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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16. 늪지(2)

by 넴 박 2024. 7. 28.

엔젤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렸다.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던 어제와 달리 이불이 목까지 덮어진 상태였다. 그녀는 이불을 멀뚱히 보다 하품을 했다.
"언제 왔다 갔대..." 덜 다물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노곤하게 샜다. 볼을 이불에 살짝 비볐고 게으른 손길로 이불을 매만졌다. 느릿하게 굴다 그녀는 발로 이불을 거두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채 상체를 세웠다.
아직 일어날 때가 아니라는 듯 하품이 또 나왔다. 엔젤라는 팔을 뒤로 뻗고 뱅뱅 돌렸다. 뻐근한 어깨를 달래고 목을 꺾었다. 일어날 준비를 얼추 마무리 짓자 닫혀있던 문을 봤다. 꽃이 무슨 사고를 쳤을지 호기심이 궁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끼익. 문이 귀를 긁더라. 엔젤라는 눈이 부시지 않아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집안을 둘러보았다. 벽에 볼품없는 틈이 많다. 자잘한 틈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빛은 가늘었지만 아련하고도 붉게 주변을 태운다.
 
"하루를 꼬박 잤군." 만족스러운 빛 농도에 그녀는 입꼬리가 부드러워진다. 엔젤라는 천천히 벽으로 다가갔다. 하얀 손을 벽에 대보면서 빛을 가렸다. 예쁜 그림자가 졌다. 곧게 폈던 손가락을 새끼손가락부터 접었다. 동그란 주먹이 완성되었다. 주먹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검지만 툭 세웠다. 노곤노곤하게 스며든 빛을 손가락으로 따라 문질렀다. 빛 대신 먼지가 피부에 묻었다. 엔젤라는 손 끝에 바람을 후 불었다. 
 
먼지는 날아갔지만 엔젤라는 손을 툴툴 털었다. 온종일 늑장을 부렸으니 헤나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녀는 어깨가 기대로 들썩였다.
"헤나." 친구를 불러도 조용하다.
 
사각사각. 멀찍한 갉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운 엔젤라는 발을 뗐다. 발걸음에 맞춰 삐걱거리는 나무판자가 오싹해서 그녀는 다리에 의자가 걸린 줄 몰랐다. 의자가 흔들리자 퉁 하고 물건이 떨어졌다. 엔젤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뭐야?" 엔젤라는 용감하게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세상에, 맙소사."
그것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의자를 살폈다. 다른 의자도 전부 똑같았다.

주변에는 식물이 난리를 치며 모았던 의자가 잔뜩이었다. 모든 의자에 인형이 앉아 각자 남루한 복장을 뽐내더라. 의자의 주인은 저마다 개성이 돋보였다. 어떤 인형은 목이 꺾인 채였고, 모자를 쓴 인형은 다리가 없고, 두 팔이 붙어있는 인형은 치마만 입었고. 모두 이상하고 부족한 모양이었지만 단 하나의 규칙만큼은 온전히 지켰다. 한 의자에 한 인형. 엔젤라는 목에 식은땀이 났다. 친구의 기괴한 취향에 침도 꼴깍 삼켰다. 사각사각.

저 소리가 끝나면 다른 인형이 탄생할 직감에 엔젤라는 혀를 찼다.
"지가 인형사야?" 그녀가 쥐고 있던 인형의 팔을 쭉 잡아당겼고 조잡한 나뭇가지는 쉽게 꺾였다. 이어서 몸통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엔젤라는 시무룩한 꽃을 떠올렸다.
한 의자에 인형 둘을 두면서 꽃이 만들어둔 규칙을 어겼다. 제 관대함에 그녀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인형은 죄다 입이 없어 누구도 엔젤라에게 말을 걸 수 없다. 더군다나 이 무생물이 내뿜는 광기와 생명력이 그녀를 압도했다. 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다니 대단하다면서 엔젤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각사각.
엔젤라는 길을 가로막는 의자를 거칠게 밀거나 의자다리를 발로 찼다. 불쌍한 인형이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도 엔젤라는 귀를 기울이느라 바빴다. 주홍빛 머리카락이다. 친구는 구석에 있더라. 그녀가 씩씩한 걸음으로 헤나에게 다가갔다. 꽃은 늘 엔젤라가 오면 활짝 반겨주는데 지금은 오죽 집중한 걸까.
꽃은 어질러진 책상을 골몰히 봤다. 책상 위에는 여러 나뭇가지가 잔뜩이었다. 헤나는 고개를 까닥거리다 손을 받침으로 썼다. 슬쩍 다가온 뒤에서 엔젤라가 팔짱을 조용하게 꼈다. 연두색 눈빛이 흉터 끝을 봤다. 친구가 선택한 나무는 조금 두껍고 까맸다. 헤나는 시선도 모른 채 웃음을 흘리면서 칼로 재미나게 껍질을 깎아낸다. 사각사각.

"뭐 하니?"
엔젤라가 말을 걸자 헤나는 칼을 떨어뜨린다. 

"많이 시끄러웠어?" 꽃이 새빨간 얼굴로 뒤를 봤다.
"저거 네 솜씨야?" 엔젤라는 왔던 방향으로 턱짓을 했다.
"응..." 헤나가 수줍게 답하면서 엔젤라에게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다 못생겼고 이상해." 엔젤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엔젤라의 상상대로 꽃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식물은 시무룩했어도 손은 야무지게 나무를 깎아냈다. 사각사각 소리가 또 난다. 엔젤라는 떨어지는 나뭇조각을 바라봤다. 살랑살랑하게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양이 깃털과 비슷했다. 어느새 제 발 근처에도 조각이 떨어졌다. 괜히 발을 움직이며 쓰레기를 신발에서 떨궜다. 이제 보니 방바닥이 쓰레기로 엉망진창이다. 천 조각, 나뭇가지, 껍질, 단추…

그녀가 빙글 돌아 의자를 살폈다. 성당의 가지런하고 질서 정연한 좌석과 달리 이 조잡한 의자는 서로 공통점이라곤 없었다. 다만 밤새도록 온 정성을 담아 헤나가 깎아낸 나무인형은 아침예배처럼 모든 좌석을 정복했다. 틀림없이 이 관중은 엔젤라가 쿨쿨 자는 동안에도 자리를 성실하게 지켰겠지. 그녀는 공작에 심취한 헤나를 봤고, 호기심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 짧은 인생 중 이런 사람은 없었는데." 엔젤라는 헤나를 짓궂게 손가락으로 머리를 쿡쿡 쑤셨다.
태연한 척 해도 그녀는 삐뚤빼뚤한 인형 떼거지를 보고 있자면 위액이 넘어왔다. 지금껏 둘이서 함께했지만, 꽃한테 익숙해지지 않는다. 친구가 인간이 아닌 탓일까. 인형이 빽빽하게 의자를 메꿔도 헤나는 계속 예쁜 가지를 골라냈다. 이곳저곳을 따져 엄선된 나뭇가지는 헤나의 손을 거치자 추악한 인형이 되었다.
 
"맨 앞에 앉은 애는 코가 삐뚤어졌어. 지금 꾸미는 애는 팔이 짝짝이잖아. 도대체 무슨 예술관이람?"
헤나는 제 작품에 비평이 섞이자 볼이 빵빵해진다. 그 모습을 알아챈 엔젤라가 불만 듣기가 무섭냐며 놀린다.

"소심하긴."
헤나가 입을 삐죽 내민다.
 
"인형한테 입이 없는 이유가 있군."
"이거 어렵단 말이야. 놀리지 마."
 
엔젤라는 가지런하게 놓아진 인형 하나를 들었다. 한쪽 눈밖에 없는 비루한 인형이었다. 양팔을 짓궂게 잡아당겨도 망가지지 않는 모양에 감탄했다.
 
"애꾸 주제에 얜 어디 놀러 가니?" 치마를 뒤집어 보다가 헤나에게 제지된다.
"그만 괴롭혀."
찌그러진 인형의 얼굴을 매만지는 헤나를 엔젤라가 뻔히 봤다. 꽃이 엉성한 인형을 곱게 다루자 엔젤라는 식물한테 관음증이냐고 물어보며 히죽거린다. 헤나는 새빨개졌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되묻지도 못한 채 고치던 인형을 꾹꾹 누르고 괴롭혔다.

"이건 우리만의 의식이야.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알려져서는 안 돼."
"거창하긴."
"내 아름다운 신부를 자랑하지 못한다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 인형에 썩은 내를 풍기는 반푼이 구경꾼들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겠어."
아무렇지도 않게 헤나가 이상한 말을 읊는다.

엔젤라는 등 뒤로 닭살이 올라온다. 가끔씩 헤나가 괴물처럼 굴 때, 저와 헤나가 다르다고 느껴질 때 그녀는 거리감이 생생해진다. 내숭 없이 벌어진 까만 입가를 멍하니 봤다. 인간이라면 생리적인 거부감을 일으킬 새까만 미소. 그 미소에 홀린 자신도 정상이 아니라며 자조했다. 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엔젤라는 눈앞의 빨간 볼을 쭉 잡아당겼다.

"뭐, 뭐 해…" 말랑말랑한 살결에 엔젤라는 긴장이 풀어진다. 아무도 헤나를 괴물로 생각하지 못할 거야. 사람보다 더욱 사람 같고 엔젤라에게 절절매는 귀여운 저 바보를 누가 흉악한 괴물꽃이라고 여기겠어.

헤나를 위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조잡한 인형 사이에서 엔젤라는 예쁘게 섰다.

 



   
그녀가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던 중 땅이 작게 울렸다. 헤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하냐고 쏘아붙이려던 그때 천장이 내려앉았다. 바닥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빈틈이 송송 나있던 벽은 쩍 하고 갈라지더니 천장이 무너졌다. 헤나가 벌떡 일어나 중앙에 서 있던 엔젤라에게 서둘러 뛰어갔다. 꽃이 그녀를 감싸고 바닥에 웅크렸다.
위에서 더미가 떨어지니까 흉터투성이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얇은 팔로 엔젤라의 어깨를 안았다. 품 속에서 엔젤라는 눈을 깜빡였다. 바로 옆에 화염이 이글거렸고, 그 열기에 눈이 감겼다. 어수룩한 꽃은 그녀를 꽁꽁 감싼 주제에 불이 무섭지도 않은 걸까. 뜨거움 속에서도 눈은 촉촉해졌다. 눈물로 열기를 버텼다. 엔젤라는 원망을 담아 불씨를 쏘아봤다. 불씨가 일렁이니까 그녀도 덩달아 속이 울렁거렸다. 불이 헤나를 조금씩 좀먹었다. 친구가 늘 입고 다니던 옷이 새까맣게 탔다. 어떻게든 파란색을 지키고 싶어서 엔젤라는 손을 올려 등을 꼭 붙잡았다. 그 순간 불길이 더욱 커졌다.
 
"윽!"
 
불은 헤나에게 큰 아픔을 줬다. 엔젤라는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꽃만 보였다. 건물이 시끄럽게 무너져도 헤나가 앓는 소리부터 들렸다. 그녀는 꽃을 품고 싶었다. 하지만 힘은 미약했고 품에서 나올 수 없었다.

"헤나!"
엔젤라가 아무리 애를 써도 헤나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조급해진 엔젤라는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무작정 손을 올려 뺨을 쓰다듬었다. 꽃이 손에 얼굴을 기댔다. 친구가 괜찮다고 웃는 순간 날카로운 쇠붙이가 식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 단정한 얼굴이 박살 났다. 파란 눈알도 튀어나왔다. 까만 피가 하얀 이빨과 함께 엔젤라의 얼굴로 떨어졌다. 피는 끈적거렸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현기증이 핑 돈다. 머리에서 뇌를 흉내 낸 장기를 뽐내더라. 그중 몇 개는 펑, 펑 터졌다. 또 눈앞에서 친구가 죽어버렸다. 눈을 깜빡여도 헤나의 머리는 붙지 않았다. 꽃은 입이 없어도 괜찮겠지? 오히려 제대로 숨을 쉬는 건 누구인지 모르겠다. 철크덕 거리는 소리가 동서남북 어디서든 들려도 엔젤라는 눈앞의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그대로 있었다.
 
"여자끼리 붙어먹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지." 그녀가 꼭 쥐고 있던 꽃을 누군가 빼앗았다. 로브를 잡아보지만 엔젤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들었다. 갈색 머리에 익숙한 얼굴. 주점에서, 성당에서 자주 보았던 그 남자다.

남자는 머리가 대롱거리는 헤나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코를 가까이 대다가 팔을 멀찍이 벌렸다. 친구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인간을 흉내 낸 몸은 용케도 형태를 유지했다. 비록 머리는 박살 났지만.

엔젤라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줍고 싶었다. 그녀가 벌벌 떠는 손바닥으로 땅을 붙잡아 기어갔다. 주변에 병사가 가득하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친구를 한 데 모아야만 했다. 
간절한 손길을 병사가 무참하게 군화로 짓밟았다. 지긋지긋하다. 곰곰이 떠올려보자면 남자는 헤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방해했다. 방해를 때때로 즐겼고 그 기회로 하여금 꽃을 놀렸지만 이번만큼은 진절머리가 났다. 고개를 올려 엔젤라는 그를 살폈다. 남자는 휘파람을 따라 하며 갑주를 고쳐 입더라.

그는 엔젤라에게 주점에서 추파를, 성당에서 청혼을 던졌던 갈색머리였다. 끔찍하게도 여자를 탐냈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지. 공사구별이 확실했던 남자가 감정을 싹 제거하고서 말을 이었다.
"심지어 괴물꽃이라니. 세상이 말세로군." 남자는 쓰러진 헤나에게 창을 쑤셔 넣었다. 꾹꾹 누르며 끝을 돌리는 잔학한 행동에 엔젤라는 참을 수 없다.
 
눈을 부릅떴다. 제 손을 짓밟은 병사를 밀쳤다. 엔젤라는 다급하게 굴었다. 의자를 밀고 손으로 인형을 잡았다.

"그딴 짓 하지 마!"
 
덜 만들어진 인형을 던지며 악을 질렀다. 엔젤라가 격렬하게 뛰쳐나가려고 굴자 근처에 있던 병사가 다리를 툭 내민다. 흥분에 빠진 그녀는 발에 걸려 쿵 넘어졌다. 쿡쿡거리는 비소가 위에서 들려온다. 그녀는 당장 거세게 반발하고 싶었지만 머리를 밟혀 엔젤라는 고개를 들 수 없다.

"더러운 발 당장 치워." 포악한 발길에도 그녀는 아픔을 몰랐다. 눈앞에서 친구가 엉망으로 희롱당하니 이빨에서 까드득 씹는 소리가 난다.
"네 년들이 지나온 발자취가 훨씬 더럽지." 갈색 머리는 제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그러다가 남자는 손가락에 붙은 머리카락을 봤고 그 머리카락을 집어 엔젤라에게 들이댔다.
"나름 드문 머리카락인데 안 떠오르나?"
"넌 입만 나불대는 군." 엔젤라가 비아냥거리자 병사가 머리를 더욱 세게 짓밟았다. 

"까불지 말아. 적어도 네가 기억은 할 줄 알았다." 상황을 알지 못하자 엔젤라는 습관처럼 해결을 갈구했다. 침묵하고 갈색 머리가 떠벌리기를 기다렸다.

"숲 속에서 한 남자가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발견됐다. 그는 마법사로 누구도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지. 그랬던 그가!" 남자는 꽥 소리를 질렀다. 예상 못한 반응에 엔젤라는 깜짝 놀라 어깨가 들썩였다.

"어떻게 그 남자가 무참히 살해당했을까. 나는 범인을 찾고자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바닥에 붙어 땅에 집착하니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잡았지. 그래, 향기가 남아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픈 향기를 뿜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야."
 
엔젤라는 입을 꾹 다문 채 눈동자를 올려 그를 노려봤다. 알량한 시선이 가소로워서 남자는 피식 웃었다.
"처음부터 예쁘장한 너를 의심하진 않았어. 하지만 저 멍청한 괴물꽃이 성당에서 향기를 잔뜩 흘렸더군. 덕분에 뒤를 잡았다." 그녀는 대답 대신 이빨을 까뜩까뜩 씹었다.
 
혐오스러운 남자가 엔젤라에게 기회를 마련해 준다. 그는 과분하게 뒤를 돌았고, 철컥거리는 금속음을 내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그는 꽃 앞이었다.

"짧은 정으로 네게 물어보마. 온갖 계절이 뒤섞이고 생태계를 무시하는 저 생물을 정상이라고 여기는가?"

저 남자의 말대로다. 하지만, 괴물꽃 그게 뭐라든 엔젤라는 친구 편이었다.

"아가씨. 현명하게 굴어."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헤나를 어디까지 괴롭히려고 저럴까. 그가 터진 머리를 발로 찬다.
 
"이건 뇌도 아니고 도대체 뭐야?"
 
남자는 역겨운 냄새를 견디기 벅찬지 코를 막고 헤나를 헤집어댔다. 바로 앞에서 창이 헤나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속절없이 피부 같은 겉이 찢어졌다. 그 안에서 덩굴과 살점, 까만 피가 쏟아졌다. 장기를 흉내 낸 무언가가 끈적하게 굴러 떨어진다. 남자가 알 수 없는 그것을 짓밟자 꿀렁꿀렁거리며 머리카락 뭉터기와 하얀 손톱이 뒤죽박죽 튀어나왔다.

태연자약하게 입을 놀려도 결국 남자는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렸다. 썩어버린 피가 바닥에 느릿하게 고인다. 코를 찌르는 비린내에 누군가 구토를 했다. 당연하다. 비위가 상하는 형태에 구역질이 욱 올라올 수밖에 없었지만 철을 두른 인간들에 비하면 괴물꽃은 고귀하고 성스럽다. 엔젤라는 당장 흘러내리는 조각을 끌어안고 헤나에게 집어넣고 싶었다. 친구를 돌려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두 번 다시 친구를 잃을 수 없다고...
병사가 제 머리를 짓밟아도 엔젤라는 움직이려고 애썼다. 그랬더니 다른 병사가 와 그녀의 손을 밟았고 곧이어 다른 병사도 그녀의 허벅지를 꾹 밟는다. 그녀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신음 대신 도톰한 입술이 터져 빨간 피가 송골송골 맺혔다.

"이 자식들. 가만두지 않을 거야..."
 
눈도 깜빡일 수 없다. 헤나가 잘못될까 봐 잠시라도 놓칠 수 없다. 여러 상황이 겹겹이 쌓이니 엔젤라는 곧 피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네가 친구라고 부르던 녀석의 안을 봐볼래?"
사람을 좋아해 흉내 내는 미련한 식물은 엔젤라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

고맙게도 병사가 발을 머리에서 떼고 노란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덕분에 땅에 처박혔던 얼굴이 붕 떴다. 엔젤라는 눌렸던 눈을 간신히 떴다. 언제 이만큼이나 가까이 왔을까. 눈앞의 실실 쪼개는 면상에 대고 엔젤라는 침을 뱉었다. 준수한 얼굴이 구겨지니 그녀가 휘파람을 휙 불었다. 몰상식한 행동에 남자는 표정을 굳히고 손을 들어 올렸다. 강한 마찰음과 함께 엔젤라의 얼굴이 돌아간다. 주변에 깔린 병사들이 그녀를 강제로 바닥에 억압했다.
 
서늘한 창끝이 그녀에게 닿았다. 날카로운 끝에서 실이 끊어지고 단추가 제 역할을 잃었다. 저항 없이 벌어지는 천 사이로 엔젤라의 하얀 맨살이 드러났다. 수치스러운 상황에 엔젤라는 붙잡힌 팔과 다리를 휘둘러보려고 했다.

"짐승! 저리 비켜! 당장 다 꺼져!" 

건장한 남성들은 힘이 셌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다. 평생 누려온 엔젤라의 특권이자 저주인 아름다움이 그녀를 옮아맸다. 뺨이 붓고 옷이 더러워졌어도 그녀는 빛났다. 이토록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누군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는 흥분에 찬 숨을 내뱉기도 했다. 남성들은 이성을 저버리고 본능대로 뜨거워졌다. 건장한 사내들이 꿈에서도 실현시키지 못했던 환상이 현실로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뽀얀 살결에 파묻히고 싶다. 음란한 기대가 커져갈수록 철크덕거리는 금속음이 사방에서 났다.

갈색 머리가 찢어진 그녀의 옷을 더욱 벌린다. 분홍빛 피부, 닿고 싶은 탐스러움에 그가 복수를 잠깐 잊었다. 엔젤라는 하지 말라며 몸을 비틀어댔지만 부은 볼 때문에 발음이 우습다. 그런 엔젤라를 비웃으며 그가 덧붙인다.

"아가씨가 저것을 마을로 데려왔으니 이 정도는 해야 정당하지 않나?"

물론 우리가 악역처럼 보이는 건 유감이라고. 열렬히 토해낸 네 욕설 중 틀린 말은 없다며 이죽거린다. 남자가 엔젤라에게 홀라당 빠져 희롱을 손길로 옮겼다. 그는 추잡한 소리를 내면서 엔젤라의 부드러운 살결을 엄지로 꾹 눌렀다. 하얀 살이 폭신해 입맛을 쩝쩝 다지니 엔젤라는 당장 그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으악!"
"헉!"
 
비명과 함께 엔젤라를 억압했던 병사들이 그녀한테서 손을 뗐다. 엔젤라는 바닥에 철퍼덕 머리를 박았다.

"무슨 일이냐!"

용기 넘치는 군인이 뒤를 살폈다. 그녀도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서둘러 고개를 들고 엔젤라가 상체를 틀자 옆에 있던 병사는 뒤로 휙 끌려갔다.

"살, 살려줘!"

꿀렁꿀렁 기다란 게 보였다. 질척 맞은 음이 들렸다. 엔젤라는 당연코 지금까지 뚝 떨어지는 지독한 점액질을 반가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헤나!" 그녀의 소중한 친구였다.

휘청거리는 상체가 우뚝 서겠다고 오기를 부렸다. 가슴 위로 빠진 눈알이 덜렁거리고 쪼개진 몸은 까맣게 비척댄다. 잘린 몸이 멀쩡히 붙지도 않아 허리는 픽 꺾였다. 억지로 일어서는 모습이 불안정하더니 헤나는 퍽 넘어졌다. 까만 피가 쓰러진 병사에게 뿌려졌지만, 꽃은 시체를 먹기는커녕 무시하고 엔젤라를 찾는다.
흐느적 녹아내리는 몸에 쪼개진 머리가 벌어져서 내부가 훤히 보였다. 망가진 몸을 감싼 옷도 문양을 잃었다.

"애, 앤지......"

멍청한 괴물꽃은 머리가 터지고 몸이 절반으로 쪼개져도 엔젤라밖에 모른다. 그때처럼 주변을 더럽히면서 피웅덩이에 손바닥을 철퍽 댄다. 피를 삼킨 흙이 손가락 사이로 쭉 튀어나왔다. 헤나가 손바닥으로 핏빛 지옥을 우기듯 엔젤라는 비참한 순간이 사라지길 바랐다. 나의 꽃만 있다면 어떤 역경이든 헤쳐나갈 수 있다고. 그녀는 생지옥 속에서도 희망을 봤다.
 
엔젤라가 마을에서 맞고 돌아온 날에 헤나는 처음으로 걸었다. 제 이름밖에 모르는 것처럼 이름만 되뇌면서 꽃이 팔을 뻗었다. 어릴 때랑 똑같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주룩 내려오고 덩굴이 폭 빠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엔젤라는 웃었다.
엔젤라의 행복한 미소에 남자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방금까지 우위였던 갈색머리는 피부의 말캉한 감촉을 즐기지도 못하고 인간이라면 감당하기 힘들 그 형태에 겁을 먹었다. 
이제 숨 쉬는 건 남자뿐이었다. 모두 뿌리 아래에 있었다. 공포로 동공이 벌렁거렸다. 그는 살고 싶었다. 살기 위해서 엔젤라의 팔을 등 뒤로 꺾어서 붙잡았다.

"가, 가만히 있어! 이 괴물아!"
헤나는 멈칫했고 남자는 제 협박이 통했다고 느꼈다. 엔젤라의 팔을 더욱 꺾으면서 손에 힘을 준다. 엔젤라는 지독한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파서 헤나를 바라볼 수 없다. 인질 삼아 엔젤라를 방패처럼 이용하지만 애초에 헤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남자는 슬쩍 숨을 내뱉었다. 타고난 순발력으로 위기를 극복했다고 여기며 그는 머리를 핑핑 굴렸다. 그가 두뇌를 일깨우는 동안 조용히 뿌리가 땅 속을 파고들었고, 소리 없이 뽈록 튀어나온 징그러운 뿌리는 남자를 뒤에서 찔렀다.

"컥..."

한 대만으로는 모자라서 헤나는 남자를 마구 찔렀다. 뼈가 박살 나 그는 무릎을 꿇었다. 낮아진 높이에 뿌리가 더욱 반겼다. 뿌리는 그의 어깨를 부수고 허벅지를 꿰뚫었다. 몸뚱이에 여러 구멍을 냈다. 잔인한 공격으로 속박이 사라지자 엔젤라는 미련한 꽃한테 달려갔다. 헤나를 폭 껴안았다.

"나, 아직 더러워..." 장기가 삐져나오는 상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엔젤라는 제 품에 깊이 넣었다. 헤나는 엔젤라가 안아주니 그대로 팔을 목에 감았다.
 
식물은 엔젤라에게 딱 달라붙어 얼굴을 비빈다. 몸을 추스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이 상황이 행복했던 꽃은 엔젤라에게 달라붙느라 바빴다.

인생은 이럴 때 누군가를 괴롭히더라. 어떤 누구라도 갈색 머리가 죽었을 거라 짐작했을 거다. 꼼꼼한 꽃이 하필이면 이때 끝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 탓에 꿈틀거리는 그의 손을 놓쳤다. 손은 주변을 허우적거리다 품속의 칼을 움켜잡았다. 온몸이 멀쩡하지 않았어도 그의 눈빛은 저주로 이글이글 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는 그림자에 섞여 살금살금 다가왔다.
때때로 불행은 우연이 쌓여서 나타나더라. 하필이면 엔젤라가 장기를 몸속에 집어넣느라 뒤를 살피지 못했을까. 꽃이 사랑스러운 피부의 감촉에 빠져 눈을 뜨지 않았을까.
 
그가 원망으로 담금질된 칼을 엔젤라의 옆구리에 날카롭게 박아 넣었다. 엔젤라는 숨조차 내뱉지 못하고 앞으로 꼬구라졌다. 예상치 못한 습격이었어도 그녀는 팔을 풀지 않았다. 찰나가 영원 같았다. 슬프게도 꽃이 바라는 영원과 가까웠다...

헤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를 발견했다. 누군가를 해치고 웃다니 그런 끔찍함을 직접 목도하다니. 평소라면 헤나가 알아챘겠지. 품이 뭐라고 그게 그렇게 행복해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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