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무색해질 만큼 시간이 흘러 과학이 마법을 대체했다. 발전한 세상은 산업시대를 맞이해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고 시끄럽게 울어댔다. 정신없이 소음이 가득한 세상에 엔젤라가 태어났다. 하얀 피부, 노란 머리카락을 가진 그녀는 예쁘단 소문이 자자했다. 처음은 마을이었고 어느새 옆 동네까지 그리고 기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 아름다움을 향한 찬사가 퍼졌다. 그녀는 호화로운 집안의 외동딸로서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고 오만하게 성장했다. 엔젤라는 부족함을 모른 채 모든 걸 누렸다.
엔젤라는 화려한 창틀에서 손으로 턱을 괴고 바람을 쐬었다. 시원한 공기가 그녀를 어루만졌다. 다정한 바람과 달리 그녀는 시큰둥했다. 평화롭고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느적한 따분함에 그녀는 하품이 나왔다.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하는 이도 많았지만, 본래 사람은 가지지 못한 것을 더욱 갈망하는 기질을 가졌기에 선망과 질투로 하여금 모두 그녀를 원했다.
학창 시절에는 고백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에서 인기 많은 남자애가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인 채 엔젤라에게 편지를 주더라. 제 인기를 믿은 건지 사람 많은 복도에서 그가 잘도 용기를 냈다. 엔젤라가 오랫동안 반응하지 않으니 편지를 든 손이 벌벌 떨렸다. 그 모습이 가련해 주변에서 동정을 품고 웅성웅성 거린다. 야유가 섞여올 때쯤 그녀가 자비를 베풀었다. 엔젤라는 편지를 휙 가져오더니 눈앞에서 봉투를 찢었다. 배려 없는 손짓에 편지지까지 찢겼다.
망가진 편지를 보면서 남자애는 제 마음이 넝마가 되었다. 아직 고백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지만, 그는 제 미래가 훤했다.
"그렇군. 네 까짓 게 나를?" 엔젤라가 쿡쿡 웃더니 편지를 찍 반으로 갈랐다. 종이가 처참하게 찢기는 소리가 났다. 바닥으로 조각이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볼품없는 쓰레기로 전락한 편지를 엔젤라는 짓밟았다. 신발 밑창을 복도에 뭉개면서 그녀는 히죽 웃었다.
사랑을 몰라서 상처만 줬다. 저만한 인물이 없다며 타인을 거부했다. 어떤 짓을 일삼아도 다들 좋다고 달려들거나 억지로 미소 짓기만 하니 그녀의 패악질은 갈수록 짙어졌다. 추잡스러운 주변환경에 걸맞게 엔젤라에게 진심을 보여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전부 아름다운 여성을 예쁜 꽃 삼아 저를 돋보이게 할 속셈만 가득했다. 그녀는 가증스러운 얼굴 몇 개가 떠오르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지만 그녀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더라. 옆구리가 시리다는 착각에 시달려 그녀는 몸을 틀고 제가 아끼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은 입구부터 오래된 책 향기가 나서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는 도서관에 어울리지 않아도 엔젤라는 이 장소를 누구보다 자주 찾는 방문객이었다. 어릴 때부터 책이 좋았고 닥치는 대로 글자를 읽었다. 그 모습은 마치 굶주린 짐승과 비슷했고, 독서에 푹 빠진 그녀를 함부로 건들어선 안 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엔젤라는 책장에 그윽하게 눈길을 주며 이동했다.
"언제 봐도 깔끔하군." 이곳에서는 침묵을 유지해야 되지만 그녀는 그 규칙을 매번 어겼다.
어쩔 줄 모르는 사서를 뒤로 한 채 책장을 살폈다. 숫기 없는 사서가 성실했으니 책은 장르별로 구분이 잘 되어 있더라. 엔젤라는 히죽 웃고 책장에서 책 하나를 끄집어냈다.
"겉멋만 들었잖아." 종이를 넘기다 후기만 읽고 책장에 대충 올려뒀다.
그녀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간보다는 오래된 책이 좋았다. 책에 배인 쾌쾌 묵은 냄새가 은근하고도 묘한 안정감을 줬다. 관리가 안 되어 볼품없어진 경우에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와 반대로 오래되었어도 상태가 준수하다면 보물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귀엽게 발을 동동 굴리는 모습에 멀찍이 구경하던 사서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였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고전이었고 백과사전도 자주 읽었다. 오늘따라 낡은 표지가 눈에 띄었다. 오죽 풍파를 맞았는지 가죽에서 색이 다 빠졌더라. 하얀 손가락으로 책을 빼냈다. 책장 사이에서 꺼낼 땐 쉽게 빠졌고 품에 안으면 무게가 나갔다. 저절로 책을 든 팔이 아래를 향하니 엔젤라는 피식 웃었다.
백과사전은 방대한 지식에 고르는 책마다 묵직했다. 그녀는 백과사전을 고를 때마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책을 올렸다. 이토록 독창적인 책이 지금까지 왜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녀는 의구심을 품고 빨간 표지를 펼쳤다. 글자가 살짝 지워진 곳도 있었다. 그런 곳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문단을 마구 쓰다듬었다. 책이 글자도 못 품냐고 실실 쪼갰다.
"어?" 그 단어를 발견하기까지 엔젤라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재미없고 심심한 이 지루한 삶을. 평생 이렇게 살 거라고 생각했다.
"괴, 괴물꽃..." 목소리가 떨렸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펑펑 났다. 엔젤라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망이 되었다. 무수하게 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괴물꽃, 흉터, 주홍빛 머리카락, 파란 눈, 곱게 접힌 눈꼬리 그리고 헤나. 헤나!
"내 꽃! 내 꽃을 찾아야 돼!"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고요한 도서관에서 큰 소리를 내며 그녀는 책을 안았다. 서둘러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평생 간절한 적 없던 그녀가 복도를 숨이 차도록 뛰었다. 도도하게 걷기만 하던 그녀였으니 폐가 산소를 달라고 그녀를 조른다. 무거운 책이 품에서 흘러나오자 하얀 손으로 책을 받쳤다. 불편해도 그녀는 뜀박질을 멈출 수 없다. 숨이 막히고 땀이 삐질삐질 나도 엔젤라는 활짝 웃었다. 현재를 어영부영 보내던 그녀에게 맞이할 미래가 생겼다. 엔젤라가 태어난 이유를 찾았다. 마침내 삶의 목표를 기억해 냈다. 그녀는 꽃을 만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거야.
일단 꽃을 만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엔젤라는 오래전 습관대로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엔젤라는 괴물꽃의 어원을 고치고 싶었다. 어차피 괴물꽃이란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저뿐임을 아는 그녀는 정보를 정보로 덮어씌우고자 했다. 작가든 비평가든 무엇이든 좋아. 엔젤라는 꼭 글을 다루는 직업을 성취하고 싶었다.
여자가 대학을 갔으니 조롱하는 인간이 득실거렸다. 대학동기가 지나가다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부딪힘에 정돈된 서류가 죄다 떨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등을 그녀가 뚫어져라 바라봤다. 볼 안쪽을 곱씹으며 그녀는 단정하게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새하얀 종이에 찍힌 발자국에 휘파람을 불었다. 분노하던 예전과 달리 어떤 추파가 오든 엔젤라는 처음은 넘겼다. 무가치한 존재에 어울릴 시간 따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무엇을 하든 첫 인생에 비하면 간지러운 정도였다.
또각또각 목적지에 도착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땐 목숨이 오락가락했지."
그녀는 문 앞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저밖에 모르던 꽃이 떠올랐다. 선명한 그때처럼 몸을 되찾은 친구가 저를 마중하는 상상을 했다. 심장이 좀처럼 차분하게 굴지 않자 가슴 언저리를 꽉 쥐었다. 주름 없이 고왔던 셔츠가 손아귀로 인해 구겨졌다.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호흡을 천천히 넣었다가 뱉었다. 단정한 얼굴을 그려본다. 엔젤라는 목표가 있으니 절대 멈출 수 없다. 자고로 꿈은 이루어야 하며, 잠에서 깨야만 한다. 결단코 영원한 잠에 빠진 꽃을 되찾고야 말겠다. 상상을 현실로 꼭 이뤄내겠다며 심장을 진정시켰다. 엔젤라는 분명 친구를 만나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생이 마감할 때까지 줄곧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단 하나뿐인 단짝. 파랗게 눈을 접던 제 친구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난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 애꿎은 셔츠를 괴롭히던 손을 몸에서 떼내었다. 고요하게 손을 폈다. 하얀 손바닥 위에 주홍 머리카락을 그려본다. 당장에는 붙잡을 수 없는 환영이지만 곧 다가올 미래에는 머리카락을 헤집을 거라 다짐한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서류뭉치를 탁 쳤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종이를 스르륵 넘겼다. 모든 장은 존재했고 빠진 자료는 없었다. 만족스러운 제 작품에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평가한다.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엔젤라는 제 꿈에 가까워져야만 했다. 먼저 과제를 해치우자. 교수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며 그녀는 입꼬리를 이죽였다. 제게 전부를 바친 헤나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완벽한 발표부터 이끌어내 주지. 엔젤라는 방문을 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작가가 된 엔젤라는 소재를 위한다며 제멋대로의 여행에 타당성을 붙였다. 그녀를 담당하는 관계자는 예측할 수 없는 변덕에 골머리를 썩였지만, 엔젤라가 벌어오는 돈의 단위를 보고 있자면 용서가 가능했다. 우습게도 돈은 솔직하니까. 무엇을 써도 잘 팔리는 스타작가에게 누가 반기를 올리겠는가.
다음 작품은 여행에세이라며 그녀가 기차에 발을 올렸다. 철도를 굴러가는 바퀴는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웠다. 끽끽 쇠를 긁는 소리가 시작을 그녀에게 알렸다. 엔젤라는 서두르지 않고 가방을 짐칸에 올려둔 뒤 딱딱한 좌석에 앉았다. 때마침 뿌연 연기를 내뿜는 기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엔젤라는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태연하게 풍경을 만끽했다. 아직 도착지까지 거리가 남았지만 기차 안 창문에서도 하얀 성벽이 보였다. 변함없이 하얀 벽돌이 제 기억이 진짜였다고 알려주는 증거 같아서 연두색 눈동자가 그리움에 촉촉해졌다. 먼 과거지만 여전히 어제처럼 선명했다.
저 성벽에 손바닥을 대고 같이 걸었다. 언제나 둘이서 팔짱을 꼭 끼고 다녔다. 그녀에게 아련한 추억에 빠지지 말라는 듯 기차가 덜컹거렸다. 꽃한테 관대했던 그녀는 방해에도 히죽 웃었다. 무식하게 걸어 다니던 과거와 달리 엔젤라는 마차, 기차, 선박 등 여러 교통수단을 누렸다. 엔젤라는 특히 기차가 가장 좋았다. 헤나에게 꼭 기차를 알려주겠다는 마음에 저절로 휘파람을 불었다.
기찻길을 질릴만치 누볐을 때쯤 풍경이 뚝 멈췄다. 진동이 그친 좌석에서 엔젤라가 엉덩이를 떼고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내렸다. 그것을 옆구리에 건 채 좁은 문을 목표로 또각또각 나섰다. 머리가 바깥으로 향하자 햇빛이 눈부셨다.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그녀가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바람이 그녀의 등을 세게 쳤다.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엔젤라를 열렬히 환영했다. 덕분에 노란 머리카락이 환하게 뒤집어졌다. 그녀는 하얀 손으로 귓가에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넘겼다.
정거장이 멋진 곳에 자리 잡았더라. 내리자마자 하얀 성벽이 엔젤라를 반겼다. 제 기억 속 모습보다 낡아버린 성벽에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금방이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이곳은 꽃과 마지막을 같이 보냈던 도시였다. 여행가방을 불편하지 않게 고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만에 다시 온 건지 짐작도 되지 않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그녀는 예약해 둔 숙소에 가기 전 성벽을 따라 그려진 둘레길을 빙 돌기로 결정했다.
이 도시의 모든 샛길을 아는 엔젤라는 시장을 거쳤다. 여전히 이곳은 생기가 넘치는 즐거운 공간이었다. 오래된 내력을 자랑하던 주점은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잘된 일이었다. 그곳에서 갈색 머리를 마주쳤기에 그녀와 꽃이 헤어지게 되었으니까. 주점이 존재했을 장소에 엔젤라는 침을 뱉었다. 그리고 휙 돌아 계속 걸었다. 벌써 강가였다. 예전에는 돌을 밟고 물을 건넜다. 그러다 헛발질로 물에 첨벙 빠지기도 했지.
"이번은 수영장에 데려가야겠어." 헤나는 물에 처박힐 때마다 고개를 들지 않아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꽃을 떠올리자 장소가 금방 바뀌더라.
"오." 지금은 어엿한 다리가 보였다. 튼튼하게 건축된 다리를 건너며 엔젤라는 감탄을 자아냈다. 괜히 구두로 바닥을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돌다리가 무너지지 않는다며 깔깔 웃는 그녀는 어릴 적과 똑같았다. 들뜬 마음에 가방을 흔들대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관광객을 이끌던 가이드와 부딪쳤다. 가이드는 죄송하다며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고 기분이 좋았던 엔젤라는 너그럽게 넘어갔다. 꽃만큼이나 절친했던 호기심이 그녀를 쿡 찔렀다. 노란 머리카락을 쓱 넘긴 뒤 가이드를 뒤따라갔다.
공교롭게도 가이드와 엔젤라는 가는 길이 겹쳤다. 또각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구두를 신어 불편했지만 엔젤라는 멈추지 않았다. 곧 둘레길이었다. 헤나와 손 잡고 걸어가던 길을 머릿속에 그렸다. 싱그러운 초록 들판이 그녀를 마중할 거라고 엔젤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에 까만 꽃이 피었다.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둘레길을 따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꽃이 거리를 까맣게 장식했다. 엔젤라는 믿을 수 없어서 연두색 눈을 자꾸만 깜빡였다. 이곳에 헤나가 가득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어깨에 걸어두었던 가방은 끈이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제게 짐이 있다는 사실마저 망각한 그녀는 꽃한테 홀린 듯 발걸음을 뗐다. 따사로운 공기가 바람이 되어 엔젤라를 감쌌다. 마치 꽃이 어루만져준다는 착각에 빠져서 엔젤라는 사르르 녹아버린다. 포근하고 따뜻한 그리움이 그녀를 습격했다. 엔젤라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가 땅을 볼수록 꽃봉오리가 눈치 없이 끄덕이더라.
어수룩하고 바보 같지만 엔젤라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 입술을 감옥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강한 다짐을 증명하듯 하얀 손바닥에는 손톱자국이 새겨졌다. 아직은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라며 꿋꿋하게 버텨보지만, 그리움은 그녀가 무릎을 접게끔 사무치게 굴었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핑 돌아 엔젤라는 비틀거렸고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름다운 이국의 여행자가 쓰러지자 다들 웅성거렸다. 여성은 손을 건네고 남성은 가방을 들어줬다. 괜찮냐는 걱정 틈에서 엔젤라는 여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친구가 너무도 보고 싶다.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에서 그녀가 허우적거렸다. 이 분홍빛 연정 속에서 빠져 죽어도 괜찮겠다. 그때 멀찍이 떨어진 가이드가 팔을 벌리고 신나게 떠들었다.
"백 년 전부터 활짝 핀 까만 꽃을 보세요!"
일에 몰두한 가이드가 모두의 주목 속에서 꽃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백 년, 백 년이랬다. 그리도 오래되었구나.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엔젤라는 인생이 참 지루했다. 꽃과 비교하면 하찮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재미없는 삶이었다. 백 년은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헤나는 이 허무하고 빛바랜 시간을 어떻게 버텼을까. 꽃이 힘내서 버틴 만큼 그녀는 뒤따라가야만 했다. 설탕과자와 같은 그리움은 엔젤라를 숨 막히게 했지만 미래로 나아갈 의지를 줬다.
"이제 충분해." 엔젤라는 저를 도와주던 손길을 가볍게 벗어났다. 입꼬리를 히죽 올리고 여자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여성은 엔젤라의 예쁜 얼굴을 코앞에서 보자 볼이 빨개졌다. 짐을 들고 제 근처를 얼쩡거리던 남자한테 가방도 휙 되찾아왔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인파 사이로 가이드를 찾았다. 그녀는 또각또각 걸어 맨 앞까지 왔다. 가이드는 방금 부딪쳤던 낯선 이방인과 마주하니 수줍은 모양이다. 은근히 시선을 피하는 가이드가 답답해 엔젤라가 팔을 뻗었다. 시원스럽게 뻗은 손끝은 가이드의 멱살을 잡았다.
"꺅!" 비명과 덧붙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까만 꽃은 어디로 가면 더 볼 수 있지?" 엔젤라는 멱살을 제게로 이끈다.
"뭐, 뭐라고요?" 뻔뻔한 말투에 더욱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가이드는 입에서 물음표만 뱉었다.
"저 꽃 어디까지 폈어?" 엔젤라가 꽃을 향해 턱짓했다.
가이드는 제 역할을 잊고 시끄럽게 떽떽거렸다. 가이드한테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그녀는 손아귀에 힘을 줬다. 가이드가 컥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손을 붙들고 마구 몸부림쳤다. 엔젤라에게 아는 걸 전부 말하겠다고 맹세한 뒤에야 간신히 호흡을 허락받았다. 가이드는 입으로 헉헉거리며 산소를 갈구하는 폐를 급하게 달래었다.
"이 꽃길은 엄청 길어요.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시골까지 이어져있다고요." 가이드는 몰상식하게 구는 엔젤라에게 치를 떨었다. 얼른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주고 벗어나겠단 다짐에 저절로 말이 길어졌다.
"직접 걸어보시지 그래요? 이 까만 꽃은 흔하고 튼튼해서 이어진 길을 끝까지 지켰거든요."
가이드는 용기를 내 엔젤라를 째려봤다. 하지만 미간은 금방 풀렸다. 방금까지 낯선 이방인은 무척 무서웠는데 지금은 안쓰럽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연두색 눈에 비치더라. 서글픈 빛에 이끌린 가이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꽃이 까매서 취향을 많이 타죠. 하지만 칙칙한 색이어도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두 이 꽃을 사랑해요." 사랑이란 단어에 마주한 연두색 눈에서 생기가 차오른다고 느꼈다. 가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제 역할을 다한다.
"이 까만 꽃길은 당신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그냥 쭉 가면 돼요." 엔젤라는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가이드를 무심히 보다 손을 올렸다. 가이드는 두 눈을 꾹 감고 벌벌 떨었다. 너무 까불었냐는 후회에 어깨가 떨렸다. 상상했던 공포와 달리 하얀 손은 따뜻했다. 엔젤라가 정돈된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이 뒤집어진 얼떨떨한 가이드를 두고 그녀는 고맙단 인사 없이 까만 꽃길을 걷기 시작했다.
엔젤라는 묵묵히 걷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투박하게 바뀌었을 차 그녀가 드디어 눈치챘다. 엔젤라는 자신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뜀박질에 가방이 덜컹거렸다. 짐을 정리할 틈도 없이 이동한 탓이었다. 꽃과 그녀만이 존재하는 이 고요한 길 위에서 구두가 제 존재를 알렸다. 도도함을 자랑하는 딱딱한 밑창에도 그녀는 방긋방긋 웃었다. 불편한 발을 잊고 신난 목소리가 함께했다. 혼자여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그녀는 깔깔 웃었다.
하나뿐인 친구가 점점 가까워진다. 정말 간단했다. 엔젤라는 그저 걷기만 하면 됐다. 이어진 길 끝에 친구가 있을 테니까!
제 단짝은 한결같이 완벽했다. 미친 듯이 웃고 달리다가 엔젤라는 멈췄다. 땀이 눈에 들어갔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겼다. 노란 머리카락이 흰 피부를 가리지 못했다. 뚜렷해진 연두색 눈을 햇빛이 눈을 더욱 반짝이게 꾸며주더라.
연둣빛 안엔 까만 꽃이 실존했다. 화창한 날씨 아래 식물이 어여쁘게 꽃잎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엔젤라는 그 예쁜 이끌림에 홀려 길가에 핀 꽃을 보았다. 무엇을 봐도 예뻤고 어떤 것이든 귀엽지만, 다소곳하게 흔들리는 꽃 하나를 골라 꺾었다. 그녀는 곧장 하얀 손으로 꽃잎을 이끌어 제 귓가에 꽂았다.
불편한 신발로 길을 누비다 보니 엔젤라는 잠시 허리를 숙여 종아리를 주물렀다. 얼추 다리를 달랜 뒤 그녀가 몸을 휙 일으켰다. 노란 머리카락을 넘기며 주변을 보았다. 얼핏 보면 단풍으로 착각할 법한 나무였다. 추억과는 다른 색깔에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붉은 숲길을 외로이 걸었다. 그때는 잎이 까맸는데 지금은 빨간 잎사귀를 나무가 줄기차게 흔들더라. 기이하고 신기한 그 잎사귀를 보면 팔짱이 허전했다.
"매번 넌 끈질기게 붙어 다녔지." 엔젤라는 가방 끈을 세게 붙잡았다.
헤나가 가득한 꽃길을 이어진 대로 걸었더니 숲 속으로 들어가더라. 잎사귀가 태양을 가린만큼 엔젤라의 미간도 구겨졌다. 뼈에 각인된 익숙함, 제 트라우마를 대신해 붉은 잎사귀를 하얀 손으로 쭉 내렸다. 문짝도 없을 정도로 헐거웠던 그 건물이 지금까지 멀쩡할 리 없지. 버려진 헛간이 존재했을 자리는 풀로 우거졌다. 두꺼운 가지도 보였는데 그녀가 아는 식물 같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히죽 올리고 박수를 쳤다. 헛간은 사라지고 헤나만 남다니. 만족스러운 미래였다. 이파리가 부딪히는 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곳에서 손바닥끼리 부딪친다.
"완벽해." 짝짝. 짝짝짝. 그녀가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미련 없이 여정을 틀었다. 시간이 약이긴 한가보다. 되짚어보기조차 싫었던 기억인데 어느덧 옅어졌다. 엔젤라는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에 감사하며 붉은 숲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엔젤라가 고개를 올려 어두운 하늘빛을 즐겼다. 까만 우주에 하얀빛이 반짝반짝 많았다. 벌써 별과 달이 존재를 비추더라. 하늘만 봐도 꽃이 떠올랐다. 헤나는 이따금씩 하늘을 보며 키득키득 웃어댔다. 걘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이 까만 꽃길은 꽃을 제외하고서 깜빡이는 전등부터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알다시피 엔젤라는 꽃에 관대했다. 까만 꽃이 존재한다는 하나만으로도 엔젤라는 무거운 짐을 잊었다. 구름도 없이 맑은 날이라 달빛이 길을 환하게 비춰줬다. 은혜로운 서늘한 빛에 엔젤라는 미간이 느슨해졌다. 그러다 하품을 포옥 내쉬었다. 잠이 필요 없는 꽃과 다르게 엔젤라는 매일 꿈나라로 떠나야만 했다.
빛이 길을 인도해서 다행이었다. 그땐 하늘과 숲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면서 엔젤라는 긍정적으로 군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늘은 같았을 테니 어쩌면 하늘이 엔젤라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꽃을 업던 그녀를 하늘이 유일하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때와 방향만 다르지 목표는 그대로였다.
엔젤라는 여전히 친구를 위해 걷는다. 애처로운 헌신이 담긴 위대한 발걸음에 달빛과 별빛이 힘을 보태주었다. 세상이 밝아지자 멀리서도 표지판이 보일 정도였다. 화려한 표지판이 마을로 엔젤라를 이끈다. 촌스러운 페인트질에 엔젤라는 피식 웃었다. 가을만 되면 까맣게 타는 신비로운 숲! 고요한 밤에 다소 시끄러운 문장이었다. 엔젤라는 삐죽 그려진 그림을 매만졌다. 손에 물감이 살짝 묻어 나와 눈살을 찌푸렸다.
"축제를 시작하기엔 일렀군." 덜 마른 표지판이 마을의 첫인상을 배렸다.
전등 밑에서 숲을 보니 붉은 잎사귀가 더욱 빨갛게 보였다. 역시 확실하다. 이곳은 헤나와 처음으로 춤을 췄던 마을이었다.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여관으로 그녀가 들어갔다. 덜커덩 소리가 이곳을 미덥게 했지만, 엔젤라는 너그럽게 표정을 풀었다.
"한 명." 항상 두 명이라고 이야기했었는데.
친구를 떠올린 이후부터 엔젤라는 숫자가 신경 쓰였다. 하나와 둘. 일 더하기 일은 이. 그저 개수를 세는 단위일 뿐인데. 그깟 숫자가 고독을 안겨주더라. 친구를 향한 먹먹한 연정에 파묻히기 전 주인장이 책상을 내려쳤다. 탁상 위로 반짝거리는 열쇠고리가 보였다. 엔젤라는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뱅뱅 돌렸다. 열쇠를 곱게 다루라는 참견이 들려오지만 이미 뒤돌아선 그녀에게 닿았을지는 의문이다.
툴툴거리는 주인장과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숙소였다. 그녀가 기지개를 피고 문밖을 나선다. 뭐든 그러겠지만 준비단계는 볼품없다. 어수선하고 정해진 것도 안 보이고.
"예전이 낫잖아." 가을축제가 열리기 전이었으니 그녀에게 이 관광지는 볼일이 없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재미를 알겠다면서 엔젤라는 쭉 걸었다. 커다란 관문을 지나고 두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헤나가 새 옷을 입었지. 쉬지 않고 걸었으니 부쩍 피곤했던 그녀가 방문을 닫자 세상이 더욱 고요해진다. 커튼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천이 나부낀다. 서늘한 공기가 그녀를 상쾌하게 이끌었다. 엔젤라는 창문가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바깥은 자그마한 불빛이 하늘과 더불어 세상을 밝게 꾸며주었다.
"운치가 좋군." 엔젤라는 창틀에 팔을 늘어놓고 하늘을 맛보았다.
꽃이 하늘을 종종 올려다보는 이유를 알겠다며 턱을 괴었다. 아무리 피로해도 헤나를 떠올리면 힘이 난다. 엔젤라는 창틀에서 몸을 뗐다. 찌뿌둥한 신체를 이리저리 돌리며 관절을 풀었다. 폭신한 침대가 보이자 냅다 몸을 맡겼다.
늘 붙어서 같이 잤는데, 침대가 아무리 넓어도 둘한테는 비좁았는데. 엔젤라는 침대 커버를 꽉 붙잡았다. 배려 없는 손아귀에 보드라운 이불은 잔뜩 주름이 졌다.
무엇이든 죄다 친구로 귀결된다. 쉽게 온몸을 내던지는 엔젤라와 다소곳하게 뒤따라가는 헤나. 헤나는 옷이 구겨지지 않도록 점잖게 자리를 살폈지. 단정한 복장 반듯한 얼굴. 아, 보고 싶다...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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