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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2. 엔젤라

by 넴 박 2024. 7. 28.

소녀가 비밀기지로 삼은 무덤은 둘이서 노는 놀이터가 됐다. 이곳 만이라면 꽃은 어디로든 몸을 빼꼼 내밀었다. 땅으로 스며들어서 땅에서 솟는 모습은 역겨웠지만 엔젤라는 괜찮은 척 허세를 떨었다. 소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휙 돌렸다. 헤나는 부들거리는 손을 모른 척 소녀에게 눈을 접었다.

손수 만든 무덤 앞에서 둘은 납작하게 앉았다. 마주 보고 손장난을 쳤다. 엔젤라는 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봤다. 온몸에 진흙이 묻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참 대단하다.
 
"너는 찝찝하지도 않냐?" 엔젤라가 헤나의 어깨에 묻은 흙을 털었다. 
꽃 옆으로 덩달아 소녀는 엉덩이를 붙였다. 축축한 흙에서 태어났으니 머리카락은 잔뜩 더러웠다. 시간이 지나 말라버리자 머리카락이 더욱 푸석해 보였다. 깔끔하지 못한 모습에 소녀가 눈을 찌푸렸다.

"예쁜 머리카락을 가져서 뭐 해." 주홍빛 머리카락을 손바닥에 올렸다. 너저분한 머리카락을 소녀가 정돈해 주겠다며 소매를 걷어올렸다. 힘줄처럼 툭 튀어나온 뿌리는 봐도 봐도 징그럽지만 일단 몸을 낮춰보라고 시켰다.

"입 언제 만들 거야?"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어도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손가락은 부지런히 주홍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았다. 엔젤라의 손끝에서 머리가 곱게 땋아지고 작은 손이 꼬물꼬물 머리카락을 살풋 매만진다. 그러다 엔젤라가 엉킨 머리카락을 풀어주려 애쓰자 꽃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리카락에 진흙까지 묻어서 도통 달라붙은 덩어리가 풀리지 않았다. 엔젤라는 손톱으로 진흙을 살살 긁었다. 더럽다고 소녀는 깔깔 비웃었다. 헤나가 부끄러운 만큼 땅에 머리카락이 조금씩 빠진다.
 
"조금만 참아 봐..." 집중하느라 말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사소한 변화마저 사랑스럽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린아이가 아무리 잡아당겨도 하나도 안 아파. 대답을 돌려주지 못해서 대신 헤나는 얌전히 협조했다. 뒤에서 들리는 끙끙거리는 소리가 귀엽다. 전부 오밀조밀 예뻐죽겠다. 헤나는 더더욱 입이 욕심났다. 칭찬을 어서 들려주고 싶다. 솔직한 감상을 직접 전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얀 손 끝에서 주홍색 실이 바닥에 몇 가닥 더 떨어졌다.

"머리카락 진짜 더럽네." 말과 다르게 엔젤라는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갈수록 요령이 생겨 손길이 섬세해진다. 불만투성이어도 소녀는 방해되는 흙을 성실히 떼어냈다. 손톱에 새까만 흙이 껴도 멈추지 않았다. 곧 있으면 목표를 달성한다며 엔젤라는 의욕을 불태웠다. 주홍빛 머리카락에서 점점 흙이 사라져 간다. 소녀가 공들인 시간 동안 실이 바닥에 색을 펼쳤다. 뒤를 보라며 소녀가 어깨를 쿡쿡 찔렀다. 헤나가 고개를 돌리자 조금은 깔끔해진 얼굴이 보였다. 파란 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보니 보람찼다. 사실 손해가 살짝 컸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에 엔젤라는 저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그 소리에 헤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엔젤라는 말 못 하는 꽃이 제 입을 빤히 쳐다보자 다시 휘파람을 휙 불었다. 깜짝 놀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바보!" 휘파람이 뭐라고 그렇게 신기해. 예상 못한 반응에 엔젤라는 웃음이 샜다. 너무너무 즐거워서 눈앞에 보이는 등을 때리면서 까르르 웃었다. 엔젤라는 말랑한 볼을 손가락으로 찌른다. 꽃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소녀가 해맑으니 마냥 좋다. 
 
 



 
예쁘게 땋은 머리에 꽃은 뭉클했다. 땋은 머리가 고갯짓을 따라오니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유 없이 고개를 돌리는 모양이 괴팍해 엔젤라는 딴지를 건다. 앞으로도 혼자 중얼거려야 되냐고 불평한다. 소녀의 거친 입담에 식물이 눈치 본다. 엔젤라는 간단히 눈길을 무시한 채 허공을 향했다. 좋은 생각이 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전설처럼 네가 집어삼킨 시체를 따라 하는 건 어때?"

엔젤라가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가 좋은지 헤나는 눈을 곱게 접는다. 순종하며 끄덕거렸다. 꽃이 제대로 이해했는지 엔젤라는 의문이 들지만 기다릴 수밖에 없어서. 모든 의욕이 픽 빠진 엔젤라는 대놓고 한숨이 나왔다. 몸을 휙 돌리고 팔짱을 꼈다. 잘해보라는 말과는 반대로 뒷모습으로 맥 빠지게 굴었다. 기대 따위 없는 듯 무심하게 행동해도 몰래 쳐다보는 눈빛이 톡톡 쏜다. 소녀가 아기자기하게 움직일수록 꽃은 부르르 떨렸다. 꽃이 작은 뒤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얀 손짓이 탐스럽고 새침한 눈매가 귀엽다.
 
부모가 영원히 잠든 흙 위에서 철든 척 굴어봤자 어차피 소녀였구나. 꽃은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엔젤라와 가까워지면서 꽃은 어두운 내면이 끝없는 허공이 될 만큼 넓어졌다. 식물한테 위장은 존재하지 않지만 헤나는 모든 걸 삼킬 수 있다고 자만했다. 꽃은 소녀가 갖고 싶다. 어떻게 해야 제 안으로 품을 수 있을까? 파란 눈이 탐욕으로 뒤덮이기 전 엔젤라가 등을 세게 때렸다. 꽃이 가만히 있으니까 참을 수 없다. 엔젤라는 얼른 입을 만드라며 등을 퍽퍽 때린다. 뿌리가 땅에 붙잡혔기에 헤나는 힘이 실린 방향대로 기우뚱했다.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도 소녀는 끄덕 없었다.
"어쩌라고?" 헤나는 한 대 더 맞았다.

꽃은 눈썹을 축 내렸다. 제 뜻을 전달을 못하니 답답했다. 서두르자. 소녀와 언어를 주고받고 싶으니까. 소통에 굶주린 꽃은 인간의 형태에 완벽하도록 집착했다. 얼굴을 가꿨던 그때처럼 집중했다. 입술을 만들었지만 벌렸더니 피부로 꽉 막혔다. 엔젤라는 상식을 벗어난 외양에 정신이 얼얼했다. 기괴한 변화가 계속됐다. 열심히 해도 성과가 없었다. 꽃은 입 안을 만들기가 어려웠는지 헤나는 계속 입술만 형성했다. 발치에 탈락한 입술조각이 한아름 쌓였다. 흐린 눈으로 보면 꽃잎처럼 보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시도해 보지만 택도 없었다. 소녀는 속이 메스꺼웠다. 
 
많은 노력에도 서투른 헤나가 입을 만들지 못했다. 엔젤라는 헤나의 손을 끌어 제 얼굴 이곳저곳을 만지게 했다. 손가락은 차례로 눈, 코 그리고 입을 만졌다. 여전히 부족했는지 엔젤라는 헤나의 손을 붙잡아 제 입술을 쓸게 했다. 엔젤라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제 입술을 살짝 벌려 헤나의 손가락 끝을 도톰하게 문다. 반응이 없어서 이를 세워 깨물었다.
 
"널 괴물이라고 부르기 싫어." 엔젤라는 외로움을 담아 손을 다시 깨문다.
 
손길에 집중한 나머지 엔젤라는 헤나를 보지 못했다. 식물이 식물답게 구니까 어색하다. 미동조차 없으니 뒤늦게 꽃을 살핀다. 넋이 나간 저 바보는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엔젤라는 홧김에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움찔하는 손이 안쓰러워도 전부 헤나 탓이었다. 내 이빨 자국은 쟤 손가락에 흔적도 못 남길 거야. 소녀가 자비롭게 손길을 이끈다. 꽃이 입 안까지 손가락을 넣지 않으려고 하길래 직접 손을 붙잡고 밀었다. 이빨부터 혓바닥까지 지문으로 쓸도록 꾹 눌렀다. 따뜻한 습기에 헤나는 얼빠졌다. 특히 손가락에 혀가 닿았을 때 정신이 나가는 줄 알았다. 꽃이 혼란에 깊숙하게 빠져도 엔젤라는 손가락을 매만진다. 

"네가 원했던 입을 손수 느껴봐. 안은 동굴처럼 촉촉한 공간이 있고 종유석 같은 이빨도 자라났지." 엔젤라가 이끄는 대로 손을 내버려 뒀더니 손가락이 목구멍을 찔렀다. 토할 듯 엔젤라가 헛구역질을 하자 헤나는 급하게 손가락을 뺀다. 엔젤라는 연신 기침했다. 방금 경고했는데 제 말을 어디로 들은 거냐고 소녀가 콜록콜록 화를 냈다. 처음처럼 헤나에게 눈물이 고였다. 꽃은 사과를 돌려주지는 못해도 미안한 기색이 가득 찼다.

"너와 달리 사람은 입으로 숨 쉬거든?" 엔젤라는 헤나를 째려보다가 공연스레 변명을 덧붙인다.
 
엔젤라가 얼마나 간절한지 꽃이 안다면 좋을 텐데. 적막은 지긋지긋하다. 비석에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바라고 식물한테 말을 건네다니. 제 꼴이 우스워 엔젤라는 뾰로통하다.

시끄럽게 떠들던 소녀가 침묵을 길게 유지하자 헤나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 해법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서 덜 만들어진 뇌를 탓했다. 인체를 막 흉내 냈기에 꽃은 미숙했다. 축 쳐진 모습을 보니 포기해선 안 된다. 몸속에 거짓밖에 없지만, 슬픔을 쫓아낼 방안을 찾으려고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우연히 비석에 적힌 문구가 보여서 저도 모르게 추도문을 읽었다. 글자가 있었지! 자연스러운 흐름에 꽃은 땅에 바싹 엎드렸다. 자고로 손이란 섬세한 기관이다.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보다 새끼손가락부터 접었다. 엄지까지 말아지자 동그란 주먹이 완성됐다. 헤나는 두 번째 손가락만 펴도록 집중했다. 느려도 해냈다. 꼿꼿하게 펴진 검지 손가락으로 흙을 살살 긁었다.
 
"뭐 해?" 꽃이 땅에 머리를 박으니까 엔젤라는 식물이 미친 줄 알았다. 소녀가 불러도 꽃은 아래만 쳐다봤다. 땅에 연결된 뿌리가 헤나를 따라 철퍽 내려앉는다. 식물이 쉬지 않고 꼼지락거리니 뿌리가 같이 꿈틀대도 소녀는 애써 무시했다. 호기심쟁이 엔젤라가 옆에 나란히 무릎을 접었다. 헤나의 손끝을 조용히 지켜봤다. 긴 선이 세로로 그어지고 짧은 선이 중앙을 잇는다. 잘 보니 알파벳이었다. H가 끝나고 a가 만들어진다. 엔젤라는 기대감에 미소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헤나가 삐뚤삐뚤한 글자를 끝까지 적었다. 
 
"헤나!" 엔젤라는 완성된 글자를 크게 읽고 헤나를 껴안았다. 해맑은 웃음이 헤나의 귓가를 울린다. 엔젤라가 또 반짝거린다. 무엇이 그렇게 기쁠까? 헤나는 곰곰이 생각하지만 곧 그만두고 따라 웃었다. 비록 훔친 이름이었지만 가짜는 진짜로 의미가 바뀌었다.
 
볼끼리 닿으니 떨어지기 싫었다. 헤나는 빨리 입을 만들고 싶다. 
 
 




괴물꽃은 외양만 사람처럼 꾸밀 줄 알지. 행동은 어수룩하고 어딘가 이상해서 조금만 신경 써도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헤나는.

입을 만든다면 소녀가 이름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애와 대화하고 싶었던 바보 같은 꽃은 미련하지만 대단했다. 엔젤라가 마을로 간 사이에 헤나는 공동묘지를 헤집었다. 당장이라도 엔젤라가 하사할 보상을 받고 싶어서 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볼 수 없는 지하를 엉망으로 만드는 표독스러운 행태에 죽은 자가 안위를 지키지 못한다. 헤나가 어떤 끔찍한 짓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엔젤라에게 칭찬받기 위해 헤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목구멍이 없다. 입술이 빠졌다. 이빨이 가지런하지 않다. 혀가 튀어나올 정도로 길다. 많은 실패작이 지나갔다. 헤나는 멀쩡한 입이 나올 때까지 떼어내고 다시 만들었다. 뿌리 근처에 생성되다 만 피부조각이 쌓인다. 씨앗처럼 이빨이 흙에 우수수하게 뿌려졌고 더러운 까만 피가 하얀 이빨 위로 떨어졌다. 추잡한 자국에 꽃은 바닥을 깨끗하게 치웠다.
 
많은 흔적을 평평하게 묻은 뒤에야 선보일 입을 벌렸다. 입술, 이빨, 목구멍, 혀. 전부 예쁘게 빚어냈다. 하지만 까맣다. 노력이 무색하게 입안은 이상하도록 새까맸다. 빛이라곤 전혀 없는 짙은 어둠뿐이어도 드디어 해냈다.
 
입을 연습하면서 요령이 생겼다. 헤나는 성대부터 소화기관 그리고 생식기까지 빠짐없이 인간을 따라 했다. 공동묘지에 파묻힌 시체를 배불리 흡수하고 인간의 몸을 욕심내서 해부한 결과물을 마침내 손에 넣었다. 열띤 공부가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도. 비정상에 가까운 집착이 꽃을 도왔는지는 몰라도.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엔젤라에게 홀딱 반했다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헤나에게 입이 생기자 엔젤라는 노을을 등에 이고 호들갑을 떨었다. 방방 뛰다가 인사를 시켜보고 이것저것 말을 쏟아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요구가 휘몰아치자 헤나는 정신 차리기도 벅찼다. 외로움이 짙었던 엔젤라는 대화상대가 생겨 어떤 이야기부터 고를지 기대에 찬 보류를 잔뜩 만들었다. 이래나 저래나 헤나는 딱 하나만 원했다. 헤나가 엔젤라의 해진 옷소매를 잡았다. 쑥스러움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지만 뜻은 충분히 전달됐다.

"엔젤라." 헤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내 이름 알고 싶다며?"


꽃이 활짝 폈다. 엔젤라는 왠지 모르게 미소가 새까맣다고 느꼈다. 의문에 빠지기 전에 꽃이 끙끙거리니 소녀가 도와줘야만 했다. 들뜬 헤나는 곧장 이름을 따라 하지만 발음이 어설프다. 엔젤라가 그게 뭐냐고 실실 쪼갰다. 놀리는 듯 뭉개진 발음이어도 엔젤라는 그 행동에 악의가 섞이지 않았음을 안다. 오히려 꾸밈없어서 귀여운 아기 같다. 꽃이 순수하게 굴수록 엔젤라는 자상해졌다. 지치지도 않고 오밀조밀한 입이 이름을 반복하도록 도와줬다. 엔젤라는 헤나의 볼을 붙잡고 제게로 끌었다. 눈앞에서 꽃이 눈을 깜빡인다. 엔젤라는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헤나에게 따라 하라며 눈치를 줬다. 헤나는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꽃이 만든 입 안에 하얀 이빨이 가지런했다.
 
"어?" 새까만 구멍에 엔젤라는 시선을 멈췄다.
 
역시 잘못 보지 않았다. 전설 속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인간을 흉내 낸 괴물꽃을 구분하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자기 전에 들었던 결말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용사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갈망이 매우 컸다. 평범한 마을에서 괴물꽃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화되었다. 겉모습을 완벽하게 친구, 연인, 사랑하는 가족으로 바꿨어도 해결책이 존재할 거라고 용사는 믿었다. 어수룩한 꽃 하나가 꼬리를 밟혀 용사가 무찔렀다. 꽃을 반으로 가르자......
 
엔젤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루한 이야기에 빠질 생각은 아니었다. 다행히 핵심을 떠올렸다. 소녀는 팔짱을 끼는 척 피부를 어루만졌다. 닭살이 오돌토돌 튀어나왔다. 추워일지 공포일지 정답은 엔젤라만이 안다. 여전히 축 처진 눈으로 오매불망 저를 바라보니 엔젤라는 뭉클했다. 친구를 도와주고 싶은 착한 마음이 용기를 줬다. 그깟 입이 뭐가 중요해. 당장은 헤나와 대화하고 싶어. 식물이 뻐끔거리기만 하니 엔젤라는 손가락을 그 안에 넣어 혀를 확 잡아당겼다.  
 
벌써 해가 떨어지는데 뜻대로 발음되지 않는다. 소녀가 제대로 해보라며 보챈다. 엔젤라가 혀를 마구 잡아당겨도 헤나는 싫지 않았다. 그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이 답답했다. 꽃은 눈이 촉촉해진다. 어쩔 수 없지. 엔젤라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선택지를 낯간지럽게 골랐다. 소녀는 신발 앞코로 땅을 툭 긁었다.

"집에서만 부르던 이름이 있었어." 대수롭지 않게 슬픈 이야기를 꺼낸다.
"네가 그렇게 불러주면 되겠다." 헤나는 끄덕였다.

"앤지. 따라 해 봐." 헤나는 입을 빤히 쳐다보며 똑같이 입술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잘 안되니까 앤젤라가 다시 도와준다. "또 입술만 흉내 내기는. 혀가 왜 있게?" 짓궂게 놀리지만 헤나를 위해 최대한 선생노릇을 했다. 전처럼 손을 끌고 와 제 입안을 만지도록 허락했다. 손가락에 혀가 닿는 미지근한 기운에 헤나는 녹아내린다. 집중하라고 따끔히 혼난 뒤에야 혀를 느꼈다. 축축한 살덩어리가 손가락을 감쌌다. 헤나는 손가락이 침범벅이 되어도 빼기 싫었다. 영원히 이 아찔한 감각을 결코 잊지 못할 거다. 꽃이 여러 번 정신을 놓자 엔젤라는 뺨을 꼬집고 옆구리를 찔렀다. 겨우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배웠다. 엔젤라의 입에 손가락을 넣은 채 이름을 되뇐다.

"애, 앤지..." 덜덜 떨리는 발음이어도 괜찮다.
"더." 엔젤라가 요구한다.
"앤지..."
"잘했어." 엔젤라는 씩 웃고 주홍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우정은 기적을 낳았다. 꽃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엔젤라의 이름이었다. 발음이 턱없이 모자랐기에 친구가 도와줬다. 

"앤지, 앤지." 그 이름은 헤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자 가장 아끼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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