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시골에 날 가둘 순 없지."
언덕에 올라 뒤를 보니 촌스러운 마을이 보인다. 엔젤라는 팔짱을 끼더니 마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바람이 나부끼자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을 찔러 눈을 가늘게 떴다. 찌푸려진 시야 끝에 마을이 보였다. 정 따위 없는 그곳에서 그녀는 지독한 학대를 겪었다. 꽃이 뒤늦게 갈등을 해소시켜 주었단들 어릴 때 받은 상처는 평생 간다. 헤나가 그녀를 위해 열심히 마을을 꽃꽃이하고 해충을 솎아냈어도 어쩔 수 없이 화분을 바꿀 때는 온다. 뭐, 어딜 가든 엔젤라는 친구가 있으니 든든하다.
"이리 와." 엔젤라는 히죽 웃고 헤나에게 손을 건넨다.
노란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휘날린다. 찰랑거리고 반짝거려서 헤나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빨리 손을 잡으라는 둥 엔젤라가 손바닥을 쫙 피니까 어릴 적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변치 않는 모습에 꽃은 하얀 손을 맞잡는다. 언제 잡아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헤나는 평생 놓고 싶지 않았다.
엔젤라가 마을 밖으로 향하자 서쪽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뚜벅뚜벅 둘은 오래된 길을 걸었다. 몸에 베인 습관대로 서로가 손을 마주 잡았다. 오붓한 행색에 낯간지럽다고 타인이 수군거렸지만 둘은 되려 팔짱을 꼈다. 길목에 노란 민들레가 펴서 눈길이 갔다.
"하얀 민들레가 고향에 많았지." 엔젤라는 제 머리와 비슷한 꽃에는 흥미가 없는지 시큰둥했지만, 헤나는 민들레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노란 꽃을 구경하다 튀어나온 돌부리를 발견해 엔젤라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줬다. 그녀가 밑을 보더니 헤나의 팔을 당겼다.
"너나 조심하셔. 맨발주제에." 얄궂은 얼굴이 가까워서 헤나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떠들다가 정든 숲이 사라지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멀리서 불빛이 둥둥 떠다닌다. 꽃이 엔젤라를 지켜주지만 위협을 자처할 필요는 없으니 둘은 마을로 발걸음을 얼른 옮겼다.
깜깜한 밤이었음에도 마을은 시끌벅적했다. 이곳은 야시장이 활성화된 곳인지 늦게까지 상품을 늘어놓고 떠들기 바빴다. 곳곳에 개인이 내세운 장터가 눈에 띄었다. 여태껏 발전 없는 시골에서만 지냈던 엔젤라는 생소했다. 호기심은 그녀가 눈을 반짝거리게 도와줬다. 둘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며 주변을 구경했다.
과일가게 상인이 사과를 먹어보라며 던졌다. 태연한 손길로 헤나는 날아오는 사과를 잡아챘다. 꽃은 손목을 돌려 사과를 살폈다. 벌레도 없고 껍질도 멀쩡하기에 사과를 소매로 닦은 뒤 엔젤라에게 건넸다. 그녀는 빨간 사과를 보더니 입을 벌려 와작 씹었다.
"괜찮군." 달콤한 즙에 엔젤라는 씩 웃었다. 처음은 선물이지만 다음에 한 번 방문해 달라고 상인이 부탁했다. 엔젤라는 대충 끄덕였다. 사과로 꽉 찬 입을 우물거리며 다른 곳으로 헤나를 끌고 가려고 했다.
"벌써 늦은 밤이야. 잘 곳을 찾아보자."
별빛도 흐려진다면서 꽃이 눈썹을 축 내렸다. 엔젤라는 사과를 한번 더 씹고 하늘을 봤다. 헤나가 말한 대로 동그란 달과 환한 별이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네 말이 맞아." 바닥에 먹다 만 사과를 툭 떨어뜨렸다.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린 그녀는 헤나에게 숙소를 구해보자고 이야기했다. 가지런한 손끝을 바라보며 꽃은 어디가 좋냐고 물었다.
"침대에서 자고 싶어."
헤나는 품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끈을 풀어 주머니를 열어보니 떠나기 전 마을 주민들이 걱정된다며 주었던 은화 몇 닢이 보였다. 볼품없는 마을주제에 그녀에게 가진 것을 몽땅 내놓은 모양이다.
"충분해 보여. 어디로 갈까?" 꽃이 눈을 곱게 접었다. 엔젤라는 대답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
어두운 밤이어도 여인숙에 들어오는 손님을 주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두 명." 엔젤라는 인사를 받지 않고 거만하게 턱짓했다. 예의 없는 모습에 주인은 얼굴을 굳혔지만 짤랑거리는 소리에 금세 미간이 풀렸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꽃이 인간을 대신해 덥수룩한 주인에게 곱게 눈을 접었다. 단정한 미소에 주인은 호탕하게 방까지 직접 안내했다. 엔젤라는 느긋이 뒤따라갔다. 쿵쾅거리는 발걸음이 그녀와 달리 경박하다고 헤나는 내심 주인을 점수 매겼다.
삐걱삐걱 계단을 밟으니 낡은 음이 작게 울린다.
"이층이라." 엔젤라는 계단 난간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히죽 웃자 헤나도 만족스럽다. 주인은 두 사람이 머물 방 앞에서 멈췄다. 그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열쇠를 찾았다. 쇠 열쇠는 오래되었는지 녹이 조금 슬었다. 다행히 문은 열렸지만 주인은 제 상의로 녹슨 열쇠를 대강 닦은 뒤 헤나에게 넘겨줬다.
"그 소식 들었나?" 문을 열다가 주인이 뒤를 돌아본다.
"무슨 소식이요?" 헤나가 눈을 깜빡였다.
"옆 마을에서 동굴이 무너졌답디다. 신이 노하셨는지 전조 따위는 없었다는 군."
"무서운 이야기네요. 다친 사람이 없길 바라야겠어요."
엔젤라는 꽃을 빤히 쳐다봤다. 시치미를 뚝 떼니까 얄미웠다.
"뻔뻔하긴." 꽃을 겨냥한 말이었으나 주인이 대신 맞았다. 민망함에 주인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편하게 머무라면서 방문을 힘주어 닫았다. 덜커덩 소리는 이곳을 영 미덥게 했다.
방안에 단 둘이 남자 잔잔해진 공기에 엔젤라는 콧노래를 부른다. 흥흥거리다가 침대에 풀썩 앉았다. 엔젤라는 다리를 아래로 둔 채 상체를 옆으로 쓰러뜨렸다. 부드러운 이불이 엔젤라의 볼에 톡 닿았다.
"이리 와." 그녀가 부르자 헤나는 침대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 자세는 길게 유지되지 않았다. 엔젤라는 꽃이 다가오자마자 팔을 당겨 제 옆으로 끌었다. 헤나는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꽃은 그녀의 팔을 베고 누웠다. 눈앞에 사모하는 당신이 가까워서 헤나는 새빨갛게 폈다. 그녀는 숙맥처럼 달아오른 뺨을 자유로운 손으로 쓰다듬다 주홍빛 머리카락을 귀로 넘겨줬다.
"머리카락 정돈 좀 해." 툴툴거려도 손길은 자상하다.
"네가 잡아당겨서 그래." 이제는 입이 생겨서 헤나는 대답할 수 있다.
하얀 손이 귀에 닿자 간지럽다. 꽃은 까르르 웃었다. 해맑은 웃음에 빠져 엔젤라에게 까만 입은 보이지 않았다. 엔젤라는 어색했다. 조금은 부끄럽고 속이 간지럽고 정의 내리기 어렵다. 드물게 눈을 접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손길로 풀었다. 빨개진 볼을 잡아당기며 놀렸다.
"어쭈. 이제 말대꾸도 할 줄 알아?" 엔젤라는 몸을 확 뒤집고 헤나를 간지럽혔다. 꽃은 하지 말라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낡은 침대가 아프다고 울어대지만 둘은 장난을 계속했다. 낄낄 거리는 웃음이 옅어져서 헤나는 그녀를 힐끔 봤다. 눈꺼풀이 무거운지 스르륵 내려온다. 헤나는 간지럽히던 손길을 붙잡았다. 하얀 손바닥에 제 흉터를 대고서 깍지를 꼈다. 흐릿한 눈을 억지로 뜨려던 엔젤라가 딴지를 건다.
"징그럽게 뭐 해..." 눈가에 힘이 들어가 험상궂어도 목소리는 노곤노곤하다. 헤나는 손을 끌고 제 목을 안도록 이끌었다. 꿈이 엔젤라를 강하게 무의식으로 건너오라며 이끌었다. 그녀는 꾸벅꾸벅 졸았다. 헤나는 그녀의 동그란 어깨를 쓰다듬고 얇은 허리를 매만졌다. 엔젤라는 언제 잠들었는지 작게 숨소리를 낸다. 사랑스러워서 꽃은 그녀의 볼에 손을 올렸다. 꽃은 사람을 따라한 이유가 이것을 위해서였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몰래 입술 근처에 제 입술을 댔다. 언제 봐도 헤나의 보물은 예쁘고 귀엽다. 헤나는 새벽마다 아침이 오기까지 엔젤라를 녹을 듯이 바라봤다.
위험이 도사리는 험악한 시대에 여자 단둘이 다니는 모습은 눈에 띈다. 막 도착한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엔젤라와 나란히 누워서 그녀의 뺨을 만끽하던 중 계단을 오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삐걱거림에 헤나는 얼굴에서 인간다움을 지웠다. 미처 잠그지 못한 문이 허락 없이 잘도 열렸다. 오늘 밤도 꽃은 밤을 순탄하게 보낼 수 없겠구나. 엔젤라가 성인이 된 이후 질리지도 않고 이성이 들이닥쳤다. 시간과 장소를 따지지 않고 어디서나 어느 때나. 매일 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올 때마다 헤나는.
"당신이 오지 않았더라면 이대로 그녀의 잠든 얼굴을 감상했을 텐데요."
엔젤라의 뺨을 다정하게 매만지며 헤나는 말을 건넸다. 살금살금 다가오던 신체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한다. 더러운 발에 낡은 판자가 시끄러워서 헤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꽃은 엔젤라의 귀를 손으로 가렸다. 바닥에 초록 덩굴이 피더니 서글픈 향기가 났다. 낯선 남자는 긴장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의 기관지를 타고 향기가 몸속 깊이 퍼진다.
"이곳에는 뭐 하러 오셨어요." 고요한 새벽에 어울리는 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초대받지 않은 방문객은 그 다정하고도 따뜻한 울림에 취해 꿈틀거리는 덩굴을 눈치채지 못했다. 덩굴은 다리부터 손끝까지 집요하게 타고 올라갔다. 목적지는 목이었다. 파란 올가미가 목에 걸어졌다. 올가미는 조금씩 원을 좁혀서 목과 가까워졌다. 몽롱한 정신머리로 그는 죽음이 가까워진 줄 모르고 입을 길게 찢어 웃었다. 컥 하고 입에서 거품이 보글거린다. 남자의 턱을 따라 침이 바닥으로 하나둘 씩 떨어졌다.
헤나가 내려준 자비로 남자는 통증을 몰랐다. 점차 생명체는 흐려지고 향기와 옷가지만이 남았다. 덩굴로 떨어진 옷가지를 방문밖으로 휙 던졌다. 꽃은 열린 문을 조용히 닫고, 다시 그녀에게 몰두했다. 헤나는 엔젤라의 귀에서 손을 떼고 뺨을 쓰다듬었다. 새벽마다 일어나는 비밀을 그녀가 모르길 바라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빛줄기가 헤나의 눈을 찔렀다. 눈부심을 인지하며 아침을 알았다. 커튼사이로 환한 햇살이 어두운 방안을 파고든다. 빛이 방안을 탐내니 곧 그녀가 눈을 뜰 시간이 가까워졌다.
엔젤라는 뒤척이다 눈을 떴다. 자다 깬 모습이어도 지저분하지 않으니 꽃은 그녀의 예쁜 얼굴을 얌전히 감상했다. 엔젤라는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팔 저려. 비켜." 그녀가 빤한 눈길을 알아챘다. 아침부터 진득하게 보지 말라며 팔을 확 뺀다. 예고 없이 굴어도 헤나는 실실 웃었다. 꽃은 잠든 그녀를 좋아하지만 수다스럽게 구는 그녀가 훨씬 좋다. 밤새 엉켜있던 덕분에 옷은 주름이 잔뜩 생겼다. 엔젤라는 일어나서 옷을 툭툭 친다.
"치마 괜찮아?" 뒤를 살짝 보며 엔젤라가 물어본다.
"내가 정리해 줄게." 구겨진 부분을 발견한 헤나는 옷을 툭툭 털었다.
"상의는 갈아입는 게 낫겠군." 꽃이 치마를 만져주니 엔젤라는 위를 살폈다.
치마가 얼추 단정해지자 엔젤라는 밖을 나서기로 한다. 덜컥 문을 열자 방문 앞에 주인 없는 옷가지가 널브러졌다. 정돈되지 않은 불쾌함에 엔젤라는 언짢게 주인을 불렀다.
"이봐! 문 앞에 버려둔 쓰레기 치워."
옆에서 헤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수줍게 웃는다.
엔젤라와 같은 눈높이를 자처하던 헤나는 덩달아 키가 훤칠해졌다. 몸 군데군데 난도질된 흉터가 징그럽단 말도 꼬리표처럼 따라붙지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같이 어울리는 엔젤라가 무척 사고뭉치였으니 그녀를 수습하기 위해 그랬다는 소문이 부풀려진다. 항상 그녀를 향한 시비는 많았다. 세상한테 질린 만큼 질린 둘은 해명조차 하지 않아서 나쁜 소문이 평연하게 번졌다. 고향에서 거처를 옮겼지만 여전히 주변은 다르지 않더라.
꽃은 엔젤라가 시장을 나설 때마다 길가를 살폈다. 무릎을 꿇고 화단을 구경했다. 고운 흙 입자가 썩 괜찮다. 헤나는 손가락으로 흙을 꾹 눌러서 하찮은 자국을 만들었다. 씨앗이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였다. 흉터뿐인 손아귀를 쥐었다가 폈더니 아무것도 없던 곳에 씨앗이 잔뜩 생겼다. 손바닥에서 우수수 떨어질 정도로 많은 씨앗이었다. 헤나는 그중 몇 개를 집어 흙에 조금씩 심었다.
"지금 뭐 하나?" 수상한 모양새에 주민이 말을 걸었다.
"꽃을 심고 있어요. 삭막한 길목에 피면 예쁘겠죠?" 헤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놀러 온 줄 알았던 이방인이 마을의 경관을 가꾸자 주민은 경계심이 단번에 녹았다. 헤나가 화기애애하게 꽃을 심는 동안 엔젤라는 남자와 실랑이를 하던 참이었다.
"당신이 먼저 내 엉덩이 주물렀잖아!" 그녀가 키가 큰 덩치에게 삿대질하며 언짢게 화를 냈다. 주민들에게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방인이 제 마을에서 큰소리를 내니 자연스럽게 팔은 안으로 굽었다.
"상스럽게 웬 큰 소리야?"
"둘이 도대체 왜 같이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
"약점이라도 잡혔겠지. 안 그래?"
그렇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헤나는 흙을 털며 일어났고 엔젤라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어깨와 팔을 이곳저곳 주물러주면서 다소곳이 달랬다. 엔젤라는 여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눈에 핏줄을 세우며 이를 콱 깨물었다. 꽃이 뒤에서 그녀를 포근하게 껴안았다. 하얀 귓가에 입술을 대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엔젤라는 씩 웃고 헤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여인숙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문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에 주인장이 곱게 다루라며 혼을 낸다. 그러든가 말든가 엔젤라는 이층만 보면서 계단을 짓밟고 올라갔다. 이층에 도착해 방문을 열었다. 침대가 보이자 엔젤라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쉰다.
방안에 들어와 삐걱거리는 문을 닫았다. 추행범에겐 당당하고 강하게 굴었지만 그녀는 긴장이 허물어졌는지 털썩 주저앉는다.
"괜찮아?" 형편없는 바닥이 그녀를 해쳤을까 봐 헤나는 넘어진 그녀를 샅샅이 살핀다.
"다 지긋지긋해!"
그녀가 무릎을 안고 고개를 숙인다. 강렬한 감정분출에 헤나는 허둥거리며 엔젤라를 껴안고 등을 어루만졌다. 어깨를 살살 쓸었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자 꽃은 점점 괴물에 가까워진다. 헤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제게 향하도록 올렸다. 새침했던 눈가가 새빨갛고 연두색 눈은 촉촉했다. 아, 꽃이 애써 만든 시야가 울적하게 흐릿해진다.
"앤지, 앤지...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응?" 아까 그녀에게 속삭였던 말을 되풀이했다.
어릴 적 엔젤라가 그렇게 해줬듯이 꽃도 엔젤라의 눈가를 살살 쓸었다. 그리고 팔을 벌려 그녀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드센 그녀가 반항 없이 가만히 있으니까 더욱 속상했다. 엔젤라는 침묵 속에서 눈물을 쭉 자아냈고 꽃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가 헤나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자 헤나는 엔젤라를 품에 넣고 등을 토닥였다. 엔젤라는 품속에서 헤나의 옷가지를 꽉 잡았다. 옷이 구겨져도 상관없으니 헤나는 그녀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한동안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이내 잠잠해진다. 어지간히 떨어지기 싫은지 손은 옷을 쥔 상태였다.
헤나는 엔젤라를 나직하게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눅눅해진 옷 위로 그녀의 숨소리가 색색거리니 사랑스럽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 헤나는 살짝 입 맞춘다. 쪽 소리가 선명해질 만큼 어느새 바깥도 이곳처럼 고요해졌다.
오로지 헤나만이 눈을 떴다. 공허한 파란 눈이 작게 들썩이는 엔젤라를 담는다. 이깟 마을이 감히 그녀를. 헤나가 차갑게 요동치자 길목에 심어둔 씨앗이 일제히 반응했다. 작은 씨앗은 튼튼한 껍질을 깨부수고 나왔다. 경이로운 성장속도에 모두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라도, 헤나는 품속에 그녀를 가두며 까만 미소를 지었다.
어제까지 없던 꽃이 길목에 가득 피었다. 헤나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어제와 오늘이 다른 풍경이어도 아무도 몰랐다. 향기는 꽃이 반영한 뜻대로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서글픈 향기가 짙어졌다.
어디든 가지치기는 필요한 법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던 중 늘 추행을 일삼던 난봉꾼이 사라졌단 소식이 여인숙까지 들렸다. 돌다리 밑에 옷가지만 남겨져있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대놓고 그녀에게 곁눈질을 보낸다. 다들 그릇에 칼질을 하며 엔젤라를 살핀다. 엔젤라는 시선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고기를 썰었다. 나무와 그릇이 부딪힌다. 이곳에서 엔젤라는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자였지만 가냘픈 여성이 장성한 남자를 어떻게 이기겠냐며 다들 혀를 찼다.
"그게 말이나 되겠어!" 누군가 호탕하게 탁자를 치더니 머쓱한 웃음이 덩달아 올라왔다.
"어서 일이나 하러 가자고." 다들 의심도 쉽게 놓았다.
"바보들." 제게 쏠린 관심이 사라지자 엔젤라는 편안하게 고기를 입에 넣었다.
서글픈 향기가 온 곳을 지배했다. 마을은 낯선 이방인을 자연스럽게 울타리 안으로 인도했다. 당연한 수순대로 꽃은 마을에서 모두를 깡그리 홀렸다. 특히 어린이에게 인기가 높았다. 말없이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은 아이가 우상으로 삼기엔 충분했다. 어린이는 자상한 헤나에게 홀딱 빠졌다. 너그러운 헤나는 어떤 장난이든 눈을 접어줄 뿐 혼도 내지 않았다. 소년과 소녀가 바라보는 세상에서 헤나는 품행이 단정하며 모든 행동에 칭찬일색이 붙는 멋진 어른이었다. 집, 마을, 놀이터 어디서든 어른들은 헤나같이 굴라며 어린이에게 잔소리를 내뱉었다.
엔젤라는 때때로 꽃을 데리고 소박한 장터를 구경 나왔다. 둘이서 진열된 옷을 들추고 있었다. 구경하던 물건에 시선이 오래 머물자 엔젤라는 보라색 상의를 샅샅이 톺아봤다. 헤나가 하얀 피부와 보라색이 어울린단 감상에 파묻히던 차 누군가 옷을 쭉 잡아당긴다. 헤나는 밑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에 아래를 봤다. 자그마한 인간 개체가 다수 보였다.
"헤나, 헤나!"
"인기가 제법인데?" 엔젤라는 히죽 웃었다.
한 소녀는 헤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다른 소녀는 놀아달라고 떼를 썼다. 어느 아이는 옷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소 무례한 행동에도 헤나는 다소곳하게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네 손길에 옷이 늘어날 수도 있어. 그렇게 꽉 잡으면 안 돼." 부스스한 머리를 토닥여주는 헤나는 어린이 눈에 천사와 다름없었다. 낯선 이방인을 구경하던 어린아이들은 점점 꽃한테 칭얼거렸다. 주변이 이토록 시끄러운데 헤나는 소리 없이 미소를 짓는다.
"헤나! 이, 이거 받아."
헤나가 소녀 무리를 챙기던 중 소년이 말을 걸었다. 소년은 헤나를 먼저 불렀음에도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무리에서 혼자 머리가 삐져나왔을 정도로 키가 컸다. 빼꼼 튀어나온 소년은 온몸을 꼼지락거리다 등뒤에서 들꽃을 내밀었다. 꽃은 앙증맞았지만 내민 팔에 긁힌 자국에 많았다.
"어디서 꺾었니?" 헤나는 상처와 꽃을 번갈아 쳐다봤다.
"저쪽 절벽에서..." 남자아이는 발로 땅을 긁었다.
"그곳은 위험해. 그 꽃을 꺾다가 네가 다친다면 부모님이 속상하실 거야."
"아냐, 마법으로 딴 거야. 난 괜찮아."
헤나는 먼지 묻은 남자애의 옷을 자상한 손길로 털었다. 간간이 옷을 들춰 천에 박힌 가시를 조심스레 뺐다. 그리고 남자애의 코를 꼬집었다.
"아야!" 소년은 아픈 줄 몰랐지만 괜히 엄살을 부린다.
"요 말썽꾸러기." 들꽃을 받은 헤나는 파란 눈을 접었다. 소년은 그 미소를 보자 확신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자 손으로 제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소년은 눈이 부셨다. 세상이 밝게 빛나더라. 잘 보니 헤나의 등뒤에서 빛이 났다.
이토록 까만 꽃이 가득한데도 어째서 그녀에게 함부로 굴까. 왜 다들 엔젤라에게 손가락질을 할까.
엔젤라는 속상하다고 웅얼거리는 꽃을 달래야만 했다. 넓은 길목에 울창한 가지를 자랑하는 나무가 보였다. 그녀는 헤나를 질질 끌고 나무 아래에 억지로 앉혔다. 빈틈이 송송난 그늘은 서늘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달래주었다. 둘은 나무 밑에서 바람에 잎사귀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예쁘게 우겨진 그늘을 즐겼다.
"이 예쁜 손을 보고 왜 버릇이 나쁘다고 하는 거야?" 엔젤라는 손가락을 짝 피고 제 손끝을 보느라 몰두했다.
"먼저 건들지나 말던가." 투덜거림이 끝나지 않는다.
헤나는 가만히 엔젤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녀가 투덜거릴수록 머리가 들썩이지만 뭐 상관없다. 갈수록 고귀해지는 그녀를 보면서 꽃은 세상이 밉다. 그녀에게 모진 세상을 아직껏 이해할 수 없다. 칙칙한 어둠이 헤나를 좀먹지만 눈앞에 사모하는 당신이 존재한다. 고개를 살짝 들어 꽃은 엔젤라를 봤다. 화창한 날씨 아래에서 하얀 조각상 같은 그녀. 헤나는 아름다움이란 위대한 덕목이라고. 손을 올려 엔젤라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려던 그때에 산만한 발걸음이 들렸다. 멀리서 소년이 보였다.
"헤나! 이 빵 우리 엄마가 직접 구운 거야."
소년은 우당탕탕 뛰어오더니 양손으로 빵을 건넸다. 꽃을 주던 모습과 다르게 당당했다. 무엇이 소년에게 용기를 준지 모르겠지만 씩씩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축복이고 가정의 행복이다. 작은 손 위에 부드러운 빵 덩어리가 보였다. 따끈따끈한 온기가 올라오는 빵은 먹음직스러웠다. 빵을 받기 전까지 그대로 있을 모양인지 소년은 헤나를 멀뚱히 본다. 눈동자가 깜빡이자 헤나는 기댔던 어깨에서 어렵게 머리를 뗐다.
"내 건 없냐?"
엔젤라가 소년에게 딴지를 건다. 갓 나온 빵의 고소하며 향긋한 단내는 도도한 엔젤라마저 킁킁거리게 했다. 헤나가 아닌 타인이 선물에 관심을 갖자 소년은 빵을 제 뒤로 휙 숨겼다.
"저리 가! 헤나한테 줄 거야!" 소년은 엔젤라에게 빵 대신 혓바닥만 내밀었다.
"고마워." 잘 먹겠다며 양손으로 빵을 건네받는 헤나는 왜 이리 행동이 작고 귀여울까? 소년은 헤나에게 푹 빠졌다. 헤나는 늘 엔젤라를 녹을 듯 바라보는데 왜 제게는 그런 시선을 주지 않을까? 소년은 담백한 시선에서 감정을 이끌고 싶었다.
매일 시와 편지를 썼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붙잡고 헤나에게 낭독했다. 헤나는 귀엽다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조용한 미소에 소년은 행복했다. 직접 깎은 나뭇조각도 선물로 줬더니 헤나는 고맙다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게 전부였다. 소년은 갈수록 미적지근한 반응에 목이 말랐다.
사랑이란 갈증이 얼마나 목이 타는지 헤나는 알까? 헤나는 소년이 품은 애타는 연모도 모른 채 점잖은 습관을 매일 보여줬다. 입꼬리를 올린다. 눈꼬리를 접는다. 입꼬리를 올린다. 눈꼬리를 접는다. 공식처럼 반복되었다. 관심 딱 한 방울만을 원하던 소년은 순수한 마음이 바뀐다. 사랑은 사람을 속 좁게 만든다. 다정하게만 보였던 헤나가 밉상으로 변했다. 어쩜 사람의 마음은 이리도 얄궂은지. 소년의 얄팍한 호소에 헤나가 어울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축 쳐진 소년이 둘이 머무는 방앞에 우중충하게 앉아있었다. 막 바깥에서 돌아온 엔젤라는 그 모습에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에도 반응이 없길래 엔젤라는 발로 소년을 건들었다. 곧 떽떽거리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온다.
"하지 마!" 고개를 묻은 채로 목소리를 빽 질렀다. 엔젤라는 한쪽 귀를 막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서 궁상떠니?" 엔젤라가 무심하게 내뱉자 소년은 더욱 울적하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고개를 들고 확 소리를 질렀다. 소년이 얼굴을 서럽게 장식하자 그녀는 히죽 웃었다. 쿡쿡 웃어댔다. 소년을 놀릴 생각이 엔젤라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녀는 쭈그려 앉은 소년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팔꿈치로 소년을 찔러댔다.
"헤나한테 몇 번 차여야 포기할래?"
"왜 말을 그렇게 해!"
"고약한 꼬맹이. 너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온몸은 먼지투성이지. 게다가 키도 작고 못생겼어. 헤나가 널 선택해야 될 이유가 뭔데?"
엔젤라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특징을 나열했다. 손가락이 접힐 때마다 소년은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곧 울지도 모를 표정에 그녀가 급하게 옷을 털고 일어나려고 했다. 소년이 엔젤라의 치마를 꽉 붙든다.
"제발 도와줘!" 커다란 울음소리에 밑에서 관심을 표하려고 하자 엔젤라는 문을 발로 찼다. 소년의 멱살을 잡고 제 방 안으로 던졌다. 살을 긁혔는지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바닥에서 들린다. 엔젤라는 문을 닫고 성가신 꼬맹이를 내려다봤다.
"이딴 식으로 굴면 누구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걸." 부츠가 또각거린다. 엔젤라는 넘어진 꼬맹이에게 다가갔다. 하얀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고 올렸다. 그녀가 억지로 소년과 눈을 마주친다.
"솔직히 가망이 없지." 비아냥거리는 엔젤라는 예쁜 얼굴과는 다르게 못됐다. 제 사랑을 응원해주지는 못할망정 괴롭히고 죄다 퇴짜만 남겨서 소년은 속상하다. 그래도 첫사랑은 대단하다. 겁쟁이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니까. 머리카락이 뽑히든 말든 소년은 입을 나불거렸다.
"헤나는 뭘 좋아해?"
"네 눈앞에 있는 여자."
"거짓말쟁이!"
"걘 나밖에 몰라."
영양가 없는 말만 엔젤라가 되풀이하자 소년은 대화를 포기했다. 못된 여자와 말이 안 통한다며 심통이 난 소년은 손아귀를 퍽 뜯어냈다. 나뭇바닥을 부숴버릴 작정으로 발걸음으로 화난 티를 팍팍 냈다. 입을 댓 발로 내밀고 문밖을 나섰다. 마침 외출에서 돌아온 헤나와 소년은 툭 부딪쳤다.
"어, 헤나?" 그 순간 소년은 낯선 것을 봤다. 왠지 모르게 헤나의 입안은 새까맣게 보였다. 아냐 착각이겠지.
시체를 먹는 괴물꽃은 사람으로 변한다는 전설이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온다. 옛날부터 그리고 어릴 적부터 부모가 자식에게 전해주는 자장가와 같은 동화 속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지독한 괴물꽃. 그것은 사람으로 변장하고 흉내 내기를 가장 잘해 누구든지 깜짝 속인다고들 한다. 그렇게 속아버린 사람은 깊은 숲 속으로 따라 들어가 그들의 양분이 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모두를 구하기 위해 식물을 관찰하고 특징을 찾아 감쪽같이 숨은 그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기에 몸속에 빨간 피가 없다. 하나같이 가짜란 것은 입속이 새까맣다. 주인공의 놀라운 관찰력 덕분에 마을은 괴물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았다.
엄마가 잠들기 전 읊어주던 괴물꽃 이야기가 소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헤나였음에도 소년은 이가 달달 떨렸다. 찰나의 공포가 소년을 살리기 위해 헤나를 퍽 밀쳤다. 반응할 틈도 없이 헤나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거칠게 신체가 쿵쿵 부딪치는 소리와 달리 헤나는 침묵했다. 목이 돌아가고 무릎은 반대로 꺾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상한 자세로 꼬꾸라진 헤나를 보자 소년은 정신을 픽 놓아버렸다.
"헤나!" 예상 못한 사고에 엔젤라는 계단을 험악하게 내려갔다.
"너 멀쩡하지? 그렇지?"
기괴한 몸뚱이를 애써 무시한 채 엔젤라는 반대로 돌아간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파..." 헤나는 눈을 떴고 눈 깜빡할 사이 끔찍하게 망가진 몸을 수선했다. 돌아간 어깨를 끼어 맞추고 무릎은 다시 꽂았다. 역겨운 모습에 엔젤라는 속이 울렁거렸다.
"방금 사람들이 나가더라. 밖에서 마주쳤어." 대낮이라 여인숙에 머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밟을 때마다 부서질까 봐 걱정했던 계단은 의외로 튼튼했다. 멀쩡한 계단을 꽃은 천천히 올라갔다. 헤나는 계단에서 자신을 밀친 소년을 바라봤다. 꽃이 무슨 속셈인지 눈치챈 엔젤라는 급하게 헤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내버려 둬." 헤나는 엔젤라를 멍하니 보다 끄덕였다. 엔젤라는 꽃이 마음을 바꾸기 전 정신을 잃은 소년을 침대에 눕혀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엔젤라가 고향에서 가져온 건 꽃뿐이었다. 더 이상 챙길 짐은 없었다.
왜 그렇게 촌뜨기한테 신경 썼냐고 묻는 엔젤라에게 헤나는 답했다.
"누굴 말하는 거야? 내 눈에 다른 사람들은 다 똑같아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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