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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14. 결혼식(2)

by 넴 박 2024. 7. 28.

온몸이 비에 젖어도 옷이 무거운 줄 몰랐다. 헤나는 터덜터덜 왔던 길을 돌아왔다. 하늘에서 무섭도록 비가 떨어진다. 빗줄기가 빈틈없이 촘촘해서 꽃이 봉오리를 도무지 들 수가 없다. 그대로 발을 옮겼다.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이 더럽게 남았다. 미처 뿌리를 잘라내지 못했는지 기다란 무언가가 쓸려간 흔적이 남았다. 오늘따라 비가 잔뜩 내려서 흔적마다 빗물이 고였지만, 곧 흙이 물에 풀어져 경계가 느슨해졌다. 헤나가 땅만 보고 걸었더니 벌써 숙소 앞까지 왔다. 
 
문에 이마를 댔다. 들어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땅에 스며들고 싶다고 느끼던 참 끽하고 소리가 났다. 나무문이 안쪽으로 열리자 헤나는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기우뚱하던 몸이 폭신한 곳에 닿았다.
 
"비 오는데 어딜 갔다 와?"
 
꽃이 고개를 드니 눈앞에 엔젤라가 있었다. 한심한 몰골이라며 혀를 차더니 그녀가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뒤적였다. 주홍머리카락에서 물이 튀었다. 엔젤라는 쉬지 않고 투덜거리면서 헤나의 외투를 벗겼다. 꽃이 미적거리자 억지로 팔을 비틀었다.
 
"답답하게 굴지 마." 그녀가 꽃을 툭툭 건들었어도 헤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엔젤라는 미간을 좁힌다. 옷을 잡았던 손을 풀고 위로 올렸다. 하얀 손가락에 뺨이 꽉 짓눌러지자 그제야 꽃이 엔젤라를 봤다.

"날 앞에 두고 헛생각을 하다니." 그녀가 심술 맞게 입가를 올렸다.
"미안해......"
 
엔젤라는 딱 한 번만 봐준다면서 몸을 휙 돌렸다. 안으로 또각또각 걸어가더니 구석을 뒤졌다. 헤나는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그녀가 노여워하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다. 그녀가 몸을 숙인 채 헝겊주머니를 뒤적인다.

"찾았다." 손 끝에 샌들이 보였다. 얇은 가죽끈이 돋보이는 세련된 신발이었다. 헤나는 샌들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서 엔젤라를 바라봤다. 꽃이 멍청하게 벌어진 입을 뻥긋거렸다.
 
"아침마다 산만하게 굴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헤나는 눈물이 절절 나왔다. 어쩔 줄 모르며 발걸음을 뗐고 엔젤라를 꼭 껴안았다. 훌쩍거리며 얼굴을 어깨에 기댔다.
"멍청이. 너 때문에 나까지 다 젖잖아." 하얀 손이 주홍머리를 파고들었다. 살살 쓰다듬는 손길은 자상하고 따뜻했다.
 
 



 
샌들을 신고 오자 아무도 헤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꽃은 눈을 반짝였다. 지붕을 타고 기둥으로 물이 흘러내린다. 빗물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토독토독 아름다운 소리를 자아냈다. 헤나는 귀를 기울었다. 파편으로 터져나간 빗물은 구슬펐다. 바깥은 습기가 자욱했고 잠깐인 줄 알았던 비는 오래 내렸다. 소나기가 아닌 장마였던 걸까.

"너희들도 성당에 다니는구나. 왜 지금껏 못 봤지?" 입구에서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둘을 쳐다봤다. 
어딜 가도 그를 마주치는 군. 지긋지긋한 갈색에 꽃은 입을 다물었다. 빗소리에 불순물이 섞였다. 앞서 나가는 남자를 보면서 헤나는 엔젤라에게 낀 팔짱에 힘을 줬다. 팔이 꽉 끼자 그녀가 꽃을 봤다. 헤나가 남자의 등을 녹일 듯 쳐다보길래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엔젤라가 헤나를 이끌고, 엔젤라를 술집에서 조우한 남자가 이끌었다. 둘 뿐이었던 세상에 타인이 끼자 헤나는 손등 위에 핏대가 섰다.
"힘 빼." 그녀가 손을 찰싹 쳤다. 심통이 난 꽃은 유치하게 발에 힘을 줬고 신발이 질질 끌렸다. 발걸음이 묵직해지자 그녀가 적당히 하라며 팔짱을 휙 빼려고 어깨를 틀었다.
"잘못했어. 팔 빼지 마..." 뻘뻘거리며 조심하겠다고 헤나는 덧붙인다.
 
그녀에게 혼난 헤나는 전부 남자 탓으로 돌렸다. 텅 빈 눈을 쩍 벌어진 등으로 채웠다. 그가 당당한 모습으로 으스대는 이유를 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균형 잡힌 외양을 가졌으며 지금까지 조우한 남성 중에 가장 괜찮았다. 질투가 부글부글 끓었다. 넘친 질투는 눈빛으로 샜다. 욕심쟁이 괴물꽃은 한 사람밖에 몰라서 남자를 잡아먹고 싶었다.
 
"헤나는 너한테 껌뻑 죽네."
"그야 당연하지."
 
엔젤라는 헤나의 속도 모르고 낄낄거리기 바빴다. 꽃은 바닥을 보다 익숙한 의자가 보였다. 벌써 건물 내부까지 쏙 들어온 둘에게 남자는 넉넉한 곳을 골랐다며 능청을 떤다. 그가 증명하듯 안쪽으로 먼저 들어가 좌석을 툭툭 쳤다. 엔젤라는 좌석을 휙 보고 헤나에게 말했다.
 
"네가 안쪽으로 들어가." 꽃은 드물게 눈썹을 구겼지만, 엔젤라는 뻔뻔하게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살짝 보이는 부드러운 입가를 헤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녀는 고집불통이라서 말을 들을 때까지 꼼짝도 안 하겠지. 체념한 꽃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고 엔젤라는 덩달아 옆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평소랑 똑같은데."
"네 다리가 길어서 그래." 
"아까부터 듣기 좋은 말만 하네?"
 
침묵을 지켜야 할 성당에서 남녀가 꽃을 사이에 두고 배은망덕하게 떠들었다. 꽃은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위에 올려뒀던 손에 힘이 들어가 파란 천을 꽉 쥐었다. 애꿎은 천을 괴롭히니 엔젤라가 흉터 위에 손을 올렸다. 엄지 손가락으로 흉터를 쓰다듬고 툭 튀어나온 부위를 살살 매만졌다.
손길에 헤헤 웃는 꽃을 뒤로한 채 엔젤라는 남자와 떠들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소음이 짙어지자 앞 좌석에서 기도하던 여자가 벌떡 일어난다. 이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길래 엔젤라는 곧 시비가 걸릴 줄 알았다. 누군가가 딴지를 걸려는 순간에 옆에서 외쳤다.
 
"엔젤라, 나와 결혼해 줘!"

엔젤라의 손길도 뚝 그쳤다. 빗소리도 멈춘 줄 알았다. 시끄럽던 이곳이 순식간에 고요를 되찾았다. 장소에 걸맞은 완벽한 침묵에 모두 정숙했다. 헤나는 엔젤라의 손을 꽉 잡았다. 다가오던 여자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밝게 웃었다.
"축하해!" 손을 올려 박수를 쳤다. 다들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다른 곳에서 또 박수를 쳤다. 사방에서 손바닥이 부딪쳤다.

만약 꽃이 엔젤라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귀를 뜯어냈을지도 모른다. 이게 뭐라고. 아니꼽던 시선이 왜 박수갈채로 바뀌는 거야. 쉽게 축복을 쟁취한 남자에게 질투가 뻗지 않게 헤나는 엔젤라를 쳐다봤다.
웃네. 들뜬 미소에 헤나는 세상이 여러 개로 보였다. 소중하게 쥐었던 하얀 손을 잡아도 될지 태초적인 의문이 들었다. 닿아서 좋았고 간절하게 바랐던 손인데.

"저렇게 예뻐야만 이런 축하를 받는 걸까?" 
"축하해! 잘 어울린다!"
"남자라면 용기를 가져야지 아무렴!" 

어느새 흉터를 덮고 있던 하얀 손은 제 주인을 찾아갔다. 손 끝에서 시선을 올리자 엔젤라가 보였다. 그때 그 결혼식처럼 청혼을 받는다면 사람은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모두가 남녀를 바라볼 때 헤나는 바닥을 봤다. 이런, 샌들. 샌들을 신고 있었지.

헤나가 화분에 갇혔어도 엔젤라는 활짝 웃는다. 숙인 고개를 슬쩍 돌려 미소를 봤다. 미소가 환해서 눈부셨다. 꽃은 엔젤라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다 해줄 거야. 
이번에는 축복을 망치지 않았다. 헤나가 고개를 올렸다. 이토록 가까운 그녀에게 꽃은 눈꼬리를 접었다.

"잘 어울리는 한쌍이야." 헤나도 박수를 쳤다. 손바닥이 맞닿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엔젤라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휙 다가왔다. 살짝 비틀어진 얄미운 입가에 헤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헤나, 왜 날 보내려고 들어?" 서운하다며 엔젤라는 헤나를 팔꿈치로 툭 쳤고  남자는 헤나가 옳다며 우리를 응원하는 친구가 있다고 초를 쳤다. 갈색머리는 헤나의 어깨에 서슴없이 손을 올렸다. 거리감 없는 그에게 엔젤라가 표정을 굳히며 커다란 손을 찰싹 때렸다.

"감히 누굴 만져대?"

엔젤라는 손을 헤나의 어깨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화풀이에 가까운 손길이어도 헤나는 아프지 않다. 그녀가 소유욕을 보여줄 때마다 꽃의 주인이 누구인지 헤나는 뭉클하게 각인했다. 기쁨에 찬 식물이 초록빛 생기를 뽐내자 근처에서 활력을 뺏은 줄 알았다. 차가운 반응에 머쓱해진 구경꾼들은 헛기침을 내뱉고 서로 눈치만 보다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가 일생의 큰 행사를 엔젤라에게 할애했지만, 엔젤라는 헤나의 어깨를 매만지기 바빴다.
"아아, 차였다." 갈색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벅벅 긁으며 이 상황을 즐겁게 과장했다. 그가 재치로운 넉살을 뱉자 주변에서 시시덕거린다.
꽃은 사모하는 당신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헤나는 그렇게 그가 미웠다. 괜찮은 남자라서 더욱 싫었다. 꽃이 벌떡 일어나니 엔젤라가 당황했다. 그래도 손은 헤나를 꼭 붙잡은 채였다. 헤나는 슬프게 웃었고 바깥에 앉은 그녀를 밀쳤다. 그 과정에서 옷매무새를 붙든 손이 떨어졌다.

"헤나? 야!" 꽃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헤나는 흐르는 빗물을 내버려 뒀다. 진흙이 추잡하게 샌들을 붙잡았다. 선물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더러워졌다.
꽃은 발을 감싼 샌들이 어색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엔젤라가 그를 받아들인다면 헤나는. 한 사람밖에 모르는 괴물꽃은.
 
중용을 잃어버린 사고가 끝으로 튀기 전 팔목이 붙잡혔고 헤나는 어깨가 뒤로 빠질 뻔했다. 아픔에 꽃이 신음을 내뱉는다. 무게 중심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니 그대로 퍽 넘어졌다. 헤나는 비가 고인 흙탕물에 빠졌다.
옷이 진흙에 얼룩졌다. 서툴게 묶은 샌들의 끈이 볼품없이 끊어졌다. 신발은 신을 수 없으면 쓸모가 없다. 헤나도 마찬가지다. 엔젤라가 꽃을 가꾸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단 생각으로 헤나는 고개를 들었다. 엔젤라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릴 때처럼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헤나는 엔젤라를 말똥히 쳐다보다 흙탕물을 봤다. 빗방울이 쉬지 않고 떨어졌다. 웅덩이에 볼품없는 동그라미가 출렁인다. 꽃도 마음이 동그랗게 울렁거렸다. 그녀는 툭하면 토악질을 내뱉었는데 이런 기분일까.
 
"미안해, 신발 망가졌어." 
"왜 도망가?"  
물속에 퍼진 흙을 쳐다보다가 끊어진 신발에 시선이 향한다. 헤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끊어진 실이 달랑거린다.

"그렇게 싫었니?"
그녀는 늘 당당했다. 목소리도 덩달아 자신감이 넘쳤다. 그랬던 목소리가 음울하게 퍼졌다. 헤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었다. 비 때문에 노란 머리카락은 얼굴에 붙고 옷은 폭싹 젖어버렸다. 엔젤라는 흙탕물에 빠진 꽃과 비슷하게 초라했다. 그녀가 머리카락이 방해가 되는 듯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가리는 것 없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헤나는 이가 달달 떨렸다. 하얀 얼굴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무섭다. 꽃은 그녀에게 모조리 제 잘못이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싹싹 빌고 싶다.

추적 맞은 빗물이 엔젤라의 눈가를 타고 내려가자 눈물처럼 보였다. 진짜와 가짜를 분간할 줄 모르는 헤나는 고해성사를 청했다. 

"그와 있을 때 넌 즐거워 보였어."
"부족해. 더."
"너희 둘 어울리더라. 그 남자라면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
"더."

더, 더. 엔젤라는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을 모양이었다. 헤나는 바닥을 봤다. 비가 우울하게 뚝뚝 내린다. 웅덩이에 동그란 파장이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마치 비처럼 거짓을 섞은 진실이 동그라미처럼 끝없이 나온다.

하얗던 얼굴이 창백해진다. 예전부터 비에 쫄딱 맞았지. 그때마다 운 좋게 감기를 피해 갔는데. 이번은 통 모르겠다. 엔젤라는 추위에 손이 덜덜 떨려오자 그녀는 팔짱을 꼈다.
"더." 엔젤라는 딱 한 가지만 떠올리며 욕심을 부렸다.

"나도 너랑 결혼하고 싶어......"
엔젤라를 향한 갈망에 꽃은 흙탕물을 전부 빨아들였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데..."
그녀에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고, 우울한 비는 그칠 줄 몰라서 꽃은 몸을 일으켰다. 옷이 흙탕물을 잔뜩 머금어도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헤나가 더러운 손으로 엔젤라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이어진 손이 차가웠다. 피부도 파랗게 얼어버렸다. 결혼식이 이뤄졌던 꽃나무 아래로 그녀를 추적하게 이끌었다. 철퍽거리는 걸음을 떼면서 헤나는 몰래 울었다. 진작 나무 밑으로 그녀를 데려올걸. 비를 피해도 엔젤라는 온몸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헤나는 진흙을 삼킨 제 소매를 옷에 벅벅 문지르고 쭉 짰다. 간신히 소매를 깨끗하게 만든 뒤에야 엔젤라에게 묻은 빗물을 조심히 닦아냈다.

창백한 얼굴에 헤나는 눈물이 새지 않게 고개를 올렸다. 칙칙한 하늘은 아까까진 어두웠는데 지금은 빛이 살짝 보인다. 맑아진 걸까? 착각일까?
비는 무심하게 일대를 감쌌다. 울창한 잎과 두꺼운 가지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 양 비는 녹색 나무 아래에서 둘에게 조금씩 스며들었다. 푸릇푸릇한 잎 끝에 이슬이 맺히고 톡 떨어졌다. 빗물이 형성해 낸 순수한 아름다움은 빛이 났지만, 엔젤라만큼은 아니었다.

엔젤라는 침묵을 지킨 채 축축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헤나는 애가 타서 그녀의 손을 제 입가로 이끌고 호 불었다. 얼른 손이 녹았으면 좋겠단 마음을 담아서 따뜻하게 바람을 호호 분다. 입김이 그녀를 데운 걸까. 꽁꽁 얼었던 엔젤라의 입이 봉인을 풀었다.

"그럼 결혼할까?"
"뭐라고?"
믿을 수 없어서 헤나가 되물었다.
 
"둘이서 결혼할까?"
"쉽게 말하지 마..."
헤나가 붙잡았던 손에 입맞춤을 떨군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귀엽게 이어진다. 꽃은 하얀 손바닥에도 입을 맞췄다.
헤나가 품은 간절한 마음을 엔젤라가 조금이라도 들춰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뿐만이라도 기대하고 말아서. 사모하는 당신의 한 마디에 사랑이 샘솟고 원망이 피어올랐다. 사랑에 알맞지 못한 재료가 더해져 사랑을 꿰매어가니 이게 무엇인가 싶다. 왜 사랑에는 불순물이 들어가는 걸까, 순수하게 당신을 원할 뿐인데. 헤나는 엔젤라가 조용해지자 다시금 엔젤라의 손가락에 입을 맞춘다.

기적은 가까웠고 바라던 자에게 내려쬐는 법이니.
엔젤라가 식물의 손을 입가로 이끌었다. 도톰한 입술이 흉터에 닿자 헤나는 벌벌 떨었다. 엔젤라는 흉터에 입을 댄 채로 눈을 또렷하게 떴다. 둘은 시선이 마주쳤다. 찰나가 달콤하여 꽃은 엔젤라를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난 하면 안 돼?" 엔젤라의 뻔뻔한 대답에 헤나가 고개를 형편없이 저어댔다. 그녀는 이 모자란 괴물꽃을 어쩌나 싶다. 앳된 시절처럼 고개를 올려 눈물을 닦아줬다. 눈가도 살살 어루만져줬다. 이토록 울었어도 전혀 붓지 않는 얼굴은 언제 봐도 새롭다. 예쁜 파란 눈에서 엔젤라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네." 헤나가 하늘을 대신해 엉엉 울어주니 그림자가 조금씩 밝아진다. 우중충한 회색 구름 틈에서 하얀 햇살도 삐죽 나왔다.

아, 날이 화창해졌다. 착한 나의 꽃은 비가 그치길 바라는 제 소원마저 말하지 않아도 들어준다. 기특하니까 잔뜩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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