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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5. 성장

by 넴 박 2024. 7. 28.


동굴은 칙칙하고 올 이유가 없는 외진 곳이지만 친절하게 변모한 마을 주민이 엔젤라의 호기심을 건드렸다. 
"서쪽 동굴에 가서는 안 돼." 왜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오지랖이 이어졌다.
"간혹 사람들이 간음을 행하거든." 남자가 음흉하게 웃을수록 헤나는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간음이 뭔데?" 

엔젤라가 버릇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눈앞에서 불쾌한 미소가 짙어졌다. 남자가 입을 벌리려던 때 꽃이 엔젤라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다른 곳에 가자고 꽃이 눈치를 주길래 엔젤라가 흉터투성이 손을 우기고서 자리를 벗어났다. 헤나는 질질 끌려가면서 뒤를 힐끔 봤다. 일이 바라던 대로 풀리지 않자 남자는 땅에 침을 뱉었다. 죄 없는 흙을 신발로 뭉개고 짓밟더라.
 
엔젤라가 영특하고 똑똑하다고 한들 그래봤자 어린 아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의도대로 절대 움직여주지 않을 거야. 어른이 되어서 아이에게 해야 할 말, 못할 말을 분간조차 못하다니. 나중에 마주친다면 머리에 씨앗을 뿌려버리겠다. 그는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되는 편이 훨씬 쓸모가 있을 거라고 꽃은 듣지 못할 조롱을 해댔다. 그림자처럼 발끝에서 뿌리가 길어지던 참.
 
"헤나, 간음이 뭐야?"
 
헤나가 꽃이 되려던 걸 알아챈 걸까? 엔젤라는 순식간에 어둠을 치워버렸지만, 잡학다식한 꽃은 정답을 알아도 주저했다. 입을 꾹 다물고 목소리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덜 만들어진 꽃의 장기 속에서 삼킨 음이 웅얼웅얼 낮게 울린다. 헤나가 미적하게 굴자 엔젤라는 옆구리를 찔렀다.

"알아? 몰라?" 추궁이 멈추지 않는다.
 
간음.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며 강간이나 간통, 성매매를 포함하며, 미혼인 사람과 성관계도 포함된다. 어떻게 이 사실을 헤나가 직접 말할 수 있겠어.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 헤나는 대답도 못하고 뚝딱거린다. 꽃이 바보처럼 구니까 소녀는 맥이 빠졌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엔젤라는 헤나의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쳤다. 괜히 소녀가 서운해 보여서 헤나는 속이 꽉 조여 오는 느낌을 받았다. 헤나는 뒷모습을 허둥지둥 쫓아간다. 곧장 능숙해진 발걸음으로 엔젤라에게 도달해 하얀 손을 붙잡았다.
 
"알려주고 싶은데, 지금은 안 돼..." 기껏 내뱉은 말은 대답에 가깝지 않다. 엔젤라는 꽃이 참 신기하다. 질척 맞게 굴어도 전혀 밉지 않다. 되려 제 눈치를 보고 눈썹을 축 내리니까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래, 내가 봐준다." 엔젤라가 헤나의 볼을 양손으로 만졌다. 피부가 부드러워서 볼을 계속 문질렀다. 이게 사람이 아니라니 믿기지 않는 사실이다. 엔젤라는 헤나의 볼을 살짝 꼬집거나 붙잡고 늘렸다. 꽃이 새빨개질 때까지 되는대로 가지고 놀았다. 꽃을 잔뜩 어루만져서 모든 불만을 완벽하게 잠재운 엔젤라는 히죽 웃는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말랑한 촉감을 가득 즐겼기에 소녀는 꽃에서 손을 뗐다. 곰살맞은 호의를 헤나에게 베풀며 엔젤라는 잔꾀를 부렸다. 직접 동굴에 간다면 그곳에 답이 기다리고 있잖아.
 
꼭 소풍 가는 날 비가 오더라. 비를 피하려고 둘은 아늑한 동굴에 들어왔다. 어둡고 따뜻한 동굴은 두 사람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덥혀줬다. 온기는 충만했지만 여전히 몸은 축축했다. 엔젤라는 옷에서 물을 쭉 짰다. 손길을 따라 쥐어진 옷은 머금었던 비를 밑으로 뱉어댔다. 동굴은 자그마한 울림을 큰 소음으로 돌려줬다. 물이 뚝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재미를 부추긴다.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처럼 동굴이 소리를 돌려준다. 울림이 휙 번지자 꽃은 활짝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 헤나는 휘파람을 좋아했다. 꽃이 웃어주니까 휘파람을 몇 번 더 불었다. 
 
"동굴 탐험할 시간이야." 바닥이 미끄러우니까 헤나에게 손을 건넸다. 이렇게 엔젤라가 자비를 베풀 때마다 꽃은...
 
슬그머니 계략을 세우는 예쁘장한 소녀는 타인에게 함부로 굴었다. 툭하면 남을 골탕 먹인 데다 기고만장한 태도에 제 행동을 반성하지 않으니 언제나 미움을 샀다. 엔젤라가 누군가를 위해 행동한다거나 배려를 베푸는 일 따위 부재와 비슷하다. 
그랬던 소녀가 꽃을 소중히 가꿨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소녀가 제 천성을 무시할 만큼 우정은 강력했다. 헤나는 엔젤라의 하나뿐인 친구니까. 

친구가 걸음이 서투니까 엔젤라는 동굴에서 손을 꽉 잡았다. 둘은 천천히 발걸음을 뗐지만 습기진 바닥은 매정했다. 신발을 신은 소녀와 다르게 꽃은 맨발을 고집했다. 돌이 딱딱한데 아프진 않을까? 뾰족한 곳을 밟으면 어떡하지. 친구를 향한 걱정이 깊어질수록 덩달아 동굴 속 그림자도 어두워졌다. 통로가 비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아주 정신이 없다. 괴물에게 위장이 있다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하고 엔젤라는 킬킬 웃었다. 

"앞이 보이질 않네..." 이제 순서를 바꿀 때가 왔다. 꽃은 소녀가 베푼 다정함을 갚기 위해 엔젤라의 손목을 제게로 끌었다. 몸이 뒤로 당겨지니까 엔젤라는 헤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제부터 내가 앞장설게." 항상 엔젤라는 꽃이 원하는 바가 있을 때마다 가만히 지켜봤다. 이유를 묻지 않고 뭐든 하도록 내버려 뒀다. 엔젤라는 무책임한 걸까? 아니면 헤나를 깊이 신뢰하는 걸까? 무엇이든 꽃은 어둠 속에서도 앞이 잘 보여서 또박또박 걸어갔다. 툭 튀어나온 돌을 마주하면 잠시 쉬었다가 빙 돌아갔다. 아까보다 걷기 편해서 엔젤라는 붙잡은 손을 쳐다봤다.

종유석에서 물이 똑 떨어졌다. 작은 물방울이 한 데 고이니 하찮은 웅덩이가 되었다. 웅덩이는 얕아도 발바닥을 쩍 잡아당긴다. 둘은 물기로 주변을 장식하면서 고요하고 까만 동굴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철퍽거림 사이에서 헤나가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에 꽃은 걸음을 멈췄다. 엔젤라는 따라 걷다가 헤나의 등에 꿍 부딪쳤다. 왜 그러냐고 입을 열려던 순간 헤나가 엔젤라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마을에서 소녀가 했던 짓을 그대로 베꼈다.

암흑에 빠졌어도 촉각은 멀쩡했다. 봉긋한 입술에서 흉터로 갈라진 손끝이 느껴진다.
"쉿." 헤나가 침묵을 요구하자 엔젤라는 귀가 쫑긋 섰다. 작은 소음이 들렸다. 소녀는 지금까지 둘뿐인 줄 알았다. 구경할 거리라곤 결코 존재하지 않는 동굴에 누군가 있었다. 헤나가 조용히 발을 뗐다. 엔젤라도 꽃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동굴은 그림자가 정복했으니 위도 아래도 까맸다. 오른쪽과 왼쪽도 분간할 수 없도록 온갖 곳이 어두웠다. 이토록 깜깜한 동굴에서 엔젤라는 불빛을 봤다. 환한 벽이 노릇노릇했고 그림자가 들썩인다. 소녀는 헤나의 어깨에 꽉 매달렸다. 다급한 숨소리를 듣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한 손아귀에 옷이 구겨져도 헤나는 묵묵히 엔젤라를 뒤로 감추고 앞을 살폈다.

서늘한 동굴의 습기와는 다르게 달뜬 공기가 느껴진다. 헉헉거리는 지친 숨결이 들린다. 헤나가 앞을 가려서 엔젤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기자 엔젤라는 헤나를 비집고 나서려고 했다. 그때 꽃이 뒤로 확 돌더니 엔젤라의 귀를 막았다. 크게 입을 뻐끔거렸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자. 헤나가 뭐라 하든 엔젤라는 방해되는 땋은 머리를 잡아끌었다.
 
모닥불이 장작을 붉게 태웠고 그 옆에는 알몸으로 뒤엉킨 남녀가 보였다. 그들은 엔젤라가 빤히 바라보는 줄 모르고 헉헉거리느라 바빴다. 서로가 서로에게 뒤엉켜 틈조차 보이지 않았고 작게 생긴 틈 사이로는 땀이 자리를 차지했다. 차가운 이 공간에서 덥게 땀을 만들어냈으니 오죽 낯간지러웠을까. 엔젤라는 헤나가 숨기던 대답이 무엇인지 깨달아 입이 작게 벌어졌다. 소녀가 입을 다루지 못할 때 그들은 입술끼리 부딪혀 하나가 되었다. 침인지 땀인지 모를 체액이 사이로 끈적이게 흘렀다. 쪽 소리에 엔젤라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사춘기가 올 시기인 만큼 엔젤라는 거기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소녀가 넋이 나가자 꽃이 엔젤라의 어깨를 붙잡고 제게 돌렸다. 뾰로통한 얼굴이 가까워 엔젤라는 눈을 깜빡인다.
 
"나를 잊은 거야?" 엔젤라도 소녀라서 인간의 교합이 흥미로웠던 걸까?
꽃은 소녀가 자신을 망각하자 속이 까맣게 얼룩졌다. 동시에 간음을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까만 미소가 샜다. 눈치 빠른 사춘기 소녀는 간음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터. 마을에서 엔젤라를 놀리던 남자나 이곳에서 관계를 판치는 어른이나 하나같이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 소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고향이 됨됨이가 고약한 인물만 내세우니 꽃은 한숨이 나왔다.

"저게 간음이지? 그렇지?"
엔젤라가 흥분에 가득 차 헤나를 붙들고 흔들었다. 헤나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흔들림에 고개가 자꾸만 끄덕여졌다. 소녀가 한눈판 걸로도 모자라서 그들에게 관심을 주니 꽃은 남몰래 이 동굴을 무너뜨릴 음모를 꾸몄다. 꽁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엔젤라를 질질 끌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더 보고 싶다고 엔젤라가 버티면서 꿍얼거리지만 꽃은 깔끔히 무시했다.
 
추잡스러운 광경을 멀리하고 얇은 손목을 붙든 채 꽃은 입구를 찾아 움직였다. 헤나는 길을 잘 찾는다. 돌에 발자국이 남지 않아도 쉽게 길을 되짚는다. 왠지 모르게 가는 길은 멀어도 돌아오는 길은 가깝더라. 입구가 가까워지니 눈이 부셨다. 언제 비가 그쳤지? 엔젤라는 빛을 보자 긴장으로 굳었던 몸이 찌뿌둥했다. 팔을 하늘로 쭉 피고 기지개를 켰다. 달랑거리는 소매 끝자락을 멀뚱히 봤다. 왠지 모르게 짧아서 소녀는 제 피부가 훤히 드러난다고 느꼈다.
 
엔젤라는 쑥쑥 자랐다. 허름한 옷이 더 헐거워지고 바지 밑단은 짧아졌다. 제 성장에 키가 소녀는 이만큼이나 자랐다고 꽃한테 으스댔다. 떠들썩하게 굴다 수다를 딱 멈췄다. 바지가 짧아질 정도로 길쭉해졌는데 변함없이 헤나와 눈높이가 나란했다. 고즈넉한 괴물꽃이 이런 식으로 소름 끼치는 일화를 하나씩 던져줄 때마다 친구는 인간이 아니더라.
 
"지금까지 내 키 따라 했냐?" 소녀는 헤나를 쿡쿡 찌르면서 질문을 쏟아냈다.
"너랑 눈높이가 똑같으면 좋잖아." 꽃이 얼굴을 한가득 붉혔다. 
 
 


 
 
종종 헤나는 소나기를 맞곤 했다. 아무리 비가 세차게 내려도 꽃은 눈 감고 비를 느끼더라. 내리꽂는 비는 꽃한테 달지 몰라도 인간에게는 따가웠다. 동굴 안에서 엔젤라는 아프지도 않냐고 헤나에게 외쳤다. 꽃 대신 칙칙한 하늘이 우릉 울어댔다. 빗줄기가 더욱 세게 떨어진다. 헤나는 귀가 시끄러워도 소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땅으로 스며든 빗물을 맛보면서 헤나는 소녀를 고요하게 바라본다. 웅덩이를 철퍽철퍽 밟으면서 엔젤라에게 다가온다. 코앞까지 다가온 헤나는 온몸에서 비가 줄줄 떨어졌다. 소녀는 신비로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엔젤라는 창백한 볼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닿고 손바닥이 얼굴에 닿았다. 헤나는 따뜻한 손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사람을 좋아해 행동을 흉내 내는 바보 같은 꽃은 흠뻑 젖은 제 모습을 잊고 엔젤라의 흘러나온 머리카락을 귀로 넘겼다. 하얀 귀가 드러났다. 비가 오는 탓에 귀는 새빨갛다. 솔직한 신체의 반응에 헤나는 마냥 좋았다. 식물이 행복해지니 엔젤라는 맡지 못하는 향기가 짙어진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헤나는 손에 까만 꽃을 피워냈다. 귀여운 귓가에 살며시 줄기를 꽂아주었다. 찰랑거리는 고운 머리카락 위로 검은 꽃잎이 어울리기를 자처하니 참 예뻤다.

강물에 빠졌던 그때처럼 꽃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엔젤라에게 웃었다. 새까만 미소에 엔젤라는 영문을 모르겠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 어려운 괴물꽃은 소녀에게 포근한 곁을 주었다. 쑥스러움 대신 엔젤라는 뻔뻔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때, 잘 어울려?" 서로가 서로에게 뺨을 내어주었다. 짧은 소녀의 인생에 꽃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다. 엔젤라가 고개를 숙이니 기껏 넘겼던 머리카락이 다시 흘러내린다.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만 생명은 더욱 예쁘게 빛나더라. 엔젤라가 따뜻하니까 헤나는 볼에 닿은 엔젤라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멈추지 않고 제 욕심만큼 꽃은 한 발자국 앞으로 뗐다. 
 
"너만큼 예쁜 건 없어..." 또 한 발자국을 뗐다. 엔젤라의 숨결이 느껴진다. 기분 좋은 습기에 헤나는 눈을 가늘게 접지만 엔젤라가 조용하다. 부끄럽나? 아님 경솔하게 거리를 줄인 탓일까? 딱 한 걸음이면 되는데. 꽃은 소녀에게 혼이 날까 봐 주저했다. 용기 없는 꽃을 대신해 엔젤라는 헤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넌 춥지도 않니?" 헤나에게 묻은 물기가 엔젤라에게 닿아 눅눅하게 스며든다. 옷이 젖어가면서 짙어지는 색을 자랑했다. 꽃은 비가 달가웠을 뿐, 물에 빠진 제 꼴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다급히 손을 떼려고 했어도 엔젤라가 놓아주지 않았다. 연두색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파묻힌 듯 쳐다봤다. 깊은 눈빛에 숫기 빠진 헤나는 고개를 숙이고 싶었지만 멋대로 움직일 수 없다. 대답 없이 몸을 비틀거나 힘을 주어도 엔젤라는 요지부동이었다.

"같이 감기에 걸려볼래?" 
 
소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뜬다. 이 또한 멋진 추억으로 자리 잡을 거라며 키득키득 웃는다. 앙증맞은 미소에 헤나는 발바닥에서 뿌리가 났다. 뿌리는 돌을 파고들며 바닥에 덩굴을 마구 뽑아냈다. 이어서 까만 꽃이 산뜻하게 폈다. 깜짝 놀란 소녀는 이상한 풍경에 진저리를 쳤지만 곧 헤나를 놀렸다. 내가 그렇게 좋냐며 어깨를 찰싹 때리고 머리카락을 헝클어댔다. 소녀가 땅에 닿게끔 무릎을 꿇자 저절로 헤나와 멀어졌다. 별로 멀지도 않은데도 몸이 떨어져 버리니 꽃은 사뭇 외롭다. 소녀가 내뱉는 탄사만큼 밑바닥 꽃을 하나둘씩 모아 꽃다발로 만들었다. 꽃만 받아도 기뻐하던 엔젤라는 꽃다발을 받자 눈가가 붉어졌다. 드물게 날 것인 감정을 보여주는 소녀에게 헤나는 모든 걸 다 줘도 아깝지 않았다.

까만 꽃다발을 든 앳된 소녀는 정말 아름다웠으니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인간이 간음을 행하던 동굴은 둘의 아지트가 됐다. 엔젤라가 꽃으로 가득한 돌 위에 누워 손바닥으로 바닥을 팡팡 때린다. 소매 끝이 달랑거린다. 어느새 짧아진 옷은 보온이란 역할에서 벗어났다. 천이 엔젤라를 가려주지 못했다. 꽃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자 엔젤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뭐 해?" 꿍꿍이를 감추고 헤나는 엔젤라 옆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천천히 내려앉는 자세는 몇 번을 봐도 얌전하고 단정하다. 엔젤라는 옆으로 돌아 누우며 턱을 손으로 괴었다. 누구든 헤나가 의젓하게 자란 애송이라고 생각하겠지. 엔젤라는 귓가에서 꽃이 떨어진 줄 모르고 히죽거렸다. 헤나가 소녀를 가만 보더니 땅에 떨어진 꽃을 줍고 다시 엔젤라의 귀에 살포시 걸어줬다. 머리카락을 넘기는 과정에서 둘은 눈이 마주쳤다. 엔젤라는 커다란 눈으로 꽃을 빤히 보았고 헤나는 얼굴을 붉혔다.
"없어도 예쁘지만, 그래도 네가 내 꽃을 장식으로 쓴다면 더..." 꽃은 간지러운 말을 잘도 했다. 달아오른 꽃을 다시금 놀리기 위해 손을 올리지만 헤나의 뒤에서 다른 존재감을 발견했다.
 
곰이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곰이 이곳까지 기어들어온 것 같다. 장난치기 바쁜 엔젤라가 잠자코 제 뒤만 쳐다보니 헤나는 몸을 틀려고 했다. 그 순간 엔젤라가 주홍빛 땋은 머리를 잡아챘다. 친구를 누워있는 제 근처로 끌고 와 헤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 꽃은 또 한 번 커다랗게 꽃잎을 피울 뻔했다. 헤나는 마주한 엔젤라와 떨어지기 싫어서 바닥에 자라난 덩굴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 끝에 눈을 만들었다. 눈알이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묵직한 덩치가 보였다. 자세히 보려고 눈이 또록 굴러갔다.

갈색곰이 동굴 벽에 몸을 비벼대더라. 엔젤라가 온몸을 굳힌 이유가 있었군. 이곳을 제 영역으로 삼을 셈인가? 예상도 못한 커다란 짐승이었다. 역시 헤나는 세상이 쉽다. 원하던 기회가 제 발로 굴러왔다. 꽃은 엔젤라를 자상하게 껴안았다. 등을 토닥여주고 어깨도 어루만졌다.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올려 노란 머리카락을 살살 헤집었다. 부드러운 피부, 밝은 머리카락. 사모하는 당신은 헤나의 손 아래에 있다. 꽃은 제게는 없는 심장 고동소리를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설렘이 아닌 두려움 뿐인 울림에 헤나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엔젤라가 제 품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얼굴에서 빚어낸 온기가 사라지니 헤나는 소름 끼치게 괴물에 가까웠다. 바닥에 피어난 꽃밭이 점점 영토를 늘려간다. 주변에는 꽃이 가득하다. 평소라면 엔젤라가 거들먹거리고도 남았을 텐데.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자 헤나는 눈썹이 축 처졌다. 그래서 덩굴을 길게, 아주 길게 늘였다. 눈이 달린 덩굴은 곰을 발견하고 서서히 곰의 몸통을 타고 올라갔다. 제 목에 올가미가 걸린 줄도 모르고 짐승은 평화롭게 털이나 비벼대더라. 덩굴이 방심한 짐승의 목을 콱 조였다. 입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온다. 커다란 덩치가 돌 위로 쿵 쓰러졌다. 뭉툭한 몸뚱이에 크고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어도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 가련한 동물이었다.

둔탁한 울림에 엔젤라는 헤나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등을 꽉 붙잡았다. 
"괜찮아..." 헤나는 자상하게 품을 내어줬다. 그 안에서 모든 걸 잊고 안도를 찾으라는 듯이 소녀를 소중히 토닥였다. 근처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엔젤라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헤나를 멀뚱히 봤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헤나는 대답 대신 엔젤라가 일어나도록 도와줬다. 제 꽃잎이 엔젤라의 옷 군데군데 붙어있어서 사랑스럽다. 엔젤라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소녀는 기겁해서 그러지 말라고 버텼지만 헤나가 좀 더 힘이 셌다.

쓰러진 곰을 발견하고 엔젤라는 들떴다. 헤나에게 제가 곰을 잡은 사람처럼 떵떵거렸다. 
"이런 재주도 있었어?" 커다란 짐승을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며 소녀가 순수하게 굴어서 헤나는 기뻤다. 
"또 무엇을 할 수 있어?" 엔젤라가 손을 붙잡고 크게 흔드니까 꽃은 이지적인 판단력을 몽땅 잃었다.

얼간이처럼 구는 어설픈 꽃에게 엔젤라가 친절하게 대하자 마음을 열어버린 헤나는 들떴다. 소녀가 괴물꽃이라 불리는 제 정체를 알기에 소녀에게 더더욱 깊은 곳까지 알려주고 싶었다. 엔젤라의 손 안에서 흉내 낸 신체가 조금씩 녹아내린다. 역겨운 촉감에 엔젤라는 급히 손을 떼고 손바닥을 봤다. 핏물이 손에서 뚝뚝 흘렀다.
 
욕심쟁이 헤나는 꿀렁거리더니 흉측하게 커졌다. 괴물꽃이 진실된 형체를 소녀에게 보였다. 나뭇가지와 덩굴 그리고 핏줄을 세우며 움찔거리는 살점이 얽힌 거대한 그것의 형태는 인간이라면 형언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엔젤라는 치밀어오는 구역질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쏟았다. 더러운 입가를 추스르지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엔젤라는 누구보다 생에 집착하는 소녀였다. 공포에 사로잡혀 발작하기보다 이곳을 도망치는 선택을 골랐다.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일어나더니 뒷걸음쳐 달아났다. 엔젤라가 동굴 밖으로 뛰쳐나간 뒤에야 헤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헤나는 재주가 넘쳤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이 되기에는 모자란 점이 훨씬 많았다.  

혼자 남은 헤나는 어리석은 짓을 한 자신에게 못을 박고 싶었다. 징그러운 살점 덩어리는 구슬픔에 동조해 점점 작아지더니 그 자리에는 주황 머리의 소녀만이 앉아있었다. 꽃은 동굴을 무너뜨릴 계획조차 잊어버리고 몸을 밑으로 숙였다. 마치 꽃이 시드는 모습과 비슷했다. 헤나는 엔젤라와 매일 밤을 함께했어서 오늘따라 옆구리가 차갑다. 돌아오는 새벽마다 헤나는 잠든 엔젤라의 얼굴을 감상했는데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어두운 동굴은 시간을 짐작할 수도 없다. 고요 속에서 꽃이 썩어가던 참 줄곧 기다렸던 작은 발걸음이 들린다. 조금은 거만하고 성급한 그런 소리. 헤나는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바로 앞에서 엔젤라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새 동굴로 돌아온 엔젤라는 보았던 무시무시한 광경은 잊어버린 모양인지 아니면 겁도 없는지 어제의 일을 헤나에게 손가락질하며 따져댔다.
 
"그 모습 뭐였어?"
 
헤나는 매섭게 찔러오는 손가락 사이에서 소녀의 귓가에 걸린 까만 꽃을 발견했다. 본래의 모습을 봐도 여전히 내 꽃을 간직해 주는구나. 꽃은 감동으로 사르르 녹았다. 용기를 조금 되찾은 헤나는 무섭도록 화를 내는 엔젤라에게 서툴게 이야기를 내뱉었다. 
 
"당장 설명해!"
"난 그냥 보여주고 싶었어..."
"얼마나 놀란 줄 알아?!"
 
헤나도 엔젤라를 따라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왜, 왜 도망갔어? 내가 무서워? 싫었어?" 
엔젤라는 헤나를 주먹으로 때렸다.
 
"바보야. 나한테 준비할 시간을 줘야지?"
한 대로는 부족하다며 열심히 손을 휘두르는 엔젤라는 사랑스러웠다. 앞으로 그런 모습은 나한테 보여주지 마. 본질을 무시한 요구였어도 엔젤라가 바라는 것이니 헤나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한적한 강가를 어지럽히며 아낙네 여럿이서 빨래를 했다. 몽둥이로 젖은 옷자락을 때리며 물을 주변에 튀겼다. 거친 몽둥이질에도 수다를 떨 힘이 남아있는지 다들 시끄럽게 입을 연다. 저들끼리 투덜거리다 물가에 앉아있던 둘에게 하얀 도시를 언급했다. 헤나는 다들 중앙을 찬양할 때 홀로 뾰로통했다. 엔젤라는 점잖던 꽃이 예의를 상실한 모습에 그녀가 휘파람을 불면서 제게 기댄 꽃을 톺아봤다. 찌푸린 눈썹에 툭 튀어나온 입술. 볼이라도 잡아당길까 싶어 손을 올리려던 때 옆에서 말을 건다.

"엔젤라, 너처럼 예쁜 애는 하얀 도시에 가야 돼." 
"사람들이 너만 보면 세상의 끝 여자들은 다 예쁜 줄 알겠다." 
아낙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물이 멀리까지 튀었다. 헤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지만 엔젤라는 자그마한 물방울조차 거슬렸다.

"헛소리 하긴." 엔젤라가 차갑게 대꾸한다.

새침했던 소녀가 도도한 여성이 되었다. 소매가 짧아지다 못해 입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그녀는 새 옷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키가 자란 만큼 다리도 길쭉해져서 엔젤라는 훤칠하고 멋있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예쁘다는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지만 지금은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빼앗아 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그곳에는 웅장한 성당이 있어서 여자라면 다들 그곳에서 결혼식을 울리고 싶어 하지!"
"게다가 멋진 사람들도 가득하단다. 아, 건장한 사내 한 번만 만나봤으면..."

그때 헤나가 기댔던 얼굴을 뗐다. 벌떡 일어나더니 엔젤라를 두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네 친구 왜 저러니?" 주홍빛 뒷모습에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숲으로 향하는 등을 빤히 보다 엔젤라는 잔잔히 흐르는 물에 시선을 뒀다. 신발이 물에 닿아 수면을 얇게 갈랐다. 그녀는 물에 신발 앞코를 의미 없이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편안한 무게가 어깨에서 사라지니 엔젤라는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변화를 알아챈 아낙네들의 손길이 느려진다. 뻘뻘거리며 상황을 살 필 정도로 그녀는 유명하다.

엔젤라가 볼 안쪽을 곱씹는 모습을 한 아낙네가 봤다. 아낙네는 옆 사람을 팔꿈치로 마구 때리며 눈치를 줬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아낙네들은 바쁜 일이 있다며 하나둘 씩 자리를 떴다. 누군가는 오죽 급했는지 가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다들 현명했다. 엔젤라는 어릴 적 그대로 자랐으니까. 힘없던 부랑아 시절을 견디고 그녀가 어른이 되었다.

그녀가 물가에 앉아 삐딱하게 다리를 꼬았다. 어릴 적부터 왔던 장소임에도 그때와 지금은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돌도 물길도 작아 보이니 엔젤라는 제 볼을 그만 괴롭히기로 한다. 항상 붙어 다니던 친구가 제 옆에 없어 허전했지만 강가에서 깨끗한 물결을 보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부츠를 벗고 맨발을 물에 담갔다.

"헤나 녀석, 갈수록 요란하게..." 물결이 발가락을 스친다. 엔젤라가 차가운 간지러움을 즐기던 중 솜털이 날아오더니 씨앗이 물에 빠졌다. 못마땅한 듯 엔젤라가 혀를 찬다.
"민들레가 자리를 잘못 골랐어." 길가에 핀 꽃을 보자 엔젤라는 제게 순종만 비추는 꽃이 떠올랐다.

남녀노소 누구나 엔젤라에게 풍덩 빠졌다. 꽃은 그것을 싫어했다. 모두 제 보물에 눈길을 주니까 헤나는 조바심이 난다. 한 사람밖에 모르는 식물은 타인이 엔젤라에게 다가올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방금처럼 예의 없게 굴거나 대화를 끊거나. 아니면 관계를 간섭할 만큼 끔찍하게 그녀에게 향한 호의를 미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엔젤라는 꽃을 내버려 뒀다. 어차피 친구는 제게로 돌아온다. 확고한 자신감이 들자 그녀는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새 옷이라도 갖다 주면 좀 풀리려나?"
헤나가 질척 맞게 굴어도 영 상관없던 엔젤라는 꽃과 화해할 방안을 궁리한다. 발을 첨벙거리다 그늘이 져서 뒤를 돌아봤다. 모르는 남자였다. 낯선 얼굴이 무척 가까워서 엔젤라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기도 전에 그가 엔젤라의 얼굴에 천을 뒤집어 씌웠다. 두꺼운 팔로 얇은 목을 꽉 조였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엔젤라는 제 목을 감싼 팔을 사정없이 긁어보지만 끄덕 없었다. 엔젤라는 온몸이 축 늘어졌다. 힘이 빠진 육체가 무겁지도 않은지 괴한은 널브러진 부츠를 한 손으로 챙긴 채 엔젤라를 들쳐 엎고 자리를 떠났다.
 
 


 

희미한 정신을 깨우니 나무 창살 안이었다. 엔젤라는 목이 뻐근했고 마지막 기억을 상기하자 눈이 번쩍 떠졌다.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발버둥을 쳤다. 팔과 다리가 자유롭다니 그녀에게 행운이 함께했다. 가냘픈 여성한테 괴한이 밧줄까진 사용하지 않았더라.

"하, 빌어먹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엔젤라는 어설프게 못 박음질 되어있는 나무 감옥을 마구잡이로 발로 찼다. 나약한 창살은 삐꺽거리다 끝내 부서졌다. 틈이 생기자마자 엔젤라는 뛰쳐나갔다. 발길질하다 망가진 부츠는 덜렁거리니 방해만 된다. 거칠게 신발을 집어던지고 엔젤라는 맨발로 숲으로 뛴다.
 
"거, 거기서!"
 
소란스러움에 상황을 살피러 온 남자가 저 멀리 도망치는 엔젤라를 발견한다. 괴한이 우악스럽게 그녀를 뒤쫓는다. 깔끔하지 못한 숲길은 엔젤라를 아프게 했다. 가시가 발바닥을 꿰뚫었다.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는다. 꽉 깨문 나머지 입술에서 피가 송글 맺힌다. 엔젤라는 헤나만 생각하고 통증을 견뎠다. 유년기 때부터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그곳이 보인다. 익숙한 공동묘지가 바로 앞이다. 그녀는 안도했다. 깊게 숨을 내뱉으려던 참 뒤에서 거친 손길로 머리채를 붙잡았다.
 
아, 엔젤라의 비명이 깊은 숲으로 울려 퍼진다.
 
"아악! 이거 놔!" 송곳으로 찔린 듯 날카로운 비명에 숲이 긴장한다.
 
어느새 남자는 엔젤라의 위로 올라타 손에 칼을 쥐고서 침 튀기며 협박한다. 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을 게걸스럽게 핥고 싶었다고. 당신의 피부를 제 징그러운 혀로 친히 맛보아 주겠다고. 엔젤라는 끔찍한 악의와 직면하자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헤나!" 참을성이 좋지 못한 남자가 엔젤라의 뺨을 울퉁불퉁한 주먹으로 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엔젤라는 정신을 놔버렸다. 이제야 고요해진 상황이 만족스러운 남자는 바지 허리띠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뒤집어진 시야에 남자가 눈을 얼떨떨하게 깜빡인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왜 눈은 어두운 숲 속을 바라볼까. 남자는 고개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스륵스륵. 고개 뒤에서 무언가 기어 오더라. 뱀일까? 흙을 파고드는 꿈틀거림에 무서운 상상이 커져만 간다. 괴물인가? 길고 묵직하고 커다란 알 수 없는 게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음산한 존재감에 무뢰배는 이를 달달 떨어댔다. 고개가 붕 떴다. 깜짝 놀라 혀를 씹었다. 그가 아래를 살폈다. 밑에는 땅뿐이었다. 그는 손 위에 올라탄 상태였다. 손에 흉터가 까끌까끌했다.
"으악!" 잘린 목은 방금까지 제가 괴롭히던 이와 똑같은 비명을 질렀다. 누구지? 처음 보는 여자의 얼굴이 거꾸로 보인다. 상황을 파악 못한 채 잘린 목은 빼낼 수 있는 모든 체액을 밖으로 쏟아내는 중이었다. 추잡하고 더러운 모습이었지만 헤나는 잘린 목에게 단정하게 웃었다.

"깜짝 놀랐나요?"
드물게 헤나가 입을 쩍 벌렸다. 까만 입안이 보이자 남자는 눈이 훽 돌아가버렸다. 잘린 목의 입에서 거품이 보글거렸다. 안타깝게도 꽃은 말이 끝나지 않았다. 헤나는 잘린 목의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손바닥을 위로 올린다. 살이 맞닿는 소리가 매섭게 공기를 때렸다.
 
"정신 차리세요." 잠을 허락받지 못한 잘린 목은 칠칠치 못하게 눈물을 쏟더라. 터진 입술로 헤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의 하나뿐인 친구죠." 인사를 하면서 손을 놓았다. 잘린 목이 툭 떨어졌다. 신음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게 얼굴 쪽이 땅을 향했다. 헤나는 맨발로 볼품없는 머리를 잘근잘근 밟았다. 잘린 목은 발길질에 맞춰서 입에 가득 흙을 처박았다. 잔뜩 흙을 먹었어도 허기가 졌는지 눈에도 흙이 들어갔다.
 
잘린 목이 움찔거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그가 먼저 침묵을 지켰으니 엔젤라의 친절한 괴물 헤나가 남자에게 정답을 알려줄 차례였다. 땅에 처박힌 남자의 고개를 덩굴로 슬쩍했다. 혀가 삐져나와 못생긴 얼굴에 헤나는 시선을 맞추었다.
 
"제 모습 어때요? 그녀가 이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했거든요."
 
헤나의 말이 끝나자 잘린 목은 으깨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터진 머리에서 뇌수와 뇌가 바깥으로 흩뿌려졌다. 징그럽고 역겨워서 헤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뇌를 짓밟았다. 머리는 쉽게 짓이겨졌다. 꽃은 잔혹한 짓을 충분히 했음에도 아직 화풀이가 끝나지 않았다. 목 없이 남아있는 몸뚱이가 엔젤라를 가리고 있는 꼴도 헤나는 보기 싫었다. 덩굴로 붙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불결한 놈 주제에 감히 엔젤라에게 닿고 엔젤라를 위협하고 더럽혔다. 참을 수 없어서 두꺼워진 뿌리로 저항 없는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주변을 파괴로 가꾼 뒤에야 헤나는 정신을 차렸다. 쓰러진 엔젤라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녀에게 피가 잔뜩 튀었다. 어서 닦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인간의 손이 아닌 뒤죽박죽으로 섞인 정체불명의 살점이었다. 제대로 된 형체 없이 핏줄을 꿀렁거리는 제 일부에 헤나는 냉정을 되찾았다. 헤나는 꽃의 일부를 조금씩 움직이다가 징그러운 뿌리를 가만히 봤다.
 
"으음..." 엔젤라가 뺨이 아픈지 작게 신음을 내뱉는다. 덕분에 꽃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엔젤라가 깜짝 놀라기라도 할까 봐 소리 없이 인간의 형태로 자신을 꾸몄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엔젤라는 반짝거리고 빛이 났다. 말을 멈추지 않던 엔젤라가 침묵을 일관하자 낯설었어도 그녀에게 푹 빠진 헤나는 뭐든 좋았다. 꽃은 그녀의 옆에 따라 누웠다. 부어오른 엔젤라의 뺨을 살살 쓸면서 속상함에 사로잡히기도 하며 멀쩡한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헤나는 아침이 찾아오는 줄 모르고 엔젤라만 바라봤다. 정신이 번뜩 드는 느낌이 영 불쾌해 엔젤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골을 짚던 엔젤라는 눈앞에 헤나가 보이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알몸으로 누워있는 헤나와 어젯밤 쫓기던 자신을 떠올리며 대충 예상이 갔다. 기특한 짓을 했다고 칭찬이라도 해줄까 싶었지만 엔젤라는 잠든 사이 부어오른 얼굴이 너무 아팠다.
 
"웬 알몸이야?" 눈을 뜨자마자 투덜거리는 엔젤라에게 헤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지어냈다. 뚝뚝 홍수 같은 눈물이 나왔다. 제 속도 모르는 엔젤라에게 넝마처럼 찢긴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가 저만의 보물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석처럼 빛나자 헤나는 두렵다. 탐욕스러운 세상은 지속적으로 엔젤라를 원할테니 앞으로도 쭉 헤나에게 시련을 줄 예정이겠지. 펑펑 울어도 까만 입안이 보이지 않도록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무치게 눈부신 그녀를 제 속에 가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룩주룩 우는 헤나를 발견하자 엔젤라는 피식 웃는다.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네가 우냐?"
"네 뺨이. 아, 내가 빨리 왔더라면."
"내 얼굴에 오점이 남긴 했지."
 
고맙다고 토로하지 않는 엔젤라는 주변에 으깨진 살점과 튄 핏자국을 눈치챘다. 까만 꽃잎으로 하여금 애써 잔인하게 피어나는 생각을 지웠다. 머릿속 환기가 뜻대로 안 되자 아무 말이나 꺼냈다.
 
"네 꽃은 검은색인데 왜 머리카락은 붉지?"
"어릴 적 덮던 네 담요가 매번 주홍빛이길래..."
"혼잣말이었어."

엔젤라는 예고 없이 일어나더니 휙 돌아섰다. 바람이 살짝 불었고 엔젤라의 연한 머리카락이 노랗게 찰랑거린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새빨개진 귀가 존재감을 비추자 간질거리는 기쁨에 헤나는 눈물을 접는다. 솔직하지 못한 그녀가 보여주는 귀여운 행태에 꽃은 녹을 듯 행복하다. 헤나는 그녀를 위해선 늘 다른 모습이 될 수 있고 무엇이든 줄 거야. 오늘도 헤나는 엔젤라를 위해서 꽃을 활짝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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