새. 엔젤라는 어깨에 얼굴을 숙였다. 팔로 허리를 세게 감쌌다. 빈틈조차 용납 못 하듯. 헤나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어깨가 축축해짐을 안다. 꽃은 고독을 홀로 이겨낸 엔젤라를 자상하게 감쌌다. 따뜻한 토닥임에 엔젤라는 고개를 떼지 못했다.
"나도 널 보고 싶었어..." 꽃은 노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꽃은 그녀를 다정한 품에 가두고 만끽했지만 눈은 공허했다. 지금도 꿈을 꾸는 건지 헤나는 엔젤라를 파랗게 담지 못했다. 엔젤라가 낯간지러움에 홀라당 빠진 사이 헤나는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뇌를 흉내 내어서 그런 걸까? 생각이 좀스럽게 증식해 혼란스러웠다. 꽃은 제게 달라붙은 엔젤라에 온몸이 따뜻하게 데워지지만, 저를 잠재운 마법사를 지독하게 저주했다.
개자식. 망할 놈. 그깟 남자 때문에 헤나는 소중한 찰나를 뺏겼다. 그리고 꿈이란 것이 꽃한테 잔혹한 짓거리를 했다.
꿈속에서 꽃은 혼자였다. 온통 새까만 공간에서 가만히 있었더니 밑에서 빨간 핏물이 터졌다. 분수처럼 피가 솟자 한쪽 얼굴이 빨개졌다. 꽃은 식물답게 피 튀기는 자리를 그대로 지켰다. 밑도 끝도 없이 검은 허공이 핏물을 뿜다가 이내 멈췄다. 꽃이 자세를 꼿꼿하게 굴자 보이지 않는 바닥이 쩍 갈라졌다. 헤나는 거꾸로 떨어졌다. 그런데 거꾸로가 맞는 걸까? 머리부터 떨어지는지, 발부터 떨어지는지. 지금 어디를 향하는지 헤나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퍽 부딪혔다.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익숙한 옷차림에 꽃은 활짝 웃었다.
"앤지, 왜 그러고 있어?"
헤나가 바닥에 엎드린 엔젤라를 제 쪽으로 돌렸다. 얼굴이 까맣게 파였다. 꽃은 입가를 굳히고 주변을 돌아봤다. 노란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하나씩 뒤집어봤다. 전부 얼굴이 없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은 말할 수 없도록 참담하게 훼손되었고 다른 무엇은 처음 마주한 그 시절의 어린아이였다. 헤나는 아이를 품에 들었다. 꽃은 눈물이 펑펑 났다. 아이를 폭 껴안고 고개를 숙였다. 제가 든 시체 아래에 꿈틀거리는 뿌리를 봤다. 그 뿌리는 제 것이었다.
꽃은 잠에서 깨고도 꿈속을 헤엄쳤다. 헤나의 손길이 느려지자 엔젤라가 허리를 꽉 감았다. 덕분에 헤나는 꿈에서 벗어났다. 품속에서 눈물이 사랑스럽게 번진다.
어떻게 해야 이 행복한 시간을 늘릴 수 있을까? 욕심이 많은 식물은 추잡한 기도를 멈출 수 없다. 그토록 끔찍한 꿈이었어도 꿈이 알려준 끝에서 헤나는 목표를 찾았다. 평생 엔젤라와 함께하고 싶다. 영원히 제 삶에 박제하고 싶다. 그래 불가능하겠지. 우스꽝스러운 바람이어도 헤나는 절대 이 소원을 놓을 수 없다.
꽃은 어두운 마음을 꽁꽁 숨기고 실존하는 엔젤라의 하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글 >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물꽃: 12. 둘과 두 사람(2) (0) | 2024.07.28 |
---|---|
괴물꽃: 11. 둘과 두 사람(1) (0) | 2024.07.28 |
괴물꽃: 9. 화분(1) (0) | 2024.07.28 |
괴물꽃: 8. 가을축제 (0) | 2024.07.28 |
괴물꽃: 7. 너를 위한 옷 (0) | 2024.07.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