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창작

괴물꽃: 4. 사랑

by 넴 박 2024. 7. 28.

꽃이 걸음에 익숙해지면서 덩달아 엔젤라에게 묻었던 끔찍한 피멍은 옅어졌다. 상처가 낫는 과정을 같이 본 주제에 헤나는 손을 잡기 전마다 꼬박꼬박 소녀에게 물어봤다.

"손 잡아도 돼?" 엔젤라는 손을 툭 내민다.
"안 아파?" 헤나는 엔젤라의 손목을 살피다가 조심스레 손에 깍지를 꼈다. 손을 꽉 잡아도 불평 없이 도와줬다. 엔젤라와 손을 마주 잡고 헤나가 천천히 발을 땅에서 뗀다. 꽃은 엄지손가락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미약한 압박감에 엔젤라가 눈을 깜빡거린다. 언제 손길이 이렇게 능숙해졌지? 
고지식한 헤나는 한 가지 규칙을 사수했다. 꽃은 모든 손가락을 똑같이 접거나 폈다. 손가락 마디마디도 같은 힘으로 움직였는데 그중 하나만 다르게 쓰다니. 무궁무진한 성장속도에 엔젤라는 헤나에게 내심 놀랐다.

괴물꽃이 갈수록 인간과 가까워진다. 후들거리는 다리도 점점 연약함을 잃어간다. 허벅지에서 억지로 뿌리를 뜯어낸 자국은 위와 달리 옅어졌다. 역시 상체를 가릴 천이 필요해. 엔젤라는 친구와 함께 어디부터 놀러 갈지 고민했다. 기다리던 날이 다가와서 소녀는 미소 지었다. 손이 번거로워도 준비는 설렌다. 엔젤라가 밝게 시시덕거리니 헤나는 따라 웃었다. 까만 입이 벌어졌다. 엔젤라는 다급히 손가락을 헤나의 입에 올렸다. 명심해.

"마을에서 입을 크게 벌리지 마."

시체밖에 없던 꽃한테 친구가 생기자 헤나는 활짝 피었다. 다리까지 자라났으니 엔젤라의 손을 잡고 서툴게 따라다녔다. 마을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넓고 평화로웠다. 군데군데 피어난 민들레가 거리를 장식하니 하얗게 튄다. 지금까지 엔젤라가 전해주던 이야기를 상기하며 주변을 구경했다.
고소한 냄새에 고개가 따뜻한 기운을 풍기는 건물로 돌아간다. 저곳이 엔젤라에게 물을 뿌렸다던 빵집인가 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꽃은 작은 성당도 발견했다. 성당은 모두를 위해 봉사하면서 어째서 수프에...

원망을 품고 방향을 가진 미움이 커져갔다. 왜 다들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장소인지 꽃은 알아봐야만 했다.


 
"여기가 가장 볼만한 곳이야." 식수가 샘솟는 우물이었다. 바가지는 방금까지 사용되어 축축하게 물이 묻었고 회색 벽돌에 이끼가 껴 신비롭고 오래된 느낌이 든다. 엔젤라도 이곳에서 물을 마실까?

"우물에 올 때마다 그냥 네가 생각났어." 돌에 덩굴이 들러붙어 있어서 네가 생각났다는 말에 헤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꽃은 늘 소녀만 생각하는데 감미롭게도 소녀가 꽃을 떠올려 준대. 헤나는 잘 가꿔진 꽃처럼 예쁘게 태양을 바라봤다. 꽃이 곱게 눈을 접으니까 엔젤라는 심장이 간지럽다.

"목마르지?" 소녀가 능숙하게 도르래를 내린다. 꽃이 땅에서 뿌리를 뗐으니 목이 탈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다. 헤나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엔젤라가 챙겨주니 좋았다. 꽃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끙끙거리며 밧줄을 힘차게 당기는 엔젤라가 귀엽다. 마을에 왔을 뿐인데 엔젤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햇빛을 반사하는 잎사귀처럼 헤나의 눈은 반짝거린다.

엔젤라가 들어 올린 바가지에서 손으로 물을 작게 떴다. 그리고 헤나에게 손을 건넨다. 물이 손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한 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헤나는 다소곳하게 손등을 흉터투성이 손으로 받친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물이 고인 손바닥에 입을 댔다. 꼴깍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물은 헤나의 목을 타고 내려간다. 엔젤라가 줬다는 이유만으로 물이 달콤하게 느껴진다. 특별한 물은 아니지만 헤나는 이 물이 성수 같다.
"고마워." 고인 물을 남김없이 다 마신 헤나는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 물방울이 송글거렸다.
"칠칠맞긴." 엔젤라가 낡은 옷으로 입가를 닦아줬다. 헤나는 까만 꽃을 가졌지만 빨간 꽃잎을 자랑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헤나는 얼굴을 붉혔다. 가뭄을 모르는 식물이 싱그럽게 생기를 선보였다.

"뭐 필요한 건 없니?" 우물 앞에서 떠들던 중 누군가가 말을 건다. 느린 걸음으로 마을을 처음 찾아온 헤나는 행색이 거지와 마찬가지였지만 다들 친절했다. 다만 헤나는 친절을 돌려주긴 어려웠다. 마을 주민은 엔젤라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린다.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여인이 오지랖을 부린다.
"네가 착한 아이라면 엔젤라와 어울리지 말아라. 나쁜 버릇 옮는다." 훌륭한 조언을 내뱉는 사람처럼 으스댄다. 꽃은 엔젤라에게 향한 저 거만한 손짓을 당장이라도 부러뜨리고 싶었다. 두꺼워도 쉽게 뒤로 접힐 거란 생각을 하면서 헤나는 묵묵히 여자를 바라봤다.
"뭘 쳐다봐?" 시선이 어디서 비롯된 지 모르고 여인은 엔젤라에게 시비를 걸었다. 미동 없던 꽃은 눈에서 반짝임을 지웠다. 감정에 요동치는 헤나와 달리 엔젤라는 면전에서 모욕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소음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니까 소녀는 지겨웠다.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헤나의 손을 슬쩍 붙잡고 자리를 피했다. 뒤에서 버릇없다는 소리에 등이 따가웠다.

"저 사람 무례해." 헤나는 마을 주민을 차갑게 평가했다.
"뭐, 익숙해." 엔젤라가 태연하게 구니까 꽃은 더 속상하다.

마을 주민은 모두 소녀에게 똑같은 행동을 보였다. 태어나서 지금껏 토박이로 살아온 엔젤라보다 낯선 이방인 헤나에게 부드럽게 대했다. 둘은 꼴이 비슷해도 받는 대우가 무척 달랐다. 엔젤라가 욕설을 뱉고 어른과 싸울 때 포근한 향기에 취한 사람들은 헤나에게 우유와 열매, 꽃과 먹을 것. 그리고 편지 같은 소중한 감정이 실린 물건마저 선물로 줬다. 언덕 위에서 둘은 선물을 구경했다. 괜찮은 물건도 있어서 입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옆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헤나는 웃음이 풋 새어 나왔다.

"이중에 뭐가 좋아?" 헤나는 받은 물건을 전부 엔젤라에게 줬다. 전혀 아깝지 않다는 듯 바구니를 건네고 수줍게 웃는다. 소녀는 바구니 안에 든 음식을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빵을 집었다. 딱딱한 테두리를 뜯어 입안에 넣었다. 맛은 평범하지만 허기를 달래주니 엔젤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꽃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주변에 고양이가 잔뜩 모였다. 동물은 울음소리를 짧게 내거나 헤나에게 얼굴을 비볐다. 헤나는 고양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엔젤라만 봤다. 멀리서 짖는 소리가 들린다. 개는 묶여있어서 이곳에 오지 못했을 뿐 헤나를 열렬히 원하고 이곳에 와달라고 시끄럽게 짖고 있을 테지. 어떤 동물이든 헤나만 보면 졸졸졸 따라왔으니까.

고양이가 귀엽게 애교를 부려도 꽃은 한결같이 무심했다. 고양이한테 사람도 못 알아본다며 얕은 동정을 보냈다. 헤나가 냐옹소리를 듣고도 안 들린 척 소녀만 보니까 엔젤라도 꽃을 따라 했다. 헤나의 올곧은 시선을 무시하고 엔젤라는 이어서 빵을 뜯었다.

초록 잔디 사이로 계속 눈길에 갔다. 엔젤라는 빵을 먹다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 보니 까만 점이 자꾸만 보였다. 녹빛에서 짙은 색이 돋보인다. 점점 까만색이 많아지는 착각에 소녀는 휘파람을 불었다. 누구든 빵가루를 흘려서 개미가 모인다고 생각할 거야. 이런 광경은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다. 저절로 눈길이 간다. 언제 개미까지 꼬였을까. 뻔하게도 개미는 금방 무리를 지었다. 헤나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개미가 근처를 빙 에워싼다. 개미떼는 헤나의 하얀 옷에 닿고 싶겠지.

개미를 보니까 엔젤라는 헤나에게 걸음을 알려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흙이 눌러 남겨진 발자국은 검었다. 꽃이 만들어낸 발자국마다 개미가 쏙 들어와 자리를 채우더라. 벌레가 발자국 안에서 까맣게 득실거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면 무엇을 발견한들 대수롭지 않을 거야.
꽃이 걸음에 정신을 팔렸을 때 엔젤라는 손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좋은 냄새라도 나는지 궁금했다. 몰래 발자국을 살펴봤다. 흔적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해서 시큰둥했다. 소녀가 혀를 차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개미가 손등을 타고 올라왔었지.

회상이 깊어지자 엔젤라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지금도 손에 개미가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소녀는 애꿎은 손을 탈탈 털었다. 잠깐 한눈판 사이 벌레가 더 꼬였다. 주변에 개미가 득실거리자 엔젤라가 냅다 그곳에 먹던 빵을 던졌다. 화풀이를 해도 상상력은 힘을 잃지 않고 더욱 강해졌다. 온몸이 가렵고 속은 울렁거린다. 소녀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하는 동안 꽃은 걱정 어린 손길로 소녀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린다.
 
 



 
둘이서 팔짱 끼고 엔젤라는 강가로 꽃을 안내했다. 흙으로 덤터기 쓴 꼬질꼬질한 헤나를 물에 담가버릴 작정이었다. 제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소녀는 발이 느린 식물을 무시하고 서둘렀다. 시냇물이 빛을 받아 예쁘게 생명력을 띤다. 물살에 닳아버린 동그란 자갈을 헤나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다리가 비틀거렸지만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물살이 종아리에 부딪혀 긁어 부스럼을 하얗게 만들어냈다.
 
"예쁘다." 자갈 하나를 집더니 꽃 주제에 돌을 감탄한다.
 
엔젤라는 헤나가 돌에 홀린 동안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다. 회색빛, 갈색빛 오색찬란한 자갈은 그럴싸하게 보였다. 소녀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이해했어도 참을성이 좋지 못했다. 헤나에게 물을 발로 찼다.
 
"헤나, 물 좋아하지?" 그곳에서 물을 뿌리며 둘은 사이좋게 놀았다. 꽃은 엔젤라가 추울까 봐 물 뿌리기를 주저했다. 꽃이 망설이자 엔젤라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재빨리 소녀는 헤나의 땋은 머리를 잡고 냇물에 담가버렸다. 얕은 물에 풍덩 소리가 크게 났다. 엔젤라는 낄낄거리다가 이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헤나가 얼굴을 물에 처박은 채 올라오지 않았으니까. 급하게 수면에서 꽃을 끄집어 올렸다.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을 무시한 채 헤나는 눈을 말똥히 깜빡거렸다. 엔젤라는 매번 괴물꽃 때문에 심장이 남아돌지 않았다. 속 좁게 마음이 부글부글 끓지만 헤나와 같이 놀 때마다 소녀는 즐겁고 재밌다.

꽃은 엔젤라가 막 다뤄도 좋았다. 물을 배 터지게 먹어도 괜찮았다. 이대로 금방 스쳐 지나갈 찰나가 변함없이 영원하길 바랐다. 어떤 동물도 헤나에게 덤비지 못하고 벌레는 허락 없이 꽃에 닿지도 못했다. 마을 주민은 헤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꽃이 곁을 허락한 상대는 엔젤라밖에 없다. 헤나를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오직 엔젤라 단 한 명이었다. 
 
 



 
성당에서 배식을 기다렸다. 차례가 금방 다가와서 엔젤라는 헤나를 두고 휙 가버렸다.
"바로 올 테니까 기다려." 말을 잘 듣는 식물답게 헤나는 얌전히 서 있었다. 헤나는 태어나길 꽃으로 태어났다. 꽃은 벌써부터 엔젤라가 그리워 박힌 자리에서 예쁘게 폈다. 순리대로 꽃에서 달콤한 향기가 났다. 저절로 고개가 돌려질 관심이 모였다. 한두 명씩 다가와 헤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물가에서 조우했던 여인도 보인다. 또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리려는 걸까. 첫인상을 냉정히 판단했던 헤나는 여인에게 관심이라곤 없다. 꽃이 차분하고 속 깊게 굴자 어른 눈에 썩 괜찮은 아이처럼 보였다. 반대로 사사건건 말대꾸에 끼니를 축내는 버릇없는 엔젤라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마을 주민들은 헤나를 살살 회유했다.
 
"엔젤라와 어울리면 너까지 저주받을지도 몰라." 꽃은 더러운 입에서 뿜어내는 나쁜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꿀꺽 삼키고 싶었다. 저주라니 왜 그런 말을 할까? 꽃은 호기심이 커졌다. 왜냐하면 엔젤라는 수다스럽게 굴어도 항상 이야기에서 자신을 쏙 뺐다. 아는 게 없단 좌절감에 헤나는 어깨가 축 처졌다.
"왜요?" 파란 눈은 엔젤라가 없으니 텅 비었지만 헤나는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헤나는 엔젤라를 알아갈 수조차 없으니까. 꽃이 건넨 관심 하나가 여러 대답으로 돌아왔다. 인간에게 몰상식은 차고 넘쳤다. 쓸데없이 혓바닥이 긴 마을 주민 덕분에 많은 정보를 귀에 담았다.

"건방진 그 계집애는 마법마저 등을 돌렸다."
"부모도 죽고 쓸모없는 것."

마법이 소녀를 외면했다. 제 눈에 부족한 것 없이 완벽하게만 보이던 엔젤라는 마법 재능이라곤 한 줌도 없다. 소녀가 촌스러운 마을에서 핍박받는 이유를 찾았다. 소녀가 아무리 예쁘다 한들 어린아이는 쓸모가 적다.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면 엔젤라는 작은 일이라도 부여받았을 텐데. 엔젤라의 닳고 해진 옷을 떠올리자 헤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추도문에서 보았던 마법찬사가 생각났다. 마법사가 최고 권력자인 이 세상에서 엔젤라는 마법 없이 태어났다. 마법이 평범한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연명할 가치도 없는 삶이라 평가할지도 모른다. 어떡해 너무 좋아. 모두가 엔젤라를 원하지 않기를. 까만 미소가 새어 나올까 봐 꽃은 집중을 놓을 수 없다. 엔젤라에게 박힌 낙인은 사실 헤나에게 달콤한 축복이었다. 가혹하게도 소녀는 마법을 인지할 회로조차 없다. 헤나는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사모하는 당신은 꽃이 내뿜는 능력에 잠식되지 않는다. 영원히 당신과 함께할지도 몰라. 헤나는 몸이 부르르 떨려올 정도로 기뻤지만.
세상은 순순히 협조하지 않았다. 열락이 짙어질수록 두려웠다. 위험하고도 대단한 꽃향기가 소녀에게 전혀 통하지 않을 테니 헤나는 무서웠다. 엔젤라는 언제든지 헤나를 두고 떠날 수 있다. 헤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사실을 가정하면서 공포로 제 꽃잎을 더욱 까맣게 태웠다. 이것을 엔젤라가 영원히 모르면 좋겠지만 분명 똑똑한 소녀는.
 
"이미 알고 있겠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헤나가 공허한 눈을 파랗게 접었다.
 
"그 애는 신경 쓰지 말아라." 마을 주민 하나가 헤나의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악의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헤나는 불쾌하다. 어쭙잖게 조율하려고 드는 마을 주민이 성가셨다. 틀림없이 질투일 거야. 소녀가 탐나니까 우리를 갈라두려고 이간질을 하는 거야. 참으로 궁금했다. 어째서 꽃이 엔젤라가 아닌 것을 택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는 의문이 깊어지자 맨발에서 뿌리가 자라났다. 

"아, 달콤한 냄새......" 출처 모를 자만심에 헤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마을은 헤나의 하나뿐인 보물을 멸시하고 상처 준다. 운이 좋게 헤나는 재주가 많고 세상이 쉽다. 꽃은 제멋대로 향을 사방에 퍼뜨렸다. 좋아하는 엔젤라에게 향을 묻히고 구슬픈 향기로 사람을 강제로 모독했다.
 
향기로 모두를 매료시키는 위험한 괴물꽃. 생명력이 가장 옅은 끝으로 추방된 괴물꽃이 주변에 흩뿌리는 서글픈 향기에는 마법이 담겼다. 오랫동안 맡으면 까마득하게 홀려 비로소 정신이 망가진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처럼 한 번 이 향기에 사로잡힌다면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래, 엔젤라뿐이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어도 가까이에 붙어있어도 헤나가 닿고 만져도 유일하게 엔젤라만 멀쩡했다.

"모여서 뭐 해?" 채소가 듬성듬성 썰린 수프를 들고 엔젤라가 돌아왔다. 매스꺼운 사람 사이에서 소녀가 보이자 헤나는 화사해졌다. 꽃이 대답을 돌려주기도 전에 우물가의 여인이 끼어든다.
 
"엔젤라, 이것도 같이 먹으렴." 엔젤라는 여인이 건넨 감자 두 알을 받았다.
"그것만으로 부족하지. 이 우유도 마시거라." 사내가 빵빵한 위 주머니를 엔젤라에게 줬다.
 
갑작스러운 공세에 엔젤라는 크게 당황했다. 헤나는 몰래 우쭐했다. 새침하고 당당한 엔젤라에게 헤나의 향기가 합쳐지니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뻔뻔스럽게 소녀한테 푹 빠졌다. 예쁜 소녀에게 모든 걸 갖다 바치고 싶었다. 변한 분위기에 식물은 만족했지만 분수를 모르고 달려드는 어리석은 자도 나타났다. 정줄을 놓고 소녀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헤나는 씨앗을 슬쩍 뿌렸다. 엔젤라가 고맙다는 말을 헤매는 동안 작은 씨앗이 뼈를 뚫고 뇌에 뿌리를 내린다. 머리카락 틈에서 새싹이 삐죽 존재를 내세운다. 짐승만도 못한 작자들은 죄다 헤나의 양식으로 처지가 전락했다. 헤나가 내린 명령대로 곧 움직이는 시체가 되어 스스로 묘지까지 걸어가겠지. 감히 넘보아선 안 될 헤나의 보물을 탐냈으니까. 

끝까지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 엔젤라는 헤나의 손을 붙잡고 그곳을 후다닥 벗어났다. 수프가 든 그릇은 소녀에게서 내던져졌다. 그릇이 떨어지더니 그 안에서 돌이 나왔다. 헤나는 돌을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지만 헤나는 엔젤라가 쑥스러워한다고 느꼈다. 빨개진 목이 노란 머리카락 아래로 옅게 보였다. 헤나는 엔젤라가 소녀처럼 굴 때마다 귀여워서 속이 울린다. 한편 신기했다. 뿌리가 이렇게나 쉽게 뽑히나? 
 
"아, 숨 막혀..." 성당에서 개울까지 둘은 뛰어왔다. 지친 엔젤라가 헤나의 어깨에 풀썩 기댔다. 그대로 숨을 헉헉거렸고 헤나는 엔젤라에게 손으로 부채질해 줬다. 잠자코 식물이 만들어주는 바람을 쐬었다. 시원함을 느끼고 호흡을 가다듬어도 소녀는 달뜬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믿기질 않네. 마을이 곧 망하려고 그런가?" 냉랭한 세상이 친절하게 바뀌니 엔젤라는 낯설었지만 무시했다. 그냥 좋으니까. 엔젤라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짧은 인생에 받아본 적 없는 호의는 소녀에게 녹을 듯한 첫 경험이라 외면은 불가능하다. 상상도 못 해본 환상스러운 대우에 엔젤라는 둥둥 떠다녔다. 받았던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뒤로 내팽개쳤다.
 
엔젤라는 헤나의 손을 질질 끌고 물가에 앉았다. 엉덩이가 젖어도 상관없었다. 그곳에서 헤나와 사이좋게 앉아 마을 사람 전부 정신이 나갔다고 엔젤라가 신나게 떠든다. 맨발이 물을 때리자 첨벙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지가 젖어가는 줄도 모르고 시끄럽게 굴었다. 쉴 새 없이 말을 내뱉다 지친 엔젤라는 헤나의 어깨에 기댔다. 하얀 볼에 흉터투성이 어깨가 닿는다. 툭 튀어나온 흔적에 괜히 속상했다. 안쓰러워서 더욱 들러붙었다. 앙증맞은 발끼리 물속에서 가지런히 닿자 생소했다. 키득거리는 웃음이 가까이 들리니까 식물은 심장이 없어도 속이 간질거렸다.
 
"다들 왜 나한테 친한 척 하지? 혹시 무슨 짓 했니?"

소녀가 기다리던 행복과 비슷했을까? 헤나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사모하는 당신만 맡지 못하는 향기 속에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다. 엔젤라는 대답 없이 웃는 헤나가 답답해서 보챘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호의가 참을 수 없도록 궁금했으니까. 헤나는 눈을 곱게 접고 자신의 까만 꽃 하나를 따서 줬다.
 
"네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거야."
결함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말도 안 되는 이 감정은 사랑이라고 불렸다.
 
 

' > 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물꽃: 6. 괴물꽃 전설  (0) 2024.07.28
괴물꽃: 5. 성장  (0) 2024.07.28
괴물꽃: 3. 친구  (0) 2024.07.28
괴물꽃: 2. 엔젤라  (0) 2024.07.28
괴물꽃: 1. 무덤에서 피어난 꽃  (0) 2024.07.2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