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를 둘러싼 검은 숲을 앞두고 관문에서 막혔다. 커다란 관문은 웅장했고 쉽사리 지나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엄청난 압도감에 엔젤라는 내심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숲을 살핀다. 검은 숲이란 이름과 다르게 주변은 잎이 붉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이파리가 나중에는 까맣게 변해버린다니 자연은 놀랍다. 뒤에서 바람이 휙 불어 노란 머리카락이 뒤집어진다. 엔젤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이 거칠군." 그녀에게 헤나가 오도도 다가와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
우연히 밑을 보다 낙엽을 발견했다. 발 근처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굴러다닌다. 거센 바람을 버티지 못한 연약한 잎사귀는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곧 쌀쌀해지겠단 생각이 들어 엔젤라는 소매를 살폈다. 저번에 구한 보라색 옷감은 보온이 괜찮았다. 제 훌륭한 안목에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그러다 식물은 계절에 큰 영향을 받지 않냐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린 시절엔 못 입게 된 옷을 마을에서 물려받아 걱정이 없었다. 험하게 해진 옷도 여러 벌 덧입으면 춥지도 않았고. 엔젤라는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푼이 꽃은 키를 따라한 주제에 옷은 전혀 갈아입지 않았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의 하나로 버티다니 엔젤라는 좀체 이해가 안 돼서 미간이 구겨진다. 험악한 시선이 헤나를 위아래로 훑다가 망토 안쪽을 향했다.
신비롭게 하얗던 옷은 낡아서 노란색에 가까워졌다. 군데군데 직접 바느질을 해줬던 흔적도 보인다. 멋쟁이가 헤나에게 옷으로 잔소리를 한 두 번 했겠는가. 꽃은 어린애가 조각을 이어 붙인 형편없는 옷을 통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답답한 행색을 보자 엔젤라는 입가를 씰룩거린다. 그녀는 헤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낙엽이 발길에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잔뜩 낙엽을 망가뜨린 채 헤나가 뒤집어쓴 망토를 잡아끌더니 확 펼쳤다. 헤나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부끄러워..." 꽃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엔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망토를 펼쳐서 누런 옷을 빤히 쳐다봤다. 올이 안 나간 곳이 없다. 조각끼리 붙은 경계는 헐거워졌고 천은 고쳐쓸 수 없을 만큼 꾀죄죄하다.
"이딴 옷 찢어버려야 돼." 엔젤라가 혀를 찼다.
"그건 안 돼."
수다를 배우더니 꽃은 말대꾸를 잘했다. 헤나는 중지와 약지를 살짝 벌렸다. 그 틈으로 엔젤라를 몰래 봤다. 엔젤라의 눈썹이 좁아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제 마음에 차지 않으면 미간부터 찌푸린다. 엔젤라의 오래된 습관을 곱씹자 꽃은 입이 벌어진다. 손으로 얼굴을 다 가렸어도 엔젤라는 눈치가 기가 막혔다.
"네가 웃을 처지야?" 엔젤라가 뭐라 하든 헤나는 너무 좋다. 손 밑에 봉인해 놨던 입이 까맣게 커졌다. 꽃이 히죽거리기만 하자 엔젤라는 홧김에 손을 풀었다. 맥없이 옷이 늘어났지만 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망토를 탁탁 털었다. 엔젤라는 휙 돌아서 왔던 길을 걷는다. 자연스레 그녀는 낙엽을 짓밟았다. 꽃도 덩달아 말라비틀어진 나뭇잎을 밟고 따라간다.
여러 복장을 입은 다양한 사람들이 거리를 누볐다. 값을 부르는 사람, 깎아달라는 사람, 더 주라는 사람. 그저 시장일 뿐인데 온갖 잡소리가 엔젤라의 귀를 아프게 했다. 다들 수도를 가기 위해 준비를 한다고 엔젤라는 추측했다. 덕분에 시끄러운 이 거리는 밤낮구별 없이 사람이 떠들어댔다.
"잘 보고 다녀!"
엔젤라가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몸이 부딪힌 충격에 그녀는 어깨가 옆으로 꺾였지만 당당한 자태는 여전하다. 뻔뻔한 타인이 씩씩거리자 엔젤라는 발을 오뚝하게 세웠다. 바삐 움직이던 그는 발에 걸려 퍽 쓰러졌다. 뒤에서 누구냐고 꽥꽥거리지만 엔젤라는 모른 척 옷을 구경했다.
넘치는 인파 속에서 엔젤라는 낯선 인간과 어깨가 닿을 때마다 제 고향이 오죽 형편없는 촌구석이었는지 실감 난다. 상인이 나열해 둔 옷을 뒤적거렸다. 볼품없이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엔젤라는 사치스러운 물건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히려 허영으로 과장된 광경에 홀딱 빠졌다. 먼저 세련된 꾸밈이 눈에 띈다. 모든 취향을 파고들 수 있다는 상인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작품이 빼곡했다. 그녀가 옷 구경이 재밌어지자 손길이 바빠진다. 옷이 뒤적거리다 엔젤라는 씩 웃었다.
작고 촌스러운 마을과 달리 엔젤라는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이 치마도 저 바지도 흥미롭고 궁금하다. 엔젤라는 꽃처럼 굴던 헤나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헤나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헤나를 빤히 보더니 구경하던 옷 하나를 집었다. 상의를 들고 헤나 위로 겹쳐본다. 상상했던 모습이 아닌지 들었던 옷을 대충 내려두고서 몸을 틀었다. 엔젤라가 옷을 뒤적거리다가 이번에는 한벌옷을 들었다.
"확실히 이게 낫네."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헤나는 멀뚱하게 눈만 깜빡였다. 엔젤라는 어울리는 복장을 찾았다며 뻔뻔하게 웃었다. 꽃은 그녀가 웃으니 덩달아 눈을 접었다.
상품을 계속 들추자 상인이 썩 꺼지라고 짜증을 부렸다. 방금까지 신중히 단추부터 박음질까지 하나하나 따지던 옷이었는데도 엔젤라는 들고 있던 상품을 손에서 놨다. 옷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뒤에서 상인이 큰 소리를 내지만 엔젤라에게 닿지 않았다. 꽃은 그녀가 망가뜨린 옷을 대신 줍고 덕지덕지 묻은 먼지를 조심스럽게 털었다.
"죄송해요." 꽃이 상인의 손에 은화 한 닢을 쥐어줬다. 동전에 화가 누그러진 상인을 벗어나 헤나는 저 멀리 가는 엔젤라를 쫓아갔다.
"앤지, 같이 가..."
언제 저기까지 갔을까. 빨라진 발걸음을 헤나가 허둥지둥 뒤쫓았다. 많은 인파를 뚫으며 그녀를 봤다. 파란 눈에 사모하는 당신이 담겼지만, 아리따운 뒷모습을 보는 눈동자는 한 쌍이 아니더라. 또록또록대며 다채로운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간다. 꽃은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죄다 파버리고 싶다. 헤나가 나쁜 음모를 품자 향기가 미약하게 퍼졌다.
"이 달콤한 냄새는 뭐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늘어난다. 엔젤라가 작은 속삭임을 들었는지 꽃을 째려본다. 헤나를 목표로 그녀가 또각또각 다가온다. 그때 누군가 무례하게 엔젤라의 팔목을 잡아챘다.
"뭐야?"
엔젤라는 험악하게 손길을 쳐냈다. 늘 그렇듯 엔젤라만이 맡지 못하는 향기가 거리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향이 점점 짙어지자 추잡하게 굴던 남자가 픽 쓰러진다.
"취했냐? 술 곱게 처먹지 그래." 엔젤라는 조롱당해도 싸다며 손을 털었다. 동 떨어졌던 헤나가 그녀에게 후다닥 달려온다. 쓰러진 남자가 보이지 않는지 바닥에 몰상식하게 널브러진 손등을 꾹 밟았다. 밑에서 신음이 올라오지만 꽃은 안 들리는 척 맨발로 남자를 잘근잘근 뭉갰다. 잔학한 아래와 달리 헤나가 우물쭈물거리며 엔젤라의 손을 잡았다. 빨개진 손목을 들어 올려 살핀다. 그녀의 눈앞에 축 처진 눈썹이 보인다. 엔젤라는 속이 간지럽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자." 엔젤라의 팔을 껴안으며 헤나가 살살 졸랐다. 꽃답게 물을 뿌려주는 주인에게 아양을 부린다. 살가운 애교에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 피식 웃는다. 그러자며 그대로 팔짱 낀 채 둘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의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남자 때문에 얼마나 불쾌했는지 엔젤라는 거침없이 말을 쏘아댔다. 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둘이 거리에서 멀찍이 이동하자 둘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살금살금 뒤따라갔다. 행동은 조심스러웠지만 표정은 경악스러웠다.
"... 이건 있어선 안 될 현실이야." 인파 속에서 길쭉한 모자를 쓴 인물이 툭 튀어나왔다.
값비싼 상품을 떡하니 내놓는 시장처럼 관문 앞은 온갖 인물들이 모였다. 다양각색의 역할군이 정비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중 눈치 빠른 마법사가 달콤한 향기에 제 기척을 숨겼다. 호흡도 잊고 잠자코 향기가 새어 나오는 출처를 찾아댔다. 엔젤라에게 뛰어가는 헤나가 눈앞에 지나갔다. 사뿐사뿐한 걸음에 맞춰서 서글픈 향기가 났다. 꽃을 찾아낸 마법사는 이가 딱딱 떨렸다. 그는 평생 볼까 말까 한 괴물꽃을 발견했다. 바로 앞에서 달콤 씁쓸한 향기가 흩어지니 마법사는 공포로 얼룩졌다. 얼굴이 무너질 정도로 경악했다.
말할 수 없는 존재가 수줍게 웃으며 대답한다. 자아가 없어야 할 것이 의지를 품은 채 감정을 표출한다. 세상 끝에 존재한다는 괴물꽃이 수도 가까이에 왔다. 마법사는 꽃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엔젤라에게 저절로 눈이 갔다.
"아까 손목이 썩는 줄 알았어." 그녀가 헤나에게 제 손목을 툭 돌린다. 투덜거릴수록 내려가는 주홍 눈썹을 엔젤라가 힐끔 봤다. 그게 흥미로워서 마음에도 없는 불평을 엔젤라는 계속했다.
둘은 이번에도 같은 방을 썼다. 금방이라도 망가질 법한 낡은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달갑지 않은 삐걱임처럼 불청객이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방을 잘못 들어왔나 싶어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방문을 재차 확인해도 둘이 머물던 방이 맞다. 엔젤라는 초대 없이 들어온 손님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오." 그녀가 입가를 씰룩였다. 지금까지 둘이서 그토록 시장을 헤집고 다녔어도 원하던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늘로 뻗은 길쭉한 모자에 보드랍고 기다란 망토. 까다로운 엔젤라의 요구조건을 모두 충족한 옷이 방안에 떡하니 대령된 상태였다.
엔젤라가 휘파람을 분다. 무엇이든 다 티가 난다. 낡아빠져 노랗게 된 옷처럼 볼품없거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비단결처럼 기품 넘치거나.
"누굴 초대한 적은 없는데."
문을 쾅 닫았다. 낡은 문짝이 제대로 닫히지 않자 엔젤라는 문을 냅다 차버렸다. 또 시끄러운 소음이 났다. 방문이 복도와 방을 구분하지 못하니 못마땅했다. 그녀가 혀를 쯧쯧 찬다.
"이러니 도둑이 들어오지." 눈앞의 상대가 보이지 않는 듯 엔젤라는 예의 없게 내뱉었다. 화를 부추기려는 건지 행동은 산만했다. 인내심을 시험하는 그녀의 무례에 이방인은 한숨이 나왔지만, 배운 지식인답게 엔젤라에게 꾸벅 몸을 숙였다.
"나는 마법사네." 그는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마법사는 제멋대로 군다고 소문이 자자했지. 그걸 경험하다니 영광인걸."
"자네는 미쳤어. 이런 일은 관두어야 하네." 마법사가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헛소리람?" 엔젤라가 지지 않게끔 팔짱을 꼈다.
"저건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꽃이야." 꽃처럼 가만히 서있던 헤나에게 마법사는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오, 헤나를 알아?" 마법사의 시선을 따라가니 자연스럽게 엔젤라는 제 뒤에서 침묵을 지키는 헤나를 봤다.
괴물꽃. 고향에서 비롯된 고유단어를 듣고 엔젤라는 팔짱을 풀었다. 그녀가 헤나의 옷깃을 쥐고 제 쪽으로 끌었다.
"네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나 봐." 그녀는 팔을 쭉 뻗더니 헤나의 목을 감았다. 얼굴과 얼굴이 가까워졌다. 엔젤라가 낄낄 거리는 동안 헤나는 안락한 품속에서 마법사를 빤히 쳐다봤다. 텅 빈 눈빛을 그는 공허하게 마주했다.
우울한 파란색.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눈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마법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을 움켜쥔 손에 땀이 고였다. 몰래 숨을 삼킨 불청객이 무지한 엔젤라에게 용기를 품고 위험을 알렸다.
"그것에게 이름을 붙이지 말게." 긴장한 목소리에 엔젤라는 입꼬리를 거만하게 올렸다. 주도권은 이쪽이 가졌군.
"기이하고 요상한 것에 정 따위 왜 주는가!" 마법사는 곧게 세웠던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찧었다.
엔젤라는 예민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 고향에서 손가락질이 섞인 멸시를 먹고 자랐으니 저절로 눈과 귀가 밝아졌다. 소문에 빠삭한 그녀는 타인의 비밀을 인질 삼아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런 그녀가 하나뿐인 친구를 데리고 다녔으니 경계심이 오죽 늘었을까.
이상한 말이 나돌기 전에 엔젤라는 늘 꽃을 데리고 새로운 마을을 찾았다. 그동안 실패한 적이 없으니 오만한 발자취를 남겼을까. 살려둔 애송이가 복수하겠다고 수소문이라도 낸 걸까. 혹시 마법사는 헤나가 자아낸 향기를 맡고 뒤를 밟은 걸까.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털어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현명했다. 상황을 회피하기보다 해결법 찾기가 훨씬 낫다고. 이내 복잡한 생각을 접었더니 입술이 짓궂어진다.
"괴물꽃 이야기가 여기까지 널리 퍼지다니 믿을 수 없군. 내 고향의 전설이지. 그 이야기에서 꽃은 어수룩하게 등장하지만 헤나는 완벽해."
마법사가 듣기 싫은 말만 하니 엔젤라는 상대를 노려봤다. 날카로운 눈빛과 다르게 헤나를 향한 손길은 다정했다. 그녀는 제 품속에 있는 꽃을 소중히 가꿨다. 어깨에 기댄 얼굴을 천천히 떼어냈다. 누가 보면 샘이 날 정도로.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주홍빛 머리카락을 하얀 손가락으로 빗었다. 손길에 땋은 머리가 헐거워지자 머리카락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엔젤라는 헤나의 앞머리를 헤집었다. 주홍 실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졌다. 손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니 자연스럽게 어깨를 매만졌다. 툭 튀어나온 뼈를 어루만졌다. 이게 진짜 뼈일지 인간을 흉내 낸 기관인지 엔젤라는 호기심이 들었다. 궁금증을 참고 흉터가 가득한 목으로 손을 옮겼다. 울퉁불퉁한 흉터를 지문으로 쓸었다. 볼 때마다 속상한 흔적에 이 손길로 하여금 흉터가 지워지길 바랐다. 엔젤라는 제 엄지를 헤나의 목에 살짝 뭉갰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낯간지러운 행태에 마법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불청객은 관객이 되어 침을 꼴깍 삼켰다. 엔젤라는 입이 쩍 벌어진 관객이 우습다. 제 손길을 따라 욕망 섞인 시선이 떼굴떼굴 따라오니 그녀는 비웃고 싶다. 어느덧 그녀의 손은 얼굴을 감싸고 헤나의 말캉한 볼을 엄지와 검지로 콕 꼬집었다.
"직접 한 올 한 올 빚어낸 나의 걸작."
마법사는 갈수록 적의를 드러내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후회할 선택을 하는 건지. 괴물꽃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기나 할까. 어둡고 좁은 방안은 뜨거운 습기로 채워진다. 엔젤라가 섬세한 손길을 하사하자 헤나는 뺨이 달아오른다. 빨갛게 익어버린 뺨을 엔젤라는 비밀스러운 보석을 다루듯 쓰다듬었다. 마법사는 꽃과 인간이 얼굴이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민망한 광경을 목도하기 버거워 고개를 휙 돌렸다. 외면했어도 눈앞의 열락은 엄청났다. 이곳은 이성을 뒤흔들었지만, 혼란 속에서도 괴물꽃은 눈을 감고 손길을 순종했다.
"이 녀석을 사람 꼴로 만들어준 건 바로 나야!"
침묵이 속수무책으로 깨졌다. 마법사는 잠시나마 숨 쉬는 법을 잊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마법사가 머저리같이 굴어도 엔젤라는 입가를 비죽인다. 그림자가 드리운 방에서 그녀는 차분하게 단장된 거짓을 용납할 수 없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하얀 손가락 끝으로 분노가 들추어졌다. 주홍빛 머리카락이 풀어져 어깨로 떨어졌다. 억센 손아귀에 꽃이 끙끙거린다. 그녀는 마법사를 냉랭히 노려보며 악독하게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어딜 가도 존경을 받는 위대한 마법사였음에도 이곳은 대우를 받을만한 장소가 아니다. 소중한 제 친구를 멸시했으니 당장 바닥에 머리 박고 조아려야 마땅하다.
"현자는 무슨. 순진해 빠진 어리석은 작자야. 무식한 소리 하지 말아." 매몰찬 모습 뒤로 헤나만이 아는 다정함이 펼쳐졌다. 엔젤라는 손에 힘을 서서히 풀었다. 마법사 몰래 그녀가 등을 쓰다듬어주니 헤나는 서러움이 싹 녹았다.
엔젤라가 마법사를 잔혹하게 모욕했다.
"당신이 아는 게 전부인 줄 알지?" 그녀가 불청객에게 마구 윽박질러도 헤나는 여전히 그를 보지 못했다. 사모하는 당신의 품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꽃은 얌전히 엔젤라의 말을 경청했다. 엔젤라만 바라보던 헤나가 축 쳐진 팔을 올렸다. 고요하고 아늑한 속도로. 엔젤라가 분노에 빠져 허우적거리니 꽃이 도와줄 차례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싹 붙어있었으니 느릿한 손길이 끈적해지기까지 금방이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도와주겠네." 마법사가 지팡이를 고쳐 잡는 것보다 흥분한 습기가 제 목 아래를 먼저 덥혀왔다. 깊게 들이쉬는 숨결에 엔젤라는 버벅거린다. 방금까지는 마법사를 욕보이려고 했으나 아무리 무가치해도 생명은 하나다. 엔젤라는 드물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헤나를 제 품으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기회 줄 때 눈앞에서 꺼져!"
헤나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간절히 바라던 엔젤라의 품에 고개를 묻는다. 방금까지 온 힘을 다해 참았지만 꽃은 태양을 바라본다. 사모하는 당신이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주기 싫다는 양 껴안고 달라붙다니. 헤나는 온몸이 간지러웠다. 인간의 살결을 따라한 피부가 검게 찢어진다. 갈라진 곳에서 파란 새싹이 빼꼼 나왔다. 작은 이파리로 시작한 새싹은 곧 피부 속에서 줄기를 늘였다. 엔젤라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속셈이 담긴 탓일까. 줄기는 금방 덩굴이 되어 서로의 몸을 칭칭 감아댔다. 헤나는 행복으로 온몸이 뚝뚝 녹았다. 해맑은 미소는 새까맸다. 모든 곳에서 꽃이 활짝 피어나는 착각에 빠졌다. 자연의 순리대로 절로 발생하는 몸의 달뜬 반응에 식물은 몽글몽글해진다.
"야, 헤나!" 엔젤라가 덩굴을 잡아 뜯지만 어림도 없었다.
"사랑해......" 꽃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댔다.
눈앞에서 갈라지는 뒤통수도 모자라서 고백까지 하다니! 두 개가 된 뒤통수 사이에서 눈이 보였다. 눈꺼풀이 올라가자 마법사는 등골이 오싹했다. 형언불가한 현실에 손이 지진난 듯 떨어댔다. 그러다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마법사는 울고 싶어 졌다.
이런 게 사랑일까? 머리가 쪼개지고 벌어지면서 까만 속을 내보였다. 덩굴이 역겨울 만치 쭉 쏟아져 나온다. 갈라진 틈에서 피는커녕 핏줄, 근육조차 보이지 않는데도 헤나는 기대를 했다. 인간을 따라한 이 육체에 어설프게나마 피를 만들었기를 바랐다. 줄곧 인간을 모방했으니 혹시 모른다면서.
"앤지, 앤지."
인간의 형체가 녹아내리고 무너졌지만 헤나는 변함없이 온몸을 비비적거리며 그녀를 꼭 껴안았다. 어려운 단어를 소녀에게 알려주던 똑똑한 꽃이 사랑에 빠져 바보가 되었다.
마법사는 지금도 바닥에서 허우적거렸다. 한심하게 땅에서 헤엄을 치더라...
헤나가 인간을 벗어날 때마다 이런 식이겠지. 엔젤라는 몇 번을 봐도 진실이 익숙해지지 않겠지. 애초에 말하는 꽃이란 시작부터 잘못됐다. 엔젤라가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 꿈틀거리던 덩굴이 옆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덩굴을 따라가 그 끝을 보니 마법사가 벽에 대롱대롱 붙어있었다. 덩굴은 엔젤라를 쓰다듬던 모양과 다르게 꼼짝 못 하는 마법사를 마구 찔러댔다. 푹푹 찌르자 움찔거리던 마법사의 몸에 구멍이 났다. 한 번에 정신을 놓아버린 건지 무차별로 공격해도 마법사는 조용했다. 벙찐 엔젤라는 입이 벌어졌다. 그 순간 더럽고 까만 핏물이 얼굴에 튀었다.
"하, 짜증 나..." 엔젤라는 전부 귀찮아졌다. 오지랖도 그만 부릴래. 내일은 새 옷을 사야겠다.
찾아오는 새벽처럼 헤나는 배불렀고 어제보다 건강해졌다.
엔젤라는 온몸을 감은 덩굴을 거칠게 뜯어냈다. 덩굴이 꺾이면서 녹색 물이 아끼는 옷에 스며들었다. 엔젤라는 미간을 구기고 우물쭈물 거리는 헤나를 확 째려봤다.
"이 사고뭉치." 꽃은 말대꾸를 잘했지만 이때는 입을 다물었다. 점잖던 꽃이 온 곳에 범벅질을 해놨다. 투둑. 찐득이던 덩굴이 나무판자에 부딪혔다. 엔젤라는 억지로 묶여있던 몸이 결렸는지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헤나에게서 쏟아져 나온 무수한 덩굴이 다시 갈라진 틈으로 들어가니 방이 그나마 정리가 됐다. 덩굴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피부 속으로 기어가니 엔젤라는 속이 울렁거렸다. 마법사를 꿰뚫은 덩굴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벽에서 덩굴이 쏙 빠지니 시체는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그 충격에 내장이 피를 펑 터뜨린다. 처참한 광경에 엔젤라는 구역질을 참지 못했다.
허리를 수그리고 바닥에 쏟아냈다. 노란 위액까지 입에서 뱉어냈다. 헤나가 허둥지둥 다가와 엔젤라의 등을 두드렸다. 또 어깨를 살포시 껴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이제 충분해." 엔젤라가 더러운 입가를 얼룩진 소매에 문댔다. 망가진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엔젤라는 제게 매달린 꽃을 그대로 둔 채 발을 뗐다. 방해되는 덩굴더미는 발로 찼다. 빨간 웅덩이에 밑창이 닿자 쩍쩍거렸다.
그녀가 이제부터 숨 쉴 필요가 없는 마법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얌전한 척 해도 매번 이런 식이지. 질투에 미친 꽃 같으니. 제 어깨에 달라붙은 꽃에 그녀가 시선을 줬다. 식물은 눈을 곱게 접더니 엔젤라에게 방긋 웃었다. 곧 그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잠시나마 엔젤라가 까만 고요를 만끽하던 때 하얀 귓가로 꽃이 나근하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줘." 또 무언가 터졌다. 엔젤라는 얼굴에 뭔가 튀었다고 느꼈다. 꽃이 엔젤라의 시야를 가린 손을 뗐다. 손을 내리면서 볼에 묻은 자국을 살살 닦는다. 연둣빛 시선을 내리자 엄지가 빨갰다. 그럼 그렇지. 엔젤라가 머리를 팽팽 돌렸다. 주인 없는 옷이 덩그러니 보였다.
엔젤라는 자신만의 괴물꽃 수칙을 속으로 읊었다.
만약 꽃이 울그락불그락 거린다면 당장 뒤를 돌아 벗어나라. 아끼는 옷을 잃고 싶지 않다면.
끈적한 방 가운데 마법사가 입고 있던 망토만 남았다. 엔젤라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옷에 손을 뻗기도 전에 헤나가 싫은 내색을 보였다.
"더럽잖아. 내가 치울게." 헤나는 조급하게 군다.
"넌 가만있어." 노란 머리가 찰랑거리더니 헤나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이것 봐라?" 엔젤라는 축축한 옷을 피 웅덩이에서 건졌다. 옷에서 피가 뚝뚝 흘렀고 커다랗게 뚫린 구멍에 엔젤라는 입을 다물었다. 양손으로 옷을 펼치고 관찰했다. 촘촘한 바느질에 고운 옷감 그리고 깔끔한 마감. 조금만 손 대면 새것에 가까워지겠군.
"역시 평범한 걸로 제 몸을 두를 리 없지." 엔젤라는 물건 보는 안목이 탁월했다.
옷을 뒤집어 안감을 펼치자 하얀 자수로 그려진 문양이 보였다. 복잡한 무늬를 표현한 실을 손가락으로 따라 만졌다. 엔젤라는 제대로 된 물건이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문양은 화려했으니 의미 없이 그려지진 않았을 텐데. 엔젤라는 옷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피를 배불리 먹은 이 복장은 특별하다.
"야, 헤나." 엔젤라는 이쪽으로 오라며 꽃한테 턱짓을 했다.
"이 옷에는 착용자를 지키기 위한 마법이 걸려 있어." 호기심에 굶주린 엔젤라가 꼬치꼬치 묻기 전에 헤나가 먼저 친절을 베풀었다. 헤나는 문양을 힐끔 봤다.
"재생, 방화, 방수, 은신... 일단 이 정도." 엔젤라에게 몸을 틀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비싼 옷답게 다양한 기능을 거만히 뽐냈다. 어느새 송송 났던 구멍도 스스로 메꿨잖아. 귀한 장비를 찾아냈다는 기쁨으로 엔젤라는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틀림없이 이 옷은 헤나의 짙은 발자취를 지우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우스꽝스럽게도 수줍음이 많은 옷은 존재감을 흐리게 만드는 힘까지 가졌더군. 엔젤라가 키득키득 웃는다.
"그렇다면 네 지독한 향기를 숨기겠네." 헤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삐진 입술을 엔젤라가 손가락을 꼬집었다. 놀림 한두 번 받냐며 짓궂게 눈썹을 비틀었다. 꽃은 말대꾸가 막혔지만 들뜬 그녀를 보자 환희에 찼다. 감정에 동조하고자 반대를 모르는 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엔젤라는 피식 웃고는 손을 뗐다. 그리고 무거운 옷을 헤나한테 팍 던졌다. 기득권의 피를 빨아먹은 옷을 헤나는 아무렇지 않게 펼쳐서 소매에 팔을 넣었다.
"음?"
타고난 멋쟁이인 엔젤라는 눈썹을 찌푸린다. 옷을 어정쩡하게 든 식물의 손을 붙잡고 몸에 대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나와 옷을 번갈아 쳐다봤다. 또렷한 눈동자가 깜빡거리자 헤나는 낯이 붉어졌다.
"뭔가 거슬려."
그녀가 혀를 찼다. 붙잡던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더러워진 옷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허락 없이 멋대로 굴어서? 꽃은 팔도 제대로 못 뺀 망토를 품에 넣고 헤나는 눈치를 살폈다. 오밀조밀 따지던 엔젤라는 헤나에게 옷이 너와 따로 논다고 덧붙였다.
"음침하게 뒤를 밟던 짓과 걸맞게 비루한 안목이군." 불명예로 이 세상을 떠난 마법사의 흙색 취향을 엔젤라는 애도 없이 조롱했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던 엔젤라는 헤나에게 시선을 툭 던졌다. 기다리라며 손짓한 뒤 헤나를 두고 엔젤라는 혼자 문밖으로 나섰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이 세상과 단절되자 헤나는 말라비틀어진다. 피로 추적해진 방 안에서 화분에 박힌 식물처럼 꽃은 자리를 지켰다. 멍한 시야로 문만 바라봤다. 사모하는 당신이 없다면 기껏 빚어낸 눈도 의미가 없어요. 눈꺼풀은 깜빡임을 잊었다. 눈동자가 말라가면서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세상이 여러 개로 나뉜다. 전부 흐릿하게 바스러진다. 반짝임은 회색으로 무너지고 시간은 가치를 잃어버린다.
당신이 있어야만 세상은 아롱다롱 촉촉하게 빛나요. 그래 지금처럼요. 예전부터 줄곧 기다렸던 익숙한 발걸음이 들린다. 그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앳된 발자국이 성숙해지는 과정이 꽃은 즐거웠다. 딱딱한 부츠가 바닥을 밟는다. 또각또각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텅 비어버린 눈이 오랜 가뭄에서 벗어난 새싹처럼 생기가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가 헤나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낡은 문이 삐꺽거렸다. 문틈으로 예쁜 노랑이 보였다. 엔젤라가 손에 염색약과 가위를 들고 돌아왔다.
"넌 하나뿐인 친구를 잘 뒀어." 엔젤라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반짝임이 방을 비추자 꽃이 활짝 피었다. 어느새 거대하게 피어난 헤나의 마음은 엔젤라만 바라보는 꽃이 되었다. 그녀가 옷을 줘보라며 무뚝뚝하게 내뱉는다. 꽃은 품에서 옷을 꺼낸다. 피가 딱딱하게 굳어서 파직 깨졌다. 달라붙은 핏덩이를 떼려고 애썼지만 세탁 말곤 답이 없었다. 헤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엔젤라는 손가락으로 헤나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지금까지 뭐 했냐?" 이마가 따끔했지만 꽃은 그녀가 감춰둔 다정함을 안다. 언제나 꽃을 우선시하는 엔젤라에게 헤나는 눈을 접었다. 지저분한 방안에 서로를 향한 배려가 차오르며 시간은 따뜻한 색이 덧입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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