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이 실린 공격은 강력했다. 더욱이 엔젤라는 마력이라곤 하나도 없어서...
급하게 아주 급하게 꽃은 제 몸을 복구했다. 멀쩡해진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덮었다. 피가 철철 났다. 상처가 벌써 갈색빛이었다. 하얀 피부에 빨간 피가 닿아서 그래. 절대 마법 때문에 살이 썩는 게 아니어야만 해!
자꾸만 손가락 사이로 핏물과 진물이 샜다. 꾹꾹 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엔젤라의 터진 옆구리에서 생기가 넘쳐 나와 빨갛게 축축해진다. 헤나는 펑펑 울면서 그녀의 얼굴도 살폈다. 엔젤라는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끔찍한 통증에 허우적거렸다. 그녀가 헤나의 어깨에 얼굴을 풀썩 기댔다. 피부에 닿는 호흡이 점점 약해진다. 따뜻한 피가 빠져나가면서 체온도 같이 앗아갔다. 꽃은 차갑게 늘어지는 엔젤라를 견딜 수 없어서 도와주라고 울었다.
원하는 걸 무엇이든 줄게요. 부르는 게 값이라던 제 꽃을 전부 드릴게요. 부디 자비를. 저를 얼마든지 뜯어가도 괜찮아요. 제발 그녀를 구해주세요.
헤나가 울고불고 외쳐도 적막했다. 망가진 집안은 직접 생을 마감시킨 시체뿐이라 헤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엔젤라가 숨을 미약하게 뱉는다.
"미, 미안해... 미안해... 앤지, 많이 아프지? 미안해..."
헤나는 연달아 사과를 내뱉으며 그녀를 등에 기대게 했다.
친구에게 등을 절대 허락하지 않던 엔젤라는 창백한 얼굴로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헤나가 걸음을 배울 때마다 엔젤라는 걸음이 서툰 꽃을 이고 다녔다. 이제는 반대가 됐다. 하필이면 그때 받은 은혜를 지금 갚아야 되는 걸까?
"너무해, 너무해......" 헤나는 울었다.
연약한 인간의 숨결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조급해진 헤나가 축 쳐진 엔젤라를 들쳐 엎고 피 비린내가 난무하는 끔찍한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무거운 뿌리를 뗐다. 발바닥에 들러붙은 뿌리가 시체를 무시했다. 이건 놀라운 변화였다.
꽃은 그녀가 당한 만큼 늘 보복으로 갚았다. 그녀를 아프게 건든다면 고통을 몇 배로 돌려줬다. 누군가는 몸이 녹았고 어떤 이는 머리가 밟혀 깨졌고 한 마을은 벌레가 장악하도록 내버려 뒀다. 잔학한 짓을 행했던 꽃이 죽은 갈색 머리를, 직접적으로 가해를 일삼은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
옆구리를 틀어막아도 피가 삐질삐질 샜다. 헤나는 조심스레 한 걸음씩 옮겼지만, 발자국은 깨끗하지 않았다. 꽃이 평온하지 않으니 발에서 계속 뿌리가 자라났고 헤나는 그 뿌리를 뜯어내면서 앞만 봤다. 바라보는 고개와 반대 방향으로 뜯긴 뿌리가 늘어날 때마다 어둠이 헤나를 집어삼키려고 달려들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꽃은 영원을 갈망했다. 늘 엔젤라를 삼켜서 제 안에 품기만을 기다렸다. 타인에게 양보할 바에야 시체를 가져버리겠다는 음침한 소원이 드디어 가능성으로 피어오르기 직전이었다. 원하던 그때가 다가왔을 뿐인데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은 뭘까. 마음이 곤두박질친다.
헤나는 무엇보다 땅과 가깝고 대지와 비슷하다. 뿌리를 뗐어도 근본은 단단한 그곳에 속했다. 그러나 한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닿을 수 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마침내 세상의 이치를 어긴 괴물꽃에게 하늘이 천벌을 하사했다.
헤나는 발에서 자라나는 뿌리를 쭉 잘라냈다. 꽃이 만들어낸 발자취는 복잡한 만큼 무거웠다. 검붉은 피, 하얀 씨앗, 더러운 살점. 그리고 서글픈 향기를 땅에 버무렸을까. 움푹 파인 발자국에서 위험한 독기가 올라온다. 헤나는 땅이 썩든 아랑곳하지 않고 어두운 숲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딜 가든 공동묘지는 존재한다. 불쾌한 고요뿐인 이 공간은 누구에게나 공포를 주었지만 헤나는 편안했다. 꽃한테 작은 안도감을 보내는 이 척박한 땅에 조심히 그녀를 내려뒀다. 그녀가 아까보다 더 하얘져서 꽃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으로 바라보기 힘들어서 대신 팔을 움직였다. 흉터 끝에 줄곧 간절히 바랐던 그녀가 닿았다.
헤나는 제 인생의 대부분을 바치고 가장 익숙한 공간인 공동묘지에서 엔젤라를 껴안았다.
"숨 막혀..." 엔젤라는 툴툴거려도 그냥 가만했다. 움직일 힘도 없어서.
다시 옆구리는 피를 쿨럭 내뱉더라. 헤나는 제 보물에게서 생명력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포옹을 풀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덮었다. 두 손을 모아 옆구리를 강하게 틀어막아도 식물의 손이 빨갛게 물들어버릴 뿐 변함없이 피가 샌다. 그녀는 벌써 입술까지 파래졌다. 본래도 뽀얗고 예쁜 얼굴이지만 이건 너무 하얗잖아. 이럴 순 없잖아. 엔젤라와 손에 깍지를 낄 때마다 손이 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제 기억이 맞는지 꽃은 의문이 든다.
추억하던 열기가 흔적도 없이 옅어지더라. 파편난 시야가 신기루처럼 일렁거린다. 꽃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엔젤라는 언어를 잃은 식물이 답답해 억지로 손을 올렸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팔로 머리를 쳐버렸다. 그래도 너그러운 나의 꽃은 이 정도는 용서해 주겠지.
"야, 네가 자연에서 쭉 봤던 게 뭐야?"
"순환."
"똑똑하긴. 정답을 알잖아..."
시체가 썩어 흙에 스며들면 그 자리에서 파랗게 꽃이 핀다. 팔이 힘없이 미끄러졌어도 그녀는 부드러운 뺨에 손을 올렸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었다. 엔젤라는 헤나를 볼 때마다 자꾸만 만지고 싶었다. 다정한 눈길이 탐났다. 쉽게 붉어지는 네 피부는 따뜻했다.
"너 정말 완벽하다..."
그녀는 항상 헤나에게 관대했다. 옷이 시뻘건 녹을 자랑 해도 엔젤라는 평소처럼 조잘거렸다. 그러다 기침을 했다. 쿨럭거리더니 입에서 피가 나왔다. 그녀는 제 상의에 묻은 피를 보더니 미간을 구겼다.
이제 헤나는 신에게 조롱 대신 기도를 바친다. 신이시여 제발 그녀 대신 제가 아프게 해 주세요. 눈빛이 흐릿해진 엔젤라를 보면서 헤나는 습기가 차 썩어간다.
엔젤라가 눈가에 간신히 힘을 준다. 반짝거리던 연두색 눈에 빨간 실핏줄이 번지더라. 헤나는 대답도 못 하고 그저 늘어진 엔젤라를 소중히 껴안았다.
"그동안 못 잤던 잠이나 푹 주무셔..."
엔젤라는 힘을 끌어모아 저밖에 모르는 꽃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자상한 손길이 펼쳐질 때마다 피가 넘쳐 웅덩이를 만든다. 그녀는 친구에서 짐짝이 됐다. 그래서 스스로를 버릴 준비를 한다. 여태껏 꽃이 대답을 돌려주지 않지만 나무랄 기운이 없었다. 엔젤라가 땋은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예쁘네. 실력이 언제 이렇게 늘었냐..." 어깨를 매만지고 헤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엔젤라를 잡아먹을까? 내 품에 넣을까? 그녀를 땅에 돌려줘야 될까? 어떡하면 좋지?
헤나가 태양 대신 엔젤라를 믿기로 한 것은 이때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냥 꿈이나 꿔. 나중에 네 방문 두드릴 테니까."
언제나 엔젤라는 멋대로 굴어도 약속을 꼭 지키잖아. 그녀는 반드시 꽃을 찾아올 거야.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기적이 일어났음에도 비극은 함께였다. 그녀를 믿어도 헤나는 자신을 믿지 못했다. 엔젤라가 안도를 무한정 베풀어도 헤나는 밑 빠진 겁쟁이였다.
"내, 내가 널 못 알아보면 어, 어떡해...?"
딸꾹질이 웃기다면서.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있냐고 엔젤라가 헤나를 놀린다.
"헤나. 내 휘파람 소리 기억하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그렇게 함께였는데. 당연하지. 헤나는 엔젤라가 휘파람을 불 때마다 설렜다. 무뚝뚝한 그녀는 사실 습관이랄 게 없었다. 어릴 적 조우한 바보 같은 꽃이 휘파람 소리를 신기해하며 또 해주라며 또, 또 거리며 조르지만 않았어도 그런 습관은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친구가 좋아하니까 엔젤라는 종종 휘파람을 불었다.
끝이 다가오자 헤나의 시야는 깨지고 온 세상이 새까매졌다.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눈알이 빠지도록 주룩주룩 눈물은 삐져나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인간을 흉내 내지 말 걸. 시작을 후회했다. 사모하는 당신은 옅어지는 와중에도 아름답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헤나는 내뱉지 못했다. 드디어 용기라는 비루한 것이 헤나에게 왔다. 줄곧 꽃은 당신에게 사랑을 조르고 싶었다.
"나 많이 사랑해?"
쭉 물어보고 싶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질문했다. 헤나는 엔젤라가 놀렸던 만큼 미련하고 어수룩하고 바보 같은 괴물꽃이다. 엔젤라가 겨우 손을 올려 늘 그렇듯 눈가를 살살 어루만져줬다. 그리고 상냥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아. 사랑해. 착한 나의 꽃."
헤나는 길을 잘 찾았다. 죽어버린 당신을 안고 왔던 길을 돌아왔다. 옷은 바스러진 채 인간을 흉내 낸 나체를 이끌고 터벅터벅 걸었다. 온기를 잃고 뻣뻣해지는 그녀가 견디기 버거워 꽃은 사모하는 당신의 흔적을 찾았다. 본능처럼 꽃은 늪지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엔젤라와 꽃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앞으로 이뤄질 수 없는 미래였지만 꽃은 미련이 징글맞도록 남았다. 품에 그녀를 안고 추접스럽게 무릎을 구부렸다. 한 손으로 무너진 잔해를 뒤졌다. 중간중간에 보이는 시체는 그냥 찢어버렸다. 원하는 물건이 나올 때까지 헤나는 잔인한 행동을 이어갔다.
몇몇 시체에서 손과 발을 뽑은 뒤에야 찾던 형체가 보였다.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인형이 우락부락한 시체밭 사이에서 눈에 띌 리 없지. 헤나가 인형에게 손수 입혔던 치마는 너덜너덜해져서 옷인 줄도 모를 지경이었다. 엔젤라가 그 인형을 거꾸로 들어서 장난쳤던 모습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헤나는 앞이 흐려졌다. 꽃이 엉엉 울었다. 지붕이 무너져 의자는 망가졌고 인형은 전부 짓이겨졌다. 인형도 꽃도 멀쩡한 건 하나도 없었다. 헤나는 죽어버린 당신을 바라봤다. 공허한 눈을 파랗게 깜빡였다. 당신은 뒤돌아있어도 매번 제 시선을 예민하게 알아챘잖아요. 저 계속 울고 있잖아요. 부디 제 눈물을 닦아주세요.
간절한 바람에도 벙어리가 된 당신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꽃은 잠든 모습을 좋아했지만 수다쟁이인 그녀가 훨씬 좋다. 가벼웠던 입술은 비밀을 지키는 파수꾼이 될 거야. 무거운 눈꺼풀은 절대 열리지 않겠지. 꽃은 망가진 인형을 그녀 대신 땅에 묻고 일어났다. 죽어버린 당신이 조금이라도 자세가 편하길 바라며 꽃은 품을 고쳤다.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다. 헤나는 조금이라도 그녀를 상기해야만 했다.
죽어버린 당신과 함께 걸었던 둘레길을 빙 돌았다. 누군가 손가락질했지만 추모하기 바빴던 꽃은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맨발자국에서 씨앗이 남았다. 우수수하게 떨어지는 하얀 씨앗이...
어느 용기 있던 자가 알몸으로 길을 걷던 헤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자는 거칠게 꽃을 제게로 꺾으면서 화를 냈다. 길거리에서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주섬주섬 제 앞치마에 손을 댔다. 그녀의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꽃은 눈물을 자아냈다.
"앤지가 눈을 뜨지 않아요..." 헤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과 함께 꽃 향기가 났다. 인간은 서글픈 향을 맡자 눈물샘이 빠질 만큼 물이 나왔다. 마음이 시큰하게 저려오면서 팔다리가 잘리는 느낌이 났다. 어마어마한 슬픔에 인간은 어쩔 줄 몰랐다. 꽃이 시드는 자태와 비슷하게 다들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고 엉엉 울었다. 모두 사모하는 당신을 추모한다. 당신이 숨을 쉴 때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신이 죽은 뒤에야 인간이 슬픔에 동조하더라.
헤나는 오지랖을 부리던 여성이 울부짖는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봤다. 꽃이 사모하는 당신을 꼭 껴안고 뒤를 돌았다. 발자국에서 파란 씨앗이 텼다. 눈물을 머금은 씨앗이 길가를 따라 빼꼼빼꼼 존재를 알렸다.
꽃이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겼던 검은 숲에 발을 옮겼다. 죽어버린 당신은 꽃을 닮은 이 잎사귀가 아름답다고 했다. 새침했던 목소리를 떠올리며 헤나는 차가운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혼자 버텼던 헛간을 찾고 싶었다. 헤나는 처음 가는 길도 헤매지 않고 곧장 찾았다. 푸석한 가시덤불을 맨발로 밟고 길을 만들었다. 시선 앞에 허름한 헛간이 보였다. 문짝도 제대로 달려있지 않아서 꽃은 당신을 안은 채로 건물 안을 쉽게 들어갔다.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안은 곰팡내가 조금 났고 푸른색이 가득했다. 헤나는 벽에 시선을 두다 바닥으로 고개로 숙였다. 썩은 밀짚 위에 나무가 보였다. 머리 없는 육체는 딱딱한 가지가 되어 헛간 내부를 장악한 지 오래 같다. 벽도 바닥도 모두 덩굴이 그득하게 붙었고, 형언할 수 없도록 여러 종이 섞였다. 처참한 광경 밑에서 꽃은 눈물이 핑 돌았다. 볼품없고 불쾌한 이곳에서 자리를 지킨 그녀가 대견했다. 헤나는 노란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유달리 설레지 않더라.
"어떻게 혼자 버텼니..." 요동치는 꽃을 알아채지 못하고 곤히 잠든 당신은 모질었다.
헛간에서 그녀는 제 팔을 베고 잤다고 했다. 나무로 변질된 저 육체가 그때의 온기를 품었겠구나. 딱딱한 가지를 베개로 쓸 생각을 하다니. 꽃은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뭉클함에 온몸이 데워지더라. 바보같이 헤헤 웃기도 했다. 이렇게 웃으면 사모하는 당신이 손을 뻗어 볼을 잡아당겼는데 이제는 묵묵히 잠만 잔다.
"너무해... 일부러 무시하는 거지?"
매정한 당신이 침묵을 일삼아도 당신은 변함없이 사랑스럽다. 헤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얀 씨앗이 잔뜩이었다. 손바닥을 뒤집어 씨앗을 사정없이 떨궜다. 더러운 방이 더욱 어질러졌다. 할 일을 끝낸 꽃은 그녀를 껴안고 돌았다. 문 없는 헛간을 맨발로 나섰다. 씨앗을 흩뿌려놨음에도 여전히 많았는지 발자국에도 씨앗이 묻었다.
기다란 검은 숲길을 꽃은 소리 없이 걸었다. 손잡고 걸었던 이 길이 지루한 적은 없었는데. 걸어도 끝이 없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는데. 죽어버린 당신과 함께하니 왔던 길이 낯설었다. 하얀 부스러기를 남기면서 헤나는 계속 걸었다. 품속의 그녀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거나 자세를 고치기도 했다. 꽃은 고개를 올려 주변을 빙 둘러봤다. 끝이 그을린 나뭇가지가 보였다. 어느새 꽃은 제 기억이 뚝 끊겼던 지점까지 도착했다. 헤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서 인간성을 지웠다. 밑으로 추락하는 느낌에 시선을 아래로 슥 내렸다. 땅은 멀쩡했고 꽃한테 매끈한 다리가 붙어있었다. 괜히 품속의 냉기가 사무치도록 추웠다. 굳어가는 당신이 헤나에게 영원한 겨울을 선물했다.
사모하는 당신이 춤을 선보였던 근사한 마을에 도착했다. 가을축제로 활기찼던 그 마을은 완벽한 고통의 군락지가 되었다. 원망스러운 마법사가 말했던 내용처럼 사방에서 벌레가 득실거렸다. 쾌쾌 묵은 공기와 귀를 울리는 투명한 날갯짓이 가득했다. 코가 썩어버릴 정도로 자극적인 냄새가 났다. 인간이라면 멀쩡히 설 수 없을 장소였지만, 그곳에 인간이라곤 없었다.
헤나는 파리가 윙윙 거리며 품속에 다가오자 공허한 눈을 파랗게 내비쳤다. 하찮은 미물은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를 테지. 보잘것없는 파리 한 마리로 하여금 꽃은 달콤한 향을 내뿜었다. 징징 울리던 작은 날개는 바삐 움직여 벌레에게 비상할 힘을 줬다. 그랬던 날갯짓이 점차 생기가 흐려졌다. 날개 위로 비치는 검은 선이 보일 때쯤 파삭한 소리가 났다. 으깨진 파리가 발자국을 더럽게 꾸미더라.
품속에 차가운 당신이 있는데도 꽃은 까맣던 꿈속을 헤맸다. 사모하는 당신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상인이 팔던 술을 홀라당 마셔버린 당신. 훔친 탬버린을 쳐대며 치마를 나풀대는 당신. 그릇으로 남자의 머리를 깨버린 당신. 그리고 서서히 또각거리며 다가오는 당신이 보였다. 과즙이 이마로 한아름 내려올 때 당신은 머리카락을 시원하게 뒤로 넘겼다. 삐죽 나온 잔머리를 정리해주고 싶어서 헤나는 저절로 손이 올라갔다. 손 끝에 하얀 살결이 닿아야 하는데 흉터는 당신을 통과했다. 꽃은 또 눈물이 났다.
길을 되돌아가기는 이토록 쉬운데 그녀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거슬러 올라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걸어도 좋으니 그녀가 끝에 있었으면 좋겠다. 허황된 상상을 곱게 포장하면서 헤나는 쭉 걸었다.
노란 민들레가 바람에 나풀거렸다. 봉오리가 끄덕끄덕 고갯짓을 하니 둘을 마중하는 모습 같았다. 어느새 옆마을에 도착했다.
"앤지, 저 집 기억나?"
죽어버린 당신에게 꽃이 속삭였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애처롭다. 은빛으로 빛나는 당신을 대신해 노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살은 은빛 머리카락은 금빛. 당신이 꽃을 떠났어도 아름다움은 이곳에 있었다. 눈부신 당신을 보다 간신히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머물렀던 이층 집이 보였다. 추억이 담긴 장소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꽃은 이층만 보면서 발을 옮겼더니 발자국에서 파란 싹이 났다.
헤나는 직접 가꿔낸 까만 화단을 죽어버린 당신과 걷는다. 비록 당신이 수줍음을 타 아무런 대화도 없었지만.
"헤나다!"
어른보다 어린이가 먼저 반응했다. 인사도 없이 사라진 헤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멋진 어른에게 오도도 뛰며 들뜬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어린이는 다가올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그도 그럴게 반가운 얼굴이자 미래의 본보기인 헤나가 알몸이었다. 두른 것 하나 없이 광장에 떡하니 모습을 보였다.
꽃이 단정한 얼굴을 보였다. 되려 얌전하게 눈꼬리를 접어 인사했다. 다들 정중한 행동에 이상한 게 어느 쪽인지 헷갈렸다. 운 좋게 여럿이 모였으니 한 명은 진실을 알아챘다. 귀여운 짝사랑을 보여줬던 소년은 꽃을 보자마자 손을 얼굴에 올리고 비명을 질렀다.
"저 얼간이 녀석."
소년의 어리숙한 모습에 어른은 혓바닥을 쯧쯧 찼다. 머쓱해진 한 남자가 도망친 소년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거, 무슨 일 있소? 옷도 없이..."
"이곳은 광장인데 체통을 지키는 게 좋지 않겠나."
무례한 행동은 소년을 오래 가리키진 않았다. 금방 손가락이 헤나로 향했으니까.
그때 꽃이 까맣게 폈다. 너무나도 서글픈 향기가 서서히 퍼졌다. 슬픔은 코로 들어가 온몸을 채워갔다. 향기를 맡은 이들은 출처 모를 까마득한 그리움에 시달렸다. 손가락은 접혀 주먹이 되었다. 그 주먹으로 홍수처럼 내뱉는 눈물샘을 문질렀다. 오죽 슬펐던지 순식간에 눈이 퉁퉁 부을 지경이었다. 인간은 누군가를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에 동조했다. 행동은 대게 비슷비슷했다. 손톱이 뒤집어지게 흙을 긁거나 무릎 꿇고 흐느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꽃과 다르게 인간은 우느라 구부정해진 등만 보였다. 인간의 필연적 정서는 꽃한테 조금이나마 위안을 줬다. 모두가 처절한 슬픔에 빠져 바닥에서 차가운 당신을 숭배했다.
꽃은 노란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자리를 옮겼다. 헤나가 떠난 뒤로도 눈이 빠지게 모두 울어댔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눈물샘이 진정했다. 시뻘게진 눈 위로 천을 대면서 어른은 제 손가락을 분지르고 싶었다. 이 거리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한 건 도주한 소년이었으니.
굳어버린 당신은 불편함을 모르겠지만, 꽃은 그녀를 위해 품을 고쳤다. 꼿꼿한 자세로 언덕 위에서 죽어버린 당신을 따라 했다. 파란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그 끝에 볼품없이 초라한 그녀의 고향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서쪽 동굴을 살폈다. 무너졌단 과거의 소문답게 입구는 돌더미로 꽉 막혀있었다. 돌더미에는 덩굴이 어우러져 회색과 녹색이 조화롭게 섞였다. 그 광경을 보니 꽃은 우물이 떠올랐다.
터벅터벅 걸으면서 깜빡일 필요가 없는 눈꺼풀은 공허한 눈을 아낌없이 공개했다. 파란 눈에 햇빛이 비췄다. 눈이 부시다는 감각에서 죽어버린 당신이 또 떠올랐다. 태양을 피해도 이 거리는, 이 강가는, 이 마을은 전부 죽어버린 당신이었다. 어디를 봐도 당신뿐이었다. 꽃과 소녀는 매일 함께했고 유년기를 같이 보냈다. 추억이 쌓고 쌓여서 넘치도록 많았다.
헤나는 품속에 실존하는 당신이 있어도 환상에 푹 빠졌다. 그녀의 키를 따라 하고 강가에서 다시 물을 튀기며 놀고 싶다. 꽃을 물에 처박다 깜짝 놀라던 당신이 아직도 선명하다. 우물에서 꽃이 목마를까 봐 직접 밧줄을 내리고 당겼던 저만의 소중한 당신. 소중한 당신이 작은 손으로 떠주었던 물은 무엇보다 달고 맛있었다.
하얀 민들레밭을 지났다. 조금만 더 가면 죽어버린 당신이 직접 만든 돌무덤이 있다. 헤나는 지금까지 똑같은 보폭을 유지했는데 갑자기 발이 땅으로 푹 꺼졌다. 발바닥이 흙과 합쳐지는 것 같았다. 꽃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봤다. 메마르고 딱딱한 땅이 늪지가 되어 밑 없이 굴었다. 헤나는 흙 속에서 몸을 휘적거렸다. 빨리 저곳에 닿고 싶었다. 다리가 뿌리가 되었다. 뿌리는 유유하게 흙을 헤엄쳤다.
어렵지 않게 죽어버린 당신과 함께 무덤에 닿았다. 꽃은 달콤하게 그 무덤을 바라보았다. 가꿔주는 사람이 없이 방치된 이 무덤은 지저분했다. 헤나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으로 먼지를 살살 쓸었다. 찾아오지 않는 무덤을 만들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찬란한 은빛이 된 당신을 보았다. 꽃의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앤지, 앤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은 기껏해야 철이 조금 빨리 든 어린애였는데.
"쭉 건강할 줄 알았어. 앞으로도 너, 너랑 같이......"
울음이 말을 먹었다. 죽어버린 당신이 그리워 꽃은 입이 없던 그때로 점점 되돌아갔다. 말이 어눌해지자 헤나는 허둥지둥 시선을 돌렸다. 무덤이 보였다. 당신의 흔적에 꽃은 평온을 자그맣게 되찾았다. 투박하고 서툴게 지어진 이 삐뚤빼뚤한 무덤은 오래된 둘만의 아지트였다. 어릴 적 당신은 툭하면 비석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비석을 돌로 긁었던 기억이 생각났다.
안타깝게도 그어진 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니 마치 품속의 당신이 맞이할 미래일까 봐 이가 달달 떨렸다. 기어코 당신은 꽃을 떠나 사라지고 마는 걸까? 괴물꽃은 여전히 식어버린 태양만을 갈구하는데 어찌 이럴까.
언어를 잃어버린 식물은 가지로 변해가는 팔을 올렸다. 덩달아 품 안의 당신도 인간을 흉내 낸 얼굴에 가까워졌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저를 떠난 당신이 어루만지던 얼굴이 무너진다. 피부가 축 늘어지고 눈물이 너무 나와서 눈알까지 뱉었다.
괴물꽃은 슬픔을 멈출 수 없다. 사모하는 당신이 제게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사모하는 당신을 담았다. 은빛 살결, 금빛 머리카락. 시작점에 도착해서야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했다. 헤나에게 세상은 당신이었다. 온 세상이 당신이었다. 이토록 가까운데 그녀가 시선을 돌려주지 않아서 꽃은 서러웠다. 차갑게 굳은 당신을 엉성하게 껴안았다. 힘없는 덩굴이 자꾸만 풀렸지만 그리운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
괴물꽃이 끝없이 애도를 펼치자 주변은 향기가 깃든 안개가 자욱해졌다. 늑대는 알 수 없는 향기에 위협을 가했지만 이내 낑낑거렸다. 짐승이 사람을 대신해 울더라. 마치 장례식장 곡소리와 비슷했다. 기괴하고 께름칙한 이 소음은 제 향기 때문이란 사실은 괴물꽃은 결코 알지 못할 테지. 흉측하고 징그러운 괴물꽃은 사람을 좋아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에게 바라던 대답도 받았다. 헤나는 기적을 이루었다. 첫사랑이 성공했으니까.
꽃은 죽어버린 당신과 애달픈 사랑을 했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따라 했다. 괴물꽃이 흉내를 그만둘 날이 오기나 할까? 괴물꽃은 잠든 당신을 보자 왠지 모르게 졸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헤나는 하품을 했다. 괜히 쑥스러워서 꽃이 헤헤 웃었다.
"사랑해, 네가 너무 좋아.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을게..."
곱게 접힌 눈을 마지막으로 헤나는 찬란한 황금빛 행복과 함께 땅으로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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