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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8. 가을축제

by 넴 박 2024. 7. 28.

날이 차가워지고 붉은 잎이 검게 타올랐다. 헤나는 어색했던 새 옷이 계절에 따라 제 옷처럼 익숙해졌다. 파란 염료로 새롭게 탄생한 마법사의 망토는 꽃과 잘 어울렸다. 엔젤라는 제 안목에 미간을 느긋하게 폈다. 풍요로운 계절답게 가을 축제로 마을이 떠들썩하다. 모두 풍작을 기원하고 지금껏 키워온 작물을 베고 축제에 올릴 준비를 했다. 들뜬 분위기를 더욱 꾸며주려는 듯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씨앗은 앙증맞았다.

엔젤라와 헤나는 시끌시끌한 거리를 손 잡고 누볐다. 어딜 가든 부지런한 사람은 꼭 있더라. 벌써 준비를 끝낸 사람을 발견하자 대단하다며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가 헤나의 손을 잡은 채로 천막을 가리켰다. 상인이 망가진 천막을 고치려고 끙끙거린다. 운이 없다면서 둘은 키득거린다.
 
"시골을 벗어나니 축제도 보는 군." 엔젤라는 거리를 걷다 돌담에 등을 기댔다. 흐뭇한 미소에 헤나는 같이 들뜬다. 
"어디부터 갈까?" 꽃이 엔젤라의 옆에 따라붙었다. 헤나는 머리를 마른 어깨에 기댄다. 그녀가 무겁다고 투덜거리지만 손길은 부드러웠다. 
"뭐가 있었지?" 하얀 손으로 주홍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엔젤라가 운을 띄운다. 
"음유시인, 무대, 장터..." 머리에 붙은 씨앗을 떼주는 걸까. 헤나는 자상한 손길에 눈을 감았다.
 
손길을 오래 만끽하진 못했다. 대답을 듣자마자 엔젤라가 담에서 몸을 확 뗐으니까. 흥미롭다면서 가장 소란스러운 중앙으로 발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배려 없는 움직임에 헤나는 넘어질 뻔했지만 천천히 그녀를 뒤따라갔다. 촉촉하고 고운 입자가 맨발에 묻는다. 식물답게 풍족한 땅이 마음에 들었다. 헤나는 가지런한 돌담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흙바닥과 돌벽이 선사하는 아리따운 광경에 꽃은 입가가 느슨해진다. 햇살도 따사로워서 헤나는 꽃잎이 간지러웠다.
 
엔젤라와 거리가 멀찍해졌지만 헤나는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돌벽을 손에 대고 사뿐사뿐 거리를 올라갔다. 멀리서 노란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아무리 멀어도 흔한 색깔이어도 헤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엔젤라였다. 군중 속에서 단번에 그녀를 찾은 헤나는 방금까지 느끼던 흙도 잊고 보폭을 넓혔다. 보폭이 넓어지다 못해 맨발이 쫑쫑 뛰었다.
 
상인이 그릇과 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또로록 술이 흘러내린다. 검붉은 액체는 달콤한 향이 나서 엔젤라는 입맛을 다졌다.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가 상인 앞에 섰다. 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숙였다. 술이 궁금하나? 엔젤라가 관심을 보이니 헤나는 눈을 반짝였다.

아름다움이 찬양받는 이유는 드물어서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화려한 존재감에 술을 붓던 상인이 그녀를 힐끔 쳐다본다. 엔젤라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입을 살짝 벌려 상인에게 웃는다. 상인은 예쁜 미소에 헤벌쭉 거리며 술을 따르던 손을 삐끗했다. 허술한 모습에 엔젤라는 깔깔거린다.
 
"다 쏟아버린 잔, 나한테나 주지?"
꽃은 그가 미소를 하사 받자 질투가 지글지글 끓었다. 엔젤라는 타오르는 눈길에 등이 따가웠다. 몸을 휙 돌려서 헤나를 째려봤다. 꽃이 사고를 치기 전 그녀가 손을 올렸다. 망토를 꽉 잡고 헤나의 머리 위로 뒤집어 씌웠다.
 
"거, 친구 놀라겠소."
"술." 엔젤라가 망토에서 손을 떼고 거만하게 턱으로 잔을 가리켰다. 
"안 되지 안 돼. 이게 얼마짜리인데." 상인은 손에서 술이 뚝뚝 흘렀다. 
 
덤벙거리던 상인이 위아래를 살피며 헝겊을 찾더라. 기회를 노리던 엔젤라는 상인이 놓아둔 포도주를 탁 빼앗아 들었다.

"이봐!" 꼴깍꼴깍 목에서 술이 넘어간다. 도수가 높은지 엔젤라는 알딸딸하다. 입가에 묻은 와인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뒤에서 망토를 눌러쓰고 엔젤라가 직접 수선해 준 옷을 헤나는 만지작거렸다. 꽃은 얌전하게 그녀를 봤다. 엔젤라가 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조금씩 비틀거리며 엔젤라는 시끄러운 중앙으로 향했다. 헤나가 맨발로 그녀를 쫓아갔다. 그제야 꽃은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풍작을 기원하는 축제답게 거리에 온통 과일과 술이 널려있었다. 탐스럽게도 노랗고 빨간 과일이 보였다. 엔젤라가 좋아하는 주홍색도 발견했다. 헤나가 색깔에 빠진 동안 엔젤라는 음유시인에게 다가갔다. 그는 중앙에서 갈색 류트를 연주하며 관중을 무대로 끌어들였다. 연주를 멈추지 않고 호객을 계속하니 이 일이 능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엔젤라는 멍한 시야가 방해되어 고개를 털었다. 곧 미간에 힘을 줬다. 걸음을 비척거리며 엔젤라는 음악과 함께 군중 속으로 섞인다. 그녀가 부딪히는 사람을 무시하고 밀쳤다. 어느새 그녀는 깊이 들어갔다.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 술에 찌든 인간은 쉽게 무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에도 근처에서 다루던 탬버린을 슬쩍했다. 대놓고 악기를 앗아가도 주인은 뺏긴 지도 몰랐다. 그토록 분간 없는 곳이었고 코가 마비될 장소에서 금속이 손에 쨍 부딪힌다.
 
그녀가 대책 없이 상스럽게 굴어도 태평한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태양은 하얗게 동그라미를 빛냈다. 널찍한 자비를 햇살로 바꿔 마을에 내려쬔다. 인간은 정수리가 익어가는 줄 모르고 춤을 췄다. 원 없이 느껴지는 생기가 가운데로 몽땅 모였다. 꽃이 남긴 발자국에서 허우적거리던 개미떼처럼 생명력이 가득한 중심에서 그녀가 히죽 웃는다. 웃음만으로도 강한 존재감을 비추니 다들 넋 빼고 그녀를 바라봤다.
 
엔젤라는 한 손을 사뿐히 들었다. 다른 손으로 탬버린을 톡톡 쳤다. 박자에 맞춰 몸이 나풀거리며 훔친 탬버린을 시끄럽게 뽐냈다. 벅벅 쳐대는 북소리에 그녀가 사뿐하게 팔을 펼쳤다. 부츠가 또각거린다. 부드러운 움직임을 따라 그녀의 낡은 치마에 주름이 진다. 조야한 천 주제에 물결을 우아하게 이끌어낸다.
꽃은 눈을 좁혔다. 그녀가 밝아 눈부셨다. 어떤 보석과 드레스라도 엔젤라보다 빛나지 않는다고 헤나는 단정 지었다. 
 
"너무 예뻐......" 꽃은 두 손을 모아 엔젤라를 우러러보았다. 
 
태양을 사모해 눈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곳에서 엔젤라가 숨 쉴 뿐인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헤나는 찰나를 길게 바라봤다. 손바닥이 탬버린을 팡 때렸다가 떨어진다. 솜털을 날개 삼은 씨앗은 미약한 충격에 이리저리 나부낀다. 허공에 씨앗이 둥실둥실 떠다니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엔젤라가 탬버린을 마구 흔들었다. 그녀는 지고지순한 바람길을 방해한 줄 모르고 솜털을 날려댔다. 뜨겁게 달아오른 축제에 그녀가 첨벙 몸을 담갔다. 엔젤라는 눈을 감고 타인과 어깨를 맞닿았다. 춤이 달아오르자 탬버린도 고약하게 귀를 시끄럽게 긁었지만, 환호성이 짙어진다.
누군가 그녀를 덥석 껴안고 중얼거렸다. 술에 취한 사람마다 그녀에게 달라붙더라. 그중 한 명은 사랑한단 고백도 했다.
 
"분수를 망각한 놈이군. 다들 춤이나 춰!" 엔젤라는 손아귀를 펼쳐 난봉꾼을 제 몸에서 거칠게 떼어냈다.
 
추잡한 방해에도 엔젤라가 선보인 아름다운 춤은 더욱 매끄럽게 흘러갔지만. 공교롭게도 그녀가 분위기를 고조시켜 봤자 식물은 축제를 즐길 수 없다. 인간들이 제 보물을 마음껏 헤집으니 꽃은 까맣게 옹졸해졌다. 우드득. 손끝이 헤나에게 동조해 한 손이 우겨지지만 주변은 술에 취했다.

사과를 와작 씹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직접 들판에서 꺾어온 꽃이라고 누군가가 덧붙인다. 꽃은 거리에 족족 늘어진 과일이 떠올랐다. 꽃이 상기한 기억에서 엔젤라를 빼자 전부 기괴했다.
제 종족이 목 따인 채 사방 곳곳 전시되었다. 사람은 이곳에서 타인과 어울리지만, 고요한 공동묘지의 꽃한테 이곳은 역겹도록 산만했다.
 
기쁘게 춤을 추는 엔젤라를 보니 꽃은 사무친다. 별거 아닌 이 시간이 너무나 고귀하다. 인파 속에서 존재감이 더욱 짙어지는 엔젤라가 눈부시도록 멋있다.
 
무대 위에서 엔젤라는 강한 생명력을 자랑했다. 
하얀 손가락이 탬버린을 때린다. 얇은 손목에 파랗게 핏줄이 섰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짝을 찾듯 마주친다.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때린다. 그녀가 빙글빙글 돌자 치마도 어여쁘게 따라 돌았다. 작은 행동으로 중심에서 외곽까지 파도쳤다. 사람들은 가장 아름다운 그녀에게 눈길을 준다.
축제에 젖어간 엔젤라가 지친 숨결을 훅 내뱉었다. 아, 엔젤라의 뜨거운 뺨을 타고 땀이 똑 흘러내린다. 그녀에게서 독립한 땀이 흙으로 스며들자 헤나는 없던 갈증이 절로 생긴다. 꽃은 입을 꾹 다물었다. 땀이 떨어진 곳까지 꽃이 뿌리를 뻗지 않게. 헤나는 그녀가 속한 축제를 망치지 않도록 억지로 그녀에게 향한 시선을 꺾고 바닥을 봤다.

모두가 제 친구를 바라보니 자랑스럽지만, 슬프게도 찬란한 그녀는 헤나만의 보물이 아니다. 류트를 집어던진 음유시인이 커다란 손으로 얇은 어깨를 만졌다.
 
"당신을 위해 노래하겠소." 음유시인이 목을 풀었다.
"뭐야?" 흥미롭게 웃는 엔젤라를 보자 뿌리가 맨발에서 자랐다. 술냄새가 가득하니까 땅이 울퉁불퉁해져도 아무도 모를 거야. 가려진 망토 밑에서 헤나는 까만 미소를 내보였다.
 
사실 엔젤라가 헤나를 위해 식사를 마련한 게 아닐까? 이곳은 겁 없는 인간이 뭉쳐있는 잔칫상이잖아. 지저분한 시체를 먹던 헤나는 선호하는 취향이 없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다면 하나 정도는...
 
"꺅! 뭐야?!" 어디선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집중이 맥없이 풀려버리자 헤나는 입을 다물었다.

"미친놈! 어딜 만져!" 흥분에 찬 음유시인이 엔젤라의 가냘픈 손목을 울뚝하게 쥐었다. 그녀는 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남자는 끄덕 없었다. 손가락으로 긁어봐도 소용이 없다. 엔젤라는 이를 악물고 손에 있던 탬버린으로 남자의 머리를 깡 하고 쳤다.

"으악!" 탬버린에 구멍이 뻥 뚫렸어도 아직 손목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에 핏줄이 강하게 돋보인다. 그녀는 곁눈질로 어질러진 탁자를 봤다. 팔을 뻗어 탁자를 뒤적거렸다. 천이 배려 없는 손길에 구겨진다. 손에 딱딱한 것이 닿았고 엔젤라는 그것을 냅다 남자의 머리에 휘둘렀다. 그릇이었다. 짤막한 비명이 났다. 그릇에 담겨있던 내용물이 남자의 면상에 쏟아졌다. 남자가 고개를 드는 순간.

쨍! 그릇이 산산조각이 났다. 머리를 얻어맞은 남자는 바닥에 픽 쓰러졌다. 하얀 손에서 새빨간 피가 아래로 흘렀다. 엔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깨진 유리를 땅에다 집어던졌다. 그릇이 시끄러운 파편으로 쪼개졌다. 바닥에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이 펼쳐졌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유리바다를 유유히 건넜다. 그에게 향할수록 바다가 잘게 부서졌다. 유리조각을 밑창에 붙인 채 그녀는 망가진 탬버린을 꽉 쥐었다.
 
다들 이곳으로 다가오더라.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하얀 손목에 멍자국이 남았어요. 그녀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흐르잖아요. 전부 눈이 멀었나 보죠.

한 여인이 음유시인이었던 남자를 부축하며 엔젤라에게 삿대질을 한다.
 
"몰상식하긴! 외부인주제에 감히!"
그녀에게 시를 읊어도 끝내 거부당한 남자를 다들 동정하며 그에게 모든 힘을 실어줬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저 여자 누가 데려왔어?!"
어디든지 다 똑같구나. 왜 그녀에게 함부로 굴까. 방금까지는 모두 엔젤라를 우러러보았잖아. 지금은 왜 그래? 헤나는 텅 빈 눈을 또록 굴렸다.
 
비겁한 무리는 그녀에게 다가오진 못하고 옹기종기 모여서 남자를 감싸고돈다. 흰자를 내세우는 시선은 몰상식했다. 엔젤라는 꼿꼿하게 흐르는 피를 무시하고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린다. 기다란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면서 시야가 깔끔해진다. 그녀가 들고 있던 탬버린을 바닥에 던졌다. 유리바다는 물 대신 유리가 튀더라. 남자를 부축하던 여인은 유리조각을 맞고 끙끙 앓았다.
 
"엄살 부리긴."
 
고통을 향해 그녀가 조소를 비췄다. 떨어진 탬버린을 발로 차 주인에게 돌려줬다. 딱딱한 부분만 보존한 탬버린은 누군가의 종아리에 부딪혔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달달 떨더라. 엔젤라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휙 돌았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어디에 있을까. 여전히 망토를 뒤집어쓰고 음침하게 구는 꽃을 쉽게 찾았다. 그녀가 헤나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바닥에 나뒹구는 포도알을 으깨 밟으면서. 밑창에 있던 유리조각 대신 과즙이 발자국에 남는다.
 
"건방지게 굴지 마!" 남자가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널브러진 과일을 그녀에게 던졌다. 딱딱한 사과가 엔젤라의 머리에 날아왔다. 사과는 묵직하게 으깨졌어도 그녀는 헤나를 향해 걸었다. 그녀가 태연하게 굴수록 많은 과일이 날아왔다. 토마토가 치마에 거무스름한 녹을 만들어도 엔젤라는 보폭을 시원스럽게 뽐낸다. 하지만 그녀가 여유를 간직할수록 축제무리는 끔찍한 욕설과 저주까지 뱉었다.
 
꽃은 다짐했다. 천벌을 내리자! 같잖은 변덕을 일삼는 어리석은 인간에게 당장이라도 벌을 주자! 눈에 보이는 족족 팔을 뽑자. 공평하게 다리도 뽑으면 되겠다. 헤나는 온몸을 딱딱한 가지로 바꾸고 제 줄기를 길게 늘어뜨려 이 근방에 까만 꽃을 피우기 직전이었다. 뒤집어쓴 망토 속이 더욱 까맣게 보였다.
 
단정한 얼굴은 꽃이 되고 꽃은 사랑을 낭독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또각또각. 헤나가 속 좁게 구는 동안 엔젤라가 이만큼 왔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보더니 엔젤라는 배에 손을 올리고 낄낄거린다. 실컷 웃어서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엔젤라는 호쾌하게 눈물을 닦았다.
"날 생각해 주는 건 너 하나밖에 없네." 칙칙하게 있지 말라며 그녀는 망토를 휙 벗겼다. 헤나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꽃이 멀뚱히 굴 때마다 손을 올린다. 엔젤라가 눌린 주황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흙이 그렇게 좋니?"
다 들켰다. 그녀가 전부 파악했다. 음흉한 식물은 대답을 헤매고 뻘뻘거렸다. 헤나가 어깨를 움츠리고 어물쩍 눈치를 봤다. 엔젤라는 헤나를 빤히 보다가 손바닥을 쫙 폈다. 망설이다 꽃은 엔젤라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따뜻한 체온을 즐기기도 전에 엔젤라가 휙 잡아당긴다. 땅과 가볍게 하나가 된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엔젤라는 제 품에 헤나를 꼭 껴안았다.
꽃은 엔젤라의 품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늑한 품을 위해 눈을 감았다. 시야가 가려지니 후각이 예민해졌다. 그녀에게서 과일향이 잔뜩 났다. 헤나는 줄곧 원하던 품에서 몽롱하다. 그냥 꽃은 이대로 있고 싶었다. 그때 주홍빛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엔젤라가 헤나의 귀에 입술을 댔다. 장난스레 귀에 바람을 훅 분다. 움찔하는 어깨에 엔젤라는 웃음이 은은하게 샜다. 
 
"언제까지 날 세워둘 셈이야?" 헤나는 수그렸던 무릎을 피고 땅에 붙어있는 맨발에 힘을 줬다. 이미 맨발은 뿌리처럼 변한 지 오래라 들어 올리니 땅까지 같이 들썩였다. 어쩔 줄 몰라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연두색 눈은 신뢰를 품었더라. 헤나는 다시 발을 올렸다. 제 뿌리를 하나하나 잘라냈다. 한 발이 자유를 되찾자 다른 발은 어렵지 않게 땅에서 벗어났다. 엔젤라와 같이 걷고 싶단 소원은 한결같았다.
 
그렇게 떼내기 어려웠던 뿌리였는데 꽃이 수줍게 웃었다. 엔젤라는 잘했다며 옆구리를 간지럼 태웠다. 둘은 주변을 잊고 오붓하다. 그래서 모두 샘이 났을까? 험악한 외침이 광장을 채울 만큼 점점 커졌다. 허공을 보던 가느스름한 눈길이 헤나를 향하더니 반짝거렸다.

"넌 오늘 처음으로 춤을 추는 거야." 그녀가 짓궂게 웃었다. 

그녀가 눈동자를 빛내니 마치 보석 같았다. 헤나는 노란 앞머리를 살짝 들췄다. 머리카락이 끈적였다. 짓뭉개진 사과가 피부에 눌어붙었고 끈적한 사과즙이 이마로 내려왔다. 온몸이 미움으로 얼룩져도 그녀는 환하게 빛났다. 피부끼리 달라붙는 불쾌한 감각을 무시한 채 엔젤라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가르쳐줄게." 꽃은 많은 재주를 가졌지만 춤춰본 적은 없다.
 
엔젤라가 양손을 붙잡고 헤나를 이끌었다. 그녀가 휘두르는 대로 꽃이 나부꼈다. 엔젤라는 무턱대고 깍지를 꼈고 다친 손바닥은 헤나만 신경 썼다. 흉터 위 하얀 손가락에 헤나는 사르르 녹았다. 옷자락이 펄럭거리자 곱게 접은 눈 틈으로 행복이 방울졌다. 허름한 옷은 당당한 주인과 걸맞게 구김살 없이 펄럭거렸다. 
 
엔젤라의 몸짓에 맞춰 천이 조야하게 나풀거린다. 바람에 흔들리는 천과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눈이 멀도록 아름답다. 빈틈없이 꼭 붙잡은 손은 따뜻하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광장을 소중히 채워갔다. 헤나는 활짝 웃었다. 까만 미소에 모두가 손가락질을 했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멀리서부터 코를 킁킁거렸다. 출처를 찾으려고 다들 고개를 돌리면서 애를 썼다. 인간이 술과 꽃을 구분 못하니 엉망이었다. 온몸이 향기에 잠식된 그들은 팔이 축 늘어지고 턱이 삐뚤어졌다.
 
둘은 원을 그리느라 바빴다. 누군가 길을 막으면 밀치고 마저 춤을 췄다. 넘어진 사람이 땅에 박혀도 둘은 몰랐다. 이 순간 세상에서 둘은 둘밖에 없었다. 달콤 쌉싸름한 향기가 축제를 집어삼켰다. 축제가 축제답지 못한 고요하고 신비로운 이곳에서 헤나와 엔젤라는 넓게, 더 넓게 발을 옮기고 발자국을 땅에 새겨 넣었다. 요령 없는 맨발소리와 또각거리며 딱딱한 밑창을 자랑하는 부츠가 어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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