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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3. 친구

by 넴 박 2024. 7. 28.

"고양이."
"이빨."
"빨강."
"강아지."

둘이서 끝말잇기를 했다. 헤나가 입이 익숙해지도록 선택한 방법이다. 놀이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최고지. 엔젤라는 제 잔머리에 히죽 웃었다. 꽃을 놀릴 기대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소녀가 어린아이처럼 굴자 헤나는 미소 지었다. 엔젤라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재롱에 꽃은 만족스럽다. 역시 인간을 흉내 내길 잘했다.
 
"지층."
"지층이 뭐야?"
"그게 뭐냐면..."

헤나가 팔을 베베 꼰다. 소녀에게 단어를 알려 줄 수 있다니. 꽃은 현실이 와닿지 않고, 엔젤라는 듣는 둥 마는 둥 꽃이 실수하길 기다렸다. 어눌한 말로 지식을 이으니까 내심 놀랬다. 지루한 대답이 길게 늘어지자 엔젤라는 하품이 나온다. 그만하라고 헤나의 코를 꼬집었다. 엔젤라가 예의를 빼먹어도 꽃은 실실 웃는다. 사무치게 기뻤으니까. 막 입을 만들었지만 헤나는 엔젤라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발음이 미숙할 뿐이지 꽃은 뇌 없이도 영특했다. 지금까지 읽어온 추도문이 많았다. 어려운 단어가 화려하게 들어간 휘황찬란한 문장도 익숙하다. 단어가 쌓여 문장이 되고 문장에는 뜻이 담긴다. 언어는 무척 강력한 힘을 가졌어. 마치 헤나에게 붙은 꼬리표같이.
 
"왜 이렇게 아는 게 많아?" 엔젤라에게 패배가 예고되자 멋대로 맥을 끊었다. 소녀는 생각나는 단어가 없지만 꽃은 느려도 이어갈 낱말을 떠올렸다.
"그만할래." 헤나는 눈앞에서 승리를 놓쳤어도 눈을 곱게 접었다. 단정한 미소에 엔젤라는 속이 간질거렸다. 침묵이 외로움과 손잡고 사라지니 심심하지 않다. 꽃이 소녀를 고독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헤나가 손가락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최선을 다할 일을 발견하자 엔젤라는 들뜬다.
 
"손 줘 봐." 가위바위보를 알려주기로 결정했다. 소녀가 마음먹은 대로 손을 붙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헤나에게 가위를 쥐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했을 뿐인데. 엔젤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꽃이 엉성하게 쥔 주먹을 억지로 폈다. 손바닥도 상처로 움푹 파였다. 손을 휙 뒤집었다. 어디든 멀쩡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시선이 벌벌 떨리면서 손끝부터 어깨까지 훑었다. 상처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렵다. 자그마한 손과 팔에 흉측한 난도질이 넘쳤다. 어깨에 그어진 선을 눈이 따라간다. 엔젤라는 숨을 꿀꺽 삼켰다. 어떡해. 목이 가장 심했다.

"앤지?"
엔젤라는 어느덧 괴물꽃을 친구로 삼았다. 앞으로 평생 누구든지 헤나를 괴롭히면 반드시 되갚아줄 거야. 소녀는 흉터가 안쓰러워서 깍지를 꼈다. 다음으로는 손바닥을 맞닿게 했다. 살이 매끄럽지 않더라. 헤나에게 새겨진 상처가 엔젤라를 괴롭힌다. 소녀로선 감당 못할 화가 온몸에 깃든다. 맺어진 깍지를 세게 쥐었다. 손톱이 흉터를 파고든다. 어리숙한 분노는 틀린 방향을 가리켰다.
 
"누가 이랬어?"
"몰라..." 손이 우겨져도 마주 잡은 온기가 따뜻하다. 헤나는 입을 무심코 벌렸다.
눈이 떼굴떼굴 굴러간다. 무덤에 뿌리를 내린 동안 꽃은 많은 사람을 목격했다. 죽은 자가 그리워 방문하는 이 외엔 올 필요가 없는 장소였지만, 방문자가 욕심이 그득한 눈빛을 가졌다면 나올 행동은 비슷했다. 대부분 헤나를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뾰족한 돌멩이 혹은 묵직한 쇠붙이로 죄 없는 꽃을 때렸다. 뿌리가 오죽 깊어 뽑히지 않으니 줄기라도 뜯어내려고 했다. 짐승을 부를 필요도 없이 전부 제풀에 지쳐 떠났지만 간혹 끈질기게 굴 때 헤나는.

"멍청이." 꽃이 무엇을 상상하는지 전혀 모른 채 소녀는 주홍색 머리카락을 순진하게 헝큰다.
 
"따라 해. 손가락을 두 개 피면 가위야." 조금이라도 덜 아프길 바라면서 엔젤라는 손가락을 살며시 폈다. 깊은 흉터를 지우고 싶어서 지문으로 피부를 쓸었다. 툭 튀어나온 곳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우습게도 엔젤라를 만나기 전부터 있던 상처였다. 어루만져봤자 사라지지 않는데 헤나는 피부가 깨끗해졌단 착각에 빠졌다. 진심이 스며든 덕분일까? 이깟 상처는 꽃에게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엔젤라가 다채로운 반응을 보여주기 전까지 흉터를 몰랐다. 소녀가 꽃을 가꿔주니까 헤나는 마냥 행복하다. 
 
 



 
인간을 따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헤나는 신이 났다. 끝말잇기는 지는 법이 없었고 엔젤라에게 가위바위보를 배웠다. 엔젤라가 꽃과 어울려준 만큼 수다도 익숙해졌다. 연이은 패배에 소녀는 치사하게 군다. 유치한 짓만 골라서 헤나를 골려댔다. 키득거리며 소녀는 웃었다. 승부에 무엇을 낼지 고민하는 꽃에게 주먹을 내면 승리를 주겠다고 꼬드긴다.

"정말?" 가위바위보. 헤나는 곧바로 주먹을 냈다.
"바보." 엔젤라가 보자기를 핀다.
 
패배가 확정되자 꽃은 드물게 심통이 났다. 적당히를 몰랐던 헤나는 이길 때까지 놀자고 졸랐다. 꽃은 소녀에게 애교스럽게 팔을 감싸고 얼굴은 어깨에 기댔다. 빨간 볼을 어깨에 마구 비볐다. 소녀와 닿으니까 정작 승부는 잊어버렸다. 엔젤라는 그만하라며 땋은 머리를 잡아당겼다. 고개가 뒤로 당겨져도 꽃은 입을 실실 쪼갰다. 헤나가 고집을 부릴수록 엔젤라는 행동에 짜증이 묻는다. 팔꿈치를 세워서 옆구리를 찔렀다. 꽃이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엔젤라는 바로 앞에서 주먹이 스치자 깜짝 놀랐다. 주먹을 이쪽에 대지 말라며 소녀가 어깨를 밀었다. 힘이 가는 대로 헤나는 휘청거렸다. 흉측한 뿌리를 가진 주제에 왜 이렇게 매가리 없이 구냐고 소녀가 조롱한다.

둘은 즐거움에 푹 빠져 거리를 미처 따지지 못했다. 엔젤라는 상대에게 장난치고 놀리느라 바빴다. 식물은 엔젤라가 좋았다. 터질 듯 꿀렁거리는 존재감을 잊을 정도로 엔젤라에게 푹 빠졌다. 꽃이 불안정한 뿌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소녀에게 애정을 표출한다. 당신밖에 모르는 바보처럼 소녀를 오롯이 바라봤다. 헤나가 낯 부끄럽게 얼굴을 코앞까지 가져온다.

"저리 가." 엔젤라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눈앞에서 밀었다. 평소에는 져 주면서 오늘따라 버티는 헤나가 거슬린다. 떨어지라며 투닥거렸다. 여전히 끈질기게 붙으니까 어깨를 확 밀었다. 소녀를 막지 못하고 꽃은 그대로 넘어졌다. 처참하게 온몸이 깨지는 그때까지도 헤나는 환하게 웃었다. 펑 터져버리는 소리와 함께 엔젤라의 눈앞에 살점과 나뭇가지, 잎사귀들이 나부꼈다. 엔젤라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미안해, 미안해!"
 
괴물꽃은 겉만 인간이었지 속은 규칙이 없었다. 가까스로 알아본 건 덩굴뿐이었다. 덩굴은 살점과 얽히고 흙과 버무려졌다. 소녀가 무릎 꿇고 조각난 헤나를 고치려고 했다. 흙은 부드럽지만 무릎에 상처를 줬다. 엔젤라는 무릎이 긁힌 줄도 몰랐다. 듣지 못하는 사과를 반복하며 눈물만 자아냈다. 조각난 신체를 손으로 떴다. 깨진 파편이 손바닥에서 흐물거리다가 금세 녹아버린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살점을 한 곳으로 모으려고 했다. 친구가 전혀 잡히지 않으니까 엔젤라는 조급하다. 손은 흙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피가 잔뜩 묻어 더러워졌다. 썩은 내가 코를 찌른다. 엔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조각난 살결을 짝 맞추려고 애를 썼다.
 
친구가 돌아오지 않는다. 엔젤라는 히끅거려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알아볼 수 없는 조각을 맞추려고 한 데 모았다.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면서 손을 움직였다. 무엇이 무엇인지 엔젤라는 도무지 모르겠다. 좌절감에 손길이 어수선하다. 터진 살점 사이에 손가락이 보였다. 안쓰러운 흉터투성이 손이 이토록 반갑다니. 엔젤라는 발견한 그 손을 쭉 잡아당겼다. 끝에 헤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지만 꽃은 팔꿈치 위로 존재하지 않더라. 엔젤라는 눈물이 펑펑 났다. 유일하게 알아본 손을 품에 넣고 몸을 숙였다. 작은 등은 유난히 축축했다.

괴물꽃은 튼튼하지 않았다. 엔젤라는 제 손짓에 박살 난 친구를 벗어나기 버거웠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똑같은 장면이 재생됐다.

조각난 살점이 꿈틀거렸다. 엔젤라는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안고 있던 팔을 더욱 감쌌다. 간절한 손길이 통한 걸까. 살점을 한 곳에 모아둔 덕분일까. 경계를 허물고 살점끼리 서로 붙었다. 엔젤라는 살점이 꿀렁거리며 헤나가 될 거란 생각에 제 품에 있던 팔을 살점에 돌려줬다. 제 조각이 닿자 살점은 반갑게 일부를 삼켰다. 모든 조각이 합쳐지니 알과 비슷한 동그란 형태가 되었다. 엔젤라는 정체불명인 그것에 손을 댔다. 알 수 없어도 방금까지 제 친구였기에 손길에 두려움 따위 없었다. 만졌더니 손에 피가 축축하게 묻었다. 왠지 모를 작은 울림이 느껴져서 빨리 헤나가 태어나길 바랐다. 알처럼 생겼으니 여기서 껍질이 반으로 갈라질 거야. 반드시 알에서 헤나가 나올 거야. 엔젤라는 간절히 믿었다. 탄생의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알 앞에서 엔젤라는 무릎을 껴안고 바라봤다. 멀뚱멀뚱 눈만 깜빡였다. 반면 무심하게 시간은 흘렀다. 소녀는 다리가 저려서 자세를 풀었다. 목을 돌리다 하늘을 살짝 올려다봤다. 해와 달이 공존하는데 아직까지 친구가 돌아오지 않았다. 엔젤라는 코가 시큰해졌다.

알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병아리가 세상을 열망하듯 안에서 바깥을 쭉 밀더라. 겉 가죽이 길게 늘어졌다. 엔젤라는 입이 쩍 벌어졌다. 울퉁불퉁한 살점이 크게 꿀렁거리니까 역겨웠지만 소녀는 친구가 보고 싶었다. 벌떡 일어났다. 발을 삐끗했어도 서둘러 후다닥 알에 다가갔다. 역겨운 달걀이 붉게 꿀렁거린다. 엔젤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소녀가 용기를 내서 덩달아 손톱으로 겉을 마구 긁었다. 제발 뜯어지라는 마음을 담아 살점을 긁어댔다. 헤나가 알을 벗어나기를! 손톱에 피가 꼈다. 보잘것없는 손길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껍질이 퍽 하고 찢어졌다. 엔젤라의 눈 옆으로 피가 튀었다. 피를 닦아낼 생각은 못했다. 갈라진 틈에서 익숙한 팔이 보였으니까.

흉내가 서툰 헤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고요 속에서 처음부터 다시 빚어냈다. 인간의 몸은 복잡하다면서 꽃이 난색을 표했다. 벌써 어두워졌는데 엔젤라가 어디 있을까. 순애뿐인 헤나는 걱정부터 들었다. 소녀가 꽃을 망가뜨렸어도 원망 따위 하나도 없었다. 그저 소녀가 어딨는지 눈을 굴리던 참 빨간 피를 뒤집어쓴 엔젤라가 눈앞에 보였다. 헤나는 제 꼴도 잊고 엔젤라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손아귀에 실린 힘이 무지하게 세서 소녀는 눈을 찌푸렸다.

"안 다쳤어. 그냥 네 피를 뒤집어썼을 뿐이야."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려고 했지만 꽃이 협조하지 않았다.

꽃은 몸을 재구성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눈을 뜨자마자 소녀를 봐서 반가웠다. 하지만 엔젤라의 두 눈이 엉망으로 부었다. 온통 빨갛다. 꽃도 소녀도 주변도 전부 새빨갛다. 헤나는 엔젤라에게 손을 올린다. 흉터투성이가 뺨에 닿자마자 엔젤라가 손길을 험악하게 쳐냈다.
 
"왜 울었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꽃은 조심스레 물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엔젤라는 얼굴을 벅벅 닦았다. 눈물 따위 없었다는 듯 화를 냈다. 인간을 흉내 내었던 꽃은 쉽게 찢어지는 연약한 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따라오던지." 매정하게 엔젤라가 손을 흔들다가 해를 확인했다. 얼른 다녀오겠다며 식물을 둔 채 혼자 마을로 향했다.

다리가 없다고 놀림받기를 수십 번째니 헤나는 뿌리에서 자신을 따로 떼어낼 계획을 세웠다. 소원이 많던 꽃은 다리 만드는 연습을 시작했다. 버릇없이 식물주제에 흙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태생이 태생이라 뜻대로 진행되지 않더라.
 
두꺼운 뿌리를 쪼개서 그 안에서 다리를 꺼낸다면 얼마나 사무칠까. 헤나는 빈약한 상상이 이뤄지길 바랐다. 툭 튀어나온 힘줄을 빤히 보다가 연약해 보이는 곳을 뜯었다. 그렇게 제 뿌리에 온존치 못한 구멍이 났다. 못생긴 원이 뻐끔거리니까 마치 입처럼 보였다. 자연스레 입을 만들던 때를 기억하면서 주름을 자꾸만 오므렸다가 폈다. 어둡고 축축한 내부에 빨갛게 다리를 꿈틀꿈틀 빚어냈다. 꽃은 엔젤라를 떠올렸다. 헤나는 절실했다. 나란히 소녀와 걷고 싶었다. 포기하지 않고 엔젤라 몰래, 몰래몰래 조금씩 다리를 연습했다. 팔과 다르게 다리는 좀처럼 자라나지 않더라. 공허한 눈에 밤하늘이 파랗게 비쳤다. 반짝이는 하얀 별이 안광을 대신했다. 벌써 엔젤라가 돌아올 시간이 됐다.

투명스럽게 굴어도 엔젤라는 헤나가 머무는 공동묘지로 돌아왔다. 아닌 척해봤자 모진 세상에서 홀로 지내기란 고달프잖아. 엔젤라가 묘지에 도착하면 습관이 먼저 돋보인다. 무덤 앞에서 차가운 비석을 살살 매만지며 가꾼다. 가끔은 비석에 새겨진 문구를 엔젤라가 손가락으로 뭉갰다. 그럴 때 유독 뒷모습이 베일 듯 슬펐다.
 
"앤지..." 평소와 달리 귀가가 늦는 엔젤라에 헤나는 절절맸다. 공동묘지에 뿌리 박힌 제 처지가 한심했다. 배웅도 못할뿐더러 이동조차 할 수 없다니. 자학이 끝이 없지만 괜찮다고 억지로 내뱉었다. 헤나는 잠을 자지 않으니까 얼마든지 기다려도 괜찮다. 멍하니 하늘을 봤다. 별이 예쁘게 빛났다. 별끼리 이어보다가 별자리가 생각나더라. 엔젤라는 별자리를 알까? 무엇을 해도 전부 엔젤라로 마무리된다. 소녀가 이곳에 온다면 같이 하늘을 올려다봐야지. 가지런하게 수놓아진 별자리를 짚고 손가락으로 따라 그려야지. 
 
달빛이 서늘해질 무렵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익숙한 발걸음이 들렸다. 바라던 발자국에 낯선 음이 섞이자 헤나는 조금 긴장했다. 찰나가 너무나도 길다. 헤나는 달달 떨리는 턱을 애써 무시하고 잠자코 기다렸다. 흐릿하게 비친 모습에 안도가 한숨으로 새려던 때에.
 
아, 헤나는 인간이 이토록 쉽게 다치는 존재임을 이제야 알았다. 너무 늦게 깨달았다. 엔젤라는 항상 빛이 나고 당당한 존재였는데 공동묘지에 발을 들인 지금은 피와 멍으로 얼룩덜룩하다. 한쪽 눈은 너무 부어서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헤나는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눈물을 흩뿌렸다. 시뻘건 힘줄이 불끈거리다 터졌다. 정체 모를 살점 사이에서 다리는 하얗게 보였지만, 뿌리에서 자라난 핏줄이 헤나가 독립하기를 원치 않듯 허벅지에 깊게 파고들었다. 하나처럼 둘은 합쳐진 상태였다. 제 일부임에도 헤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군다. 뿌리가 더럽게 질척 맞다. 꽃이 갓 태어난 다리에 힘을 줬다.
 
끈적한 살점이 터졌다.

그대로 헤나는 얼굴이 땅에 처박혔다. 팔꿈치로 땅을 짚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소녀가 보였다. 꽃은 엔젤라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구멍 난 허벅지에서 까만 체액을 줄줄 뱉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억지로 떼어낸 다리는 무심했다. 만들고자 처절하게 노력했던 다리가 이 순간에도 헤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겨우 흙에서 벗어났지만 꽃은 걸을 줄 모른다. 헤나는 엉엉 울면서 엔젤라에게 기어갔다. 깨끗하고 단정했던 수의가 흙으로 축축하게 물든다. 제 모습이 어떤 꼴불견이어도 상관없다. 엔젤라가 상처 입었으니 당장 달래주고 안아주고 싶다. 간절히 엔젤라에게 닿고자 노력했다. 헤나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끔찍하게 좌절했다.

소녀의 눈앞에서 살점이 뒤죽박죽 뭉개졌다. 뿌리였던 시뻘건 구멍에서 꿀렁 피를 내뿜었다. 흙은 넘실거리는 핏물을 삼켜 배불렀다. 형언할 수 없는 공간에서 헤나가 손바닥으로 흙을 뭉갰다. 흙을 쥐고 엔젤라에게 기어 온다. 꽉 쥔 손아귀에서 피로 뭉쳐진 흙이 추적하게 새어 나오더라. 헤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핏빛 지옥을 붙잡았다. 꽃이 새빨갰다. 정말이지 역겹고 징그러운 괴물꽃.

"어떡해, 어떡해... 예쁜 앤지 얼굴이..."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헤나.

자그맣게 피어난 감정은 소녀를 무덤덤하게 만들었다. 엔젤라는 부어버린 눈을 무시한 채 히죽 웃었다.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울먹거리는 저 멍청한 식물에게 절뚝거리며 다가갔다.
 
"이제 내 마음을 알겠니?" 엔젤라는 헤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은 헤나에게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헤나는 눈물이 핑 돈다. 손에 얼룩덜룩한 멍이 지독했다. 손을 붙잡으면 틀림없이 아플 텐데. 헤나는 고민했지만 혼자 일어날 줄 모른다. 꽃은 갈등하다 엔젤라의 손을 붙잡고 덜덜 떨리는 다리로 땅을 딛고 섰다. 자세가 형편없어도 엔젤라는 비웃지 않았다. 헤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땅을 짓밟았어도 기뻐하지 못했다. 그저 엔젤라의 망가진 옷가지를 손으로 쥐고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치고 잘 만들었네."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다쳤어......"  
 
엔젤라는 하얀 옷이 넝마가 될 정도로 엉망진창인 건 너인데 누가 누굴 걱정하냐는 생각부터 든다. 엔젤라밖에 모르는 저 미련한 꽃을 어쩌면 좋을까. 주룩주룩 눈에서 체액을 뽑아내는 저 꽃은 얼핏 사람보다 더욱 사람 같아서 무심코 속아버릴지도 모른다.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존재여도 늘 제 생각만을 해주는 모자란 식물이다. 꽃의 순수한 눈물에 엔젤라는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생산력 없는 고아가 마을에서 보잘것없는 짐짝 취급을 받아도 이곳에 오면 엔젤라를 하염없이 아껴주는 존재가 있다. 그 사실이 엔젤라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지 헤나는 알까. 
 
"울보." 나중에 마을을 구경시켜 준다면서 엔젤라는 헤나의 눅눅한 눈가를 닦았다.
 
"헤나, 첫걸음마 떼야지."
"방금 만들었잖아..."
"됐고 이리로 와."  
 
네가 걷는다면 팔을 벌리고 품을 내어 줄게. 엔젤라는 헤나를 꼬시는 법을 안다. 단번에 꽃은 의욕이 불탈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약속을 꼭 지키니까. 엄청난 유혹에 헤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걸음씩 발을 뗀다. 짓궂은 엔젤라는 헤나가 한 걸음을 조잡스럽게 뗄 때마다 뒤로 물러났다. 헤나는 얄미운 마음에 툴툴거렸고 엔젤라는 아픔도 잊고 명랑하다. 공동묘지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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