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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20. 헤나(2)

by 넴 박 2024. 7. 29.

엔젤라가 마침내 결말에 도착했다. 그녀는 몸을 틀어 꽃을 껴안았고, 허리에 얼굴을 뭉개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하나뿐인 친구가 존재했다. 엔젤라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꿈에서도 닳을까 무서워 친구를 부르지 못했다. 그녀는 친구를 만지고 싶었다. 말랑거리는 볼을 직접 손으로 느끼고 싶었다.

애석하게도 하얀 손이 말을 듣지 않더라. 단정한 얼굴을 향해 손가락이 올라가다가도 다시 내려오더라. 엔젤라는 친구를 제대로 만끽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친구를 막상 만났어도 떨리는 손이 너무나도 분했고 비참했다. 엔젤라가 지독한 자학에 빠지기 직전 헤나가 떨어지는 손을 붙잡았다. 하얀 손을 조심히 이끌어 제 볼에 댔다.

 

"앤지, 앤지." 꽃은 엔젤라가 저를 가꿔주니 저절로 미소가 샜다. 배시시 웃는 얼굴이 앞에 있었다.
"헤나!" 엔젤라는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

 

눈앞의 존재를 믿을 수 없어서 볼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만져도 헤나가 그대로였다. 얼굴을 꽉 눌러도 꽃이 헤벌쭉 웃었다. 그리웠던 미소가 반가워 엔젤라는 팔을 뻗어 목을 껴안았다. 하얀 손이 주홍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흙이 날릴 수도 있다고 친구가 꿍얼거린다. 그깟 먼지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 엔젤라가 온몸을 헤나에게 기댔다. 둘이 꼭 달라붙으니 품에서 온기가 자라났다. 이제 둘은 혼자가 아니었다.

엔젤라가 손아귀에 힘을 줬다. 주홍색 실이 바닥으로 몇 가닥 떨어졌다. 터지는 울음을 참으려 그녀가 애를 쓴다. 헤나는 울어도 괜찮다는 양 등을 자상하게 쓸어내리지만, 엔젤라가 고집이 셌다. 숨을 제대로 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온몸이 들썩였다.
 
하나뿐인 내 친구. 어수룩하고 착한 나의 꽃. 나의 헤나!
 
"나 너무 늦게 왔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축축하다.
"아니야 멀리서부터 걸어왔잖아." 외로움을 싫어하는 그녀가 저를 위해 이곳까지 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겨우 얼굴을 떼고 엔젤라가 헤나를 보았다.

마주한 연두색 눈은 생기로 가득 찼더라. 헤나는 입꼬리가 풀어졌다. 사모하는 당신은 약속을 꼭 지킨다며 꽃은 줄곧 지켜왔던 사랑을 내비쳤다. 헤나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곱게 매만졌다. 흉터투성이 손 사이로 노란 머리카락이 흐른다. 
 
"나는 예전부터 널 기다렸어. 네 발자국 소리를 외울 정도로... 그리고."
"그리고?"
"앤지. 휘파람을 잊지 않았구나." 꽃이 빨갛게 폈다. 

 

엔젤라가 홀로 걸었다고 여겼던 그 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친구를 위한 착한 마음이 기적을 이루었다. 우정은 서로가 있어야만 했다.

"수영장이 뭐야? 이번에도 알려줄 거지?"

 

흉내를 좋아하는 꽃이 엔젤라의 부운 볼을 만졌다. 예전부터 볼 만지기는 그녀만의 특권이었는데 어느덧 꽃이 또 따라 한다. 볼을 만지다 빨개진 눈가에 엄지를 올렸다. 제 거칠거칠한 흉터가 부디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 꽃은 엔젤라를 소중히 어루만졌다. 드센 그녀가 눈이 팅팅 붓도록 울었더라. 헤나는 백 년 전부터 기다렸던 눈에 입을 맞췄다. 쪽 하고 설레는 감촉이 따사로이 지나갔다. 엔젤라는 여전히 서럽다. 마음이 눈물로 가득 차 입맞춤을 즐기지 못했다.

"그동안 다 듣고 있었어?" 그녀가 가냘프게 물었다.
"나, 나 엄청 힘들었는데..." 엔젤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헤나는 온몸이 찢어질 듯 괴로웠지만 절절나게 기뻤다. 죽어버린 당신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솔직하게 말해주었는데, 다시 만난 당신은 투명하게 전부 내비쳤다. 
 
"미안해,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정말 미안해..."

꽃이 어깨를 그녀에게 내어주었다. 한 팔을 올려 등도 통통 두드렸다.

 

"사과하지 마..." 엔젤라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헤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어도 몸이 따뜻했다. 영원한 겨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엔젤라에게 고대하던 봄이 나타났다. 간절히 바라던 헤나에게 닿자 엔젤라는 축 늘어졌던 손에 힘을 준다. 하얀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다가 꽃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믿을 수 없는 촉감에 엔젤라는 허리를 매만지다 팔을 깊게 뻗었다. 허리를 제 품에 아늑히 넣은 채 친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헤나는 뭉클했다. 진정 심장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섣불리 말을 꺼낼 뻔했다.

"그동안 잠만 잤어?" 따뜻한 정적 속에서 엔젤라가 입을 열었다.
꽃은 끄덕였다. "네가 없어서..."

 

나긋한 목소리에 습기가 실리더라. 엔젤라는 어깨에서 머리를 떼고 피식 웃었다. 툭하면 눈물을 짜내던 꽃 주제에 이 정도면 많이 버텼다. 주홍빛 눈썹이 서글프게 구부러져서 엔젤라는 손을 올려 눈썹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볼도 만지고. 말랑한 촉감을 즐기다 엔젤라가 고개를 들었더니 골몰히 바라보던 헤나와 눈이 마주쳤다.

연두색 눈이 깜빡인다. 꽃은 눈앞의 환한 녹빛이 좋다. 두 번 다시 못 볼 거라 여겼던 아리따운 연둣빛이 헤나를 사로잡았다. 꽃이 멀뚱히 그녀를 보는 사이 하얀 손이 서서히 눈을 가렸다. 평화로운 어둠 속에서 설레는 음이 퍼졌다. 꽃은 그게 무엇인지 안다. 서쪽 동굴에서 보았던 남녀와 비슷한 모양이겠지. 지금에 닿아서야 꽃은 수치를 모르는 남녀를 이해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넘보지도 못한,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촉감이. 바라던 그 말캉한 살결이. 헤나의 입술에 닿았다. 간절히 바라던 부드러움에 꽃은 밀려오는 커다란 감동에 엉엉 울어버릴까 봐...


이빨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술이 짓이겨져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이상한 모습이었다. 엔젤라는 웃으면서 헤나의 턱 밑에 호두를 꾹꾹 펴주었다. 엔젤라는 제 앞에서 바보가 되는 친구가 좋았다. 모두가 소름 끼치게 역겨워하는 입이 벌어진다. 엔젤라가 한 번 더 입술을 헤나에게 댔다. 도톰한 입술이 말랑하게 눌린다.

엔젤라는 흉터뿐인 목을 어루만지다 제게로 이끌었다. 헤나는 흔들리는 꽃이 되어 그녀에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기적이 이루어졌다. 늘 함께이길 바랐던 둘이 하나가 되었다. 엔젤라가 고개를 떼니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눈에 띈다. 꽃도 마찬가지였다. 달뜬 사랑스러움에 헤나는 요동친다.

둘의 역할이 바뀌었다. 꽃은 짓뭉개진 발음으로 울었다. 엔젤라를 하염없이 부르면서 어깨에 매달렸다. 고마워, 고마워.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눈물로 흠뻑 젖은 꽃은 봉오리가 무거웠다. 고개가 엔젤라의 어깨에 찰싹 붙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엔젤라는 우중충한 주홍색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소리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끅끅거리는 꼴은 기억과 똑같았다. 어설프게 걷다가 넘어져서 울었지. 엔젤라는 들썩대는 헤나를 품에 넣고 여유로이 즐겼다. 손으로 어깨도 만지작대며 등까지 쓸어댔다. 뼈를 흉내 낸 곳이 툭 만져질 때마다 그녀는 볼록한 그곳을 닳을 지경으로 쓰다듬었다. 언제까지 울진 모르겠지만 품 안에 헤나가 있으니 괜찮다. 엔젤라는 입꼬리를 자상하게 올렸다.
 
"너에게 줄 선물이 있어." 그녀가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꽃은 영문을 모르고 얼굴을 어깨에서 뗐다. 깔끔한 옷이 폭삭 젖을 정도로 물을 뱉은 꽃이었어도 눈은 멀쩡했다. 붓지도 않는 눈이 반가워서 엔젤라는 헤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넌 부끄럽지도 않니?" 엔젤라가 인간을 따라한 몸통에 손바닥을 올렸다. 처음은 가슴 한 중앙이었고 옆으로 살짝 옮기자 유두 같은 것이 닿았다. 응큼한 감촉에 엔젤라는 히죽거렸다. 하얀 손바닥을 쭉 내리자 손가락만 몸통에 닿더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배꼽을 닿을 듯 말 듯 건드렸다.

 

"꽃이라 수치를 몰라?"
 
꽃이 배꼽에 신경이 팔린 사이 엔젤라는 빨간 얼굴을 살펴봤다. 방금까지 눈이 빠지게 울어대던 몰골은 어디 가고 헤나는 잔뜩 얼굴을 붉혔다. 까만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눈치를 봤다.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에 엔젤라는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따뜻하고 조금은...

헤나가 두 손을 올려 밑을 향하던 팔을 꽉 잡았다. 다급한 손놀림에 옷이 구겨진다. 엔젤라는 눈을 껌뻑이며 흉터투성이 손을 보다 눈동자에 꽃을 담았다. 바들바들 떠는 손과 다르게 파란 눈은 열망에 뒤덮였다.
 
"왜 긴장하고 그래?" 장난이라고 엔젤라는 킬킬 웃는다. 
"못됐어..." 헤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엔젤라는 튀어나온 주둥이에 손가락을 올려 톡톡 쳤다. 꽃이 무엇을 해도 좋았으니 엔젤라는 자꾸만 웃었다.

 

"내 가방 어딨어?" 
 
이럴 때마다 헤나가 인간이 아니었다. 땅이 꿈틀거리더니 뿌리가 빼꼼 나왔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가방을 집어 엔젤라에게 갖다주었다. 그녀가 입꼬리를 히죽 올리고 가방을 뒤적거린다. 치마, 조끼 흙 묻은 옷가지를 껴냈다. 직접 골라 준비했던 옷을 꽃 위에 대보았다. 백 년 만에 준비한 선물이었어도 엔젤라의 안목답게 헤나와 어울렸다. 친구가 눈을 멀뚱히 깜빡인다. 어수룩하고 요령 없는 모습에 엔젤라는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알몸에서 벗어날 시간이야." 냅다 더러운 새 옷을 헤나에게 덮어버린다. 꽃은 놀라지도 않더라. 태연하게 옷 밑에서 몸을 이리저리 옮겼다. 헤나가 입구를 헤매길래 엔젤라가 옷에 손을 올렸다. 옷을 이리저리 잡아끌고 머리를 입구에 맞췄다. 주홍빛 머리카락이 반가웠다. 그녀가 이쪽이라며 정수리에 말을 건다.
 
얼굴이 옷 밖으로 나오자 팔은 자리를 금방 찾았다. 아, 예쁜 내 꽃. 엔젤라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너무나 벅차서 눈시울이 붉어질까 봐. 조끼를 올렸다. 입혀주려고 단추를 풀어 옷을 벌렸다가 괜히 헤나에게 옷을 맡겼다. 꽃은 그녀의 반응 하나하나가 신선하고 재밌었다. 다시 태어났더니 엔젤라가 솔직해졌다.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어도 그녀는 똑같았다. 빨개진 귀를 보면서 헤나는 텅 빈 간극을 새까맣게 잊었다. 꽃은 옷을 입다 말고 엔젤라를 깊이 껴안는다.

 

"앤지, 앤지." 얼굴을 품에 비벼댔다. 그녀는 품에서 온몸을 맡기는 꽃을 봤다. 꼼지락대는 모습이 강아지 같길래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봤다. 다행히 꼬리가 달려있진 않더라. 엔젤라는 어리광 부리는 꽃을 너그럽게 내버려 뒀다.

만약 제가 눈사람이라면 기다렸던 봄 안에서 녹아 없어질 거라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엔젤라는 아련한 망상을 했다. 마지막 선물을 잊어버릴 만큼. 꽃이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 전까지 그녀는 책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헤나가 엔젤라에게 파고들며 몸을 부딪쳐오니 그 감정이 뿌리까지 전달되었다. 흉측한 뿌리는 흔들흔들거리다 가방을 떨어뜨렸고 가방 안에서 책 한 권이 튀어나왔다. 책이 까만 꽃밭 위를 뒹군다. 깔끔했던 새책이 주인을 잘못 만나서 펼쳐지기도 전에 땅부터 뒹굴었다. 아까는 흙을 뒤집어쓰더니 지금은 풀물이 오른다. 
 
엔젤라는 제 존재를 알리는 책을 보고서 깔깔 웃었다. 시선을 내려 품속의 헤나를 봤다.

 

"저 책 가져와." 꽃은 꼼지락거리더니 눈치만 봤다.

"뭐야? 아직도 책한테 질투하니?" 헤나는 예상 못한 질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 목까지 빨개질 정도로 꽃은 부끄러웠다. 짓궂은 웃음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숨도 못 쉬게 헉헉거리며 웃다가 엔젤라는 고인 눈물을 닦았다.
 
"너 변함없구나!"

등만 보여주는 꽃한테 보이지 않는 미소를 활짝 지었다. 오죽 즐거운지 엔젤라는 헤나의 등을 퍽퍽 때렸다. 기침이 나올 지경이 되어서야 엔젤라는 놀리기를 그만뒀다. 품속에 고개를 박은 헤나를 살살 구슬릴 시간이 왔다.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하얀 손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주홍빛을 만끽했다. 노을보다 붉은 헤나의 머리카락은 고왔다. 꾀죄죄했어도 사르르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찰랑거리고 빛났다. 엔젤라는 다른 손도 마저 올려 머리카락을 꼬았다. 오랜만에 친구의 머리카락을 땋아도 멋쟁이답게 솜씨가 훌륭했다. 
 
"바보야. 책은 너 없을 때..." 엔젤라는 말을 하다 말았다. 호기심이 든 꽃은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둘은 눈이 마주쳤고 헤나는 짓궂게 올라간 미소를 봤다.

 

"또 속니?" 그녀가 머리카락을 하얀 손으로 헤집었다. 기껏 땋아놓고 어지럽히는 수순은 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마냥 좋았다. 뿌리를 꿈틀거리며 멀찍이 떨어진 책을 제게로 가져왔다. 뿌리에서 책을 옮겨 받고 헤나는 먼지를 툭툭 털었다. 본래 하얄 거라 추측되는 옆면까지 갈색으로 물든 상태였다. 깔끔하게 되돌리지 못해서 꽃은 눈썹이 축 처졌다. 엔젤라는 네 탓이 아니라며 우중충하게 구는 눈썹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어때?" 그녀가 꽃을 빤히 쳐다보며 주어 없는 질문을 던졌다. 영문을 모르는 꽃은 얼떨떨하게 눈치를 살폈다. 빨간 표지를 지닌 책은 고귀한 분위기가 났다. 붉은 책을 쳐다보며 예쁘다고 답변을 했다.


"그것뿐이야?" 묘한 실망감이 엿보여서 헤나는 눈을 파랗게 굴러대며 책을 톺아봤다. 눈을 껌벅거리며 확인을 요구하는 시선이 뜨거웠다. 엔젤라는 책으로 열기를 가리다가 직접 살피라며 책을 헤나에게 툭 맡겼다.

"엔젤라 우드? 왜 네 이름이 있어?" 믿을 수 없단 말투로 책장을 넘겨본다.
"좋은 질문이야..." 엔젤라가 살포시 헤나를 껴안았다. 아까처럼 팔을 목에 감고 귀에 나근하게 속삭인다. 
 
"네가 나를 보고 싶다고 대지에 써놓은 것처럼. 나도 친구를 위해 애썼지."

 

고된 길이었고 과정이 지루했다고 그녀는 투덜댄다. 꽃은 엔젤라와 딱 붙어있었으니 그녀의 심장이 선명했다. 쿵쿵 울리는 설레는 진동이 헤나에게까지 전달되니, 꽃은 심장을 빚어냈단 착각에 이르렀다. 엔젤라가 멀어지자 고동도 사라졌다. 잠깐도 견디기가 벅차 헤나는 간절하게 그녀를 봤다. 그녀는 늘 제 생각만 하는 착한 꽃에게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넌 앞으로 책에 푹 빠질 걸." 예쁜 웃음이 환하게 폈다. 헤나는 내려쬐는 미소가 햇살 같아서 눈이 부셨다. 파란 눈이 자꾸만 가늘어진다. 눈물이 앞을 가려 헤나는 손에 책이 있어도 읽을 수 없다. 이게 뭐냐고 꽃은 어수룩한 말투를 내뱉었다. 말을 처음 했던 그때가 떠오르는 울림이었다.

"누구도 너를 괴물꽃이라 부르지 않을 거야."

꽃은 사랑을 했다. 없던 자아가 생길 정도로 탐이 나던 그녀였다. 그녀에게 사랑을 바칠 각오만 했는데 돌아오다니. 정녕 이 과분한 감정을 받아도 되는 건지. 헤나는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면서 그녀를 봤다. 꽃이 바라는 건 하나뿐이었다.

엔젤라가 행복하면 좋겠다. 평생 웃으면 좋겠다. 제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꽃을 위해 거대한 사랑을 준비하는 그녀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녀가 힘든 시간을 겪을 때마다 꽃은 없었다. 헤나는 제 부재가 밉고 저주스러웠지만, 엔젤라가 꽃을 용서했다. 오히려 사랑으로 돌려줬다.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감정에 인간을 흉내 내길 잘했다고...
 
식물 주제에 물이 아깝지 않냐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반가운 투덜거림에 꽃은 제 꽃잎을 잊어버릴 만큼 빨갛게 폈다. 엔젤라는 헤나의 주홍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머리가 뒤집어져도 꽃은 헤실거린다. 엔젤라는 마주 보던 자세에서 헤나의 옆으로 엉덩이를 붙였다. 둘은 나란히 앉았다. 노란 머리카락이 헤나의 어깨에 닿는다. 연하게 날리는 머리카락이 가까워서 꽃은 마냥 좋다. 엔젤라는 제 볼에 부드러운 옷이 닿아 기뻤다. 흉터를 선물로 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주겠다고 그녀는 볼을 어깨에 뭉갰다. 온기가 어깨부터 시작해 얼굴까지 퍼져간다. 헤나는 흉터투성이 손을 올려 엔젤라의 기다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긴다. 둘은 눈을 마주쳤고 또 입을 맞추었다. 친구가 오죽 만나고 싶었던지 엔젤라는 헤나의 볼에 하얀 손을 올려 제게 이끌었다. 쪽, 쪽 자꾸만 뽀뽀를 해댔다. 헤나는 해맑게 폈다. 부끄러워도 그만하란 소리는 내뱉지 않았다.

 

"응큼한 녀석." 엔젤라가 입술을 떼고 씩 웃었다. 
"네가 너무 좋아..." 꽃은 어정쩡하게 책을 들고 얼굴을 가렸다. 행복한 애정에 파묻혀 기껏 만든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들었던 책이 삐뚤어져서 표정을 다 보여주더라. 엔젤라는 수줍은 눈과 파랗게 마주쳤다. 꽃은 제 주인의 미소에 눈을 곱게 접었다. 눈만 마주쳐도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행복함이 온몸을 채워갔다.

엔젤라는 책과 꽃을 번갈아봤다. 빨간 표지에 엔젤라가 손을 올렸다.
 
"내 책. 하나하나 직접 읽어줘." 지층을 물어보던 소녀가 어른이 되어 책까지 썼다.
"네가 모르는 단어가 있다면 웃기겠다." 그녀의 미소가 제가 인간을 흉내 내었던 이유였다.

헤나를 위해 엔젤라는 연애소설을 적었다. 흉터를 지닌 꽃이 주인공이었고 어느 한적한 시골에 있다던 까만 꽃길을 소재로 적은 생소한 배경의 소설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사랑이었다, 슬프고 예쁜 사랑이었다. 종이를 한 장, 한 장씩 넘기던 독자는 눈시울을 붉혔다. 마지막까지 다 읽어서는 펑펑 울었다. 그토록 짠맛을 올라오는 책이었어도 끝은 행복했다.
 
엔젤라가 끝내주는 책을 적었으니 출판사는 난리가 났다. 성공의 길을 걷는 책을 토대로 괴물꽃은 알려졌다. 까만 꽃길도 덩달아 입소문을 탔다. 다들 책을 보고 이곳에 왔으니 괴물꽃을 괴물꽃이라 부르지 않았다. 자본은 솔직하다. 돈은 돈을 부른다. 인기 없는 옛 것은 썩어버리고 다들 세련된 새 물건을 봤다. 헤나에게 붙은 악명도 마찬가지였다.
 
헤나를 위해 엔젤라가 골랐던 이상한 백과사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쉽게도 그녀가 원하던 문구는 적히지 않았지만, 이것도 훌륭했다. 첫 번째로 무서운 이야기뿐이었던 까만 꽃에게 괴물딱지가 떼어졌다.

과거 마법이 군림하던 시절 이 꽃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으나 지금은 평가가 반대가 되었다. 이 꽃은 인간친화에 가까운 꽃으로 약초, 장신구 등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눈에 띄는 특징은 향기다. 까만 꽃은 부위가 어디든 서글픈 향기가 났다. 거부할 수 없는 향기에는 강한 마력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식물학자 사이에서 사람에게는 해가 없다는 의견이 주류가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홀로 핀 개체만 발견되었지만 이 꽃이 한 마을의 언덕을 장식한 뒤로 다수의 개체가 모여서 핀다는 주장이 강해졌다. 구전으로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꽃말의 기원은 이곳에서 온 거라 추측된다. 소수의 의견으로 유행하는 책에서 꽃말을 따왔다는 소문도 돈다. 이 꽃의 이름은. 

"헤나, 너 꽃말도 생겼더라."
"그게 뭐야?"
"꽃한테 덧붙여지는 의미 같은 건데, 너는 뭐냐면..."
 
당신을 기다릴게요. 
무서운 괴물꽃 전설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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