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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19. 헤나(1)

by 넴 박 2024. 7. 28.

까만 꽃길에 서 있던 엔젤라는 동쪽을 봤다. 그곳에서 태양이 하얀 동그라미를 살짝 뽐내자 발을 뗐다. 친구가 무슨 생각으로 이 까만 꽃길을 만들었을까. 헤나가 뿌려놓은 씨앗은 어디까지 이어졌을까. 꽃이 남긴 발자취는 커다란 유언장이자 이정표였다. 엔젤라가 길을 헤맬까 봐 친히 온갖 곳에 흔적을 남겨둔 사랑스러운 친구였다.

"펑펑 우느라 걘 기억도 못 할 테지만." 헤나가 벙어리였어도 이토록 심심하진 않았다. 꽃한테 입이 있든 없든 둘이서 함께라면 행복할 텐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들떴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헤나가 직접 심은 까만 화단이 보였다. 어딜 가도 꽃이 함께라 엔젤라는 속이 간질거렸다. 철부지였을 시기에는 제 심장이 낯설어지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제 엔젤라는 간음을 꿰뚫은 어른이다.
그녀에게 헤나만 있다면 행복할 텐데. 무료한 하루하루가 빛날 텐데. 엔젤라는 연두색 눈동자에 그리움을 가뒀다. 애타는 마음을 참으니 눈동자가 촉촉하게 반짝거렸다. 
 
함께했던 장소에 혼자 오니 외로움이 부쩍 눅눅해진다. 텅 빈 옆구리가 허전하다. 또각또각 걷던 엔젤라 앞에 민들레 씨가 날렸다. 하얀 솜털이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다녔다. 그녀가 잠시 멈춰 바닥을 봤다. 까만 꽃 군데군데 노란 민들레가 보였다. 그녀가 몸을 숙여 솜털을 건드렸다. 손길이 닿자마자 씨앗은 공기 중에 환하게 퍼졌다. 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을까.

"나도 날씬하지만 솜털만큼은 아니지." 그녀가 민들레를 노려보다 구두 앞코로 흙을 슥슥 긁었다. 민들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부꼈고, 옆에서 민들레를 따라 흔들리는 까만 꽃을 봤다. 귀여운 몸짓에 흙을 괴롭히던 발길질이 너그럽게 그쳤다.
 
꽃이 글자 대신 남겨놓은 까만 꽃을 따라 걷는다. 저만 친구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를 쌓지 않았구나. 헤나도 마찬가지로 넓은 대지 위에 친구가 보고 싶다고 길게도 적어놨다. 작가이자 열띤 애독자인 그녀는 책을 끝까지 읽는 기쁨을 안다.
반드시 결말까지 걷겠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결말이었다. 세상의 끝에서 꽃이 그녀를 기다린다. 들뜬 마음에 엔젤라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또각거리는 구두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녀는 제 취향에, 제 눈썰미에 맹세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 지금은 뛸 수 없는 이 구두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방해되는 신발을 벗고 흰 양말로 흙을 마주하려고 했다.
기억났다, 꽃은 늘 맨발이었다. 지금처럼 정돈된 화단에 바닥도 고운 흙이 아니었던 그 시기에 어떻게 맨발로 다녔을까. 꿋꿋하게 맨발을 고집하다가 결국 성당에서 한 소리 듣고 말았지. 혼난 네 얼굴 귀여웠어. 시무룩한 얼굴을 보니 달래주고 싶었고 축 처진 눈썹을 보니 웃음을 주고 싶었다. 다시 헤나를 만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향에 다가갈수록 하늘이 어스름해졌다. 고작 하늘이 바뀌었을 뿐인데 도착이라며 그녀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제 고향이었던 촌스러운 시골은 변함없었다. 깔끔했던 까만 꽃길이 너저분해지고 마주치는 인간마다 추레했다. 나름 백 년이란 시간을 보냈는지 시골에 건물이 많이 생겼다. 엔젤라는 걷다 추억과 똑같은 건물이 봤다. 건물 사이로 낡게 솟은 그 집은 타락한 부랑아가 자주 갔던 성당이었다. 돌 넣은 수프마저 그리울 때가 온다며 엔젤라는 입맛을 다진다. 다른 흔적을 찾던 중 그녀는 깨달았다.
 
"하하, 하하하!"
그녀가 난데없이 길가에서 웃으니 주변에서 수군거렸다. 꼴좋다. 엔젤라는 실컷 웃어서 배가 땅길 지경이었다. 만족할 만큼 시끄럽게 군 뒤에야 자리를 옮겼다. 고향에서는 빵집, 중앙에서는 주점.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곳만 망해버리니 엔젤라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다시 태어나 두 번째 인생을 만끽했으니 그녀는 괜히 자신이 할머니가 되었다고 느꼈다. 엄밀히 따지면 그녀는 나이를 지긋하게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세월이 이어지는 축복을 맞이했다.

헤나에게 물을 떠 주었던 우물은 없어져버렸지만 둘이서 놀던 강가는 여전했다. 꽃 주제에 자갈이 예쁘다고 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 돌을 줍던 헤나를 풍경 속에 그려본다. 걸음을 차근차근 배우던 친구는 행동이 느렸지만, 초록 식물답게 물에 빠져도 좋아했다. 신체를 흉내 낸 손과 발을 흐르는 물에 담그고 꼼지락거렸지.
그때마다 눈앞에서 땋은 머리가 살랑거렸다. 엔젤라는 주홍빛 유혹을 참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물에 빠뜨렸는데. 엉덩이가 젖는 줄도 모르고 돌에 앉아 물을 튀기던 그 시절이 눈앞에 생생했다. 개구쟁이 둘이서 뭐가 그렇게 좋다고. 꽃은 점잖았지만 엔젤라와 놀 때면 누구보다 장난꾸러기가 됐다. 엔젤라가 애틋함에 빠져 걸음을 뚝 멈췄을 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쏘았다. 

"이 까만 잡초는 아무리 잡아당겨도 뽑히질 않네."
"우리 같은 묘지기한테 난감한 풀이지."

까만 꽃에서 잡초로 전락한 평가에 엔젤라는 히죽 웃었다. 묘지기란 단어에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제게 순정만을 비추던 꽃은 어쩜 이토록 한결같을까. 그녀가 또각또각 사내에게 다가갔다. 풀을 정리하던 사내무리는 땀냄새가 지독했고 수건을 목에 둘렀다. 오죽 흙을 다뤘는지 수건도 옷도 색을 합친 듯 꾀죄죄했다. 
 
"고생하는 군." 그녀가 시치미를 뗀다.
"자네는 뭔가?" 엔젤라는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품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냈다. 사내 중 하나는 수첩을 보더니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다.
 
"이곳에 전설이 있다지?" 흑심이 뭉툭한 연필로 남자를 가리켰다. 몰상식한 행동이었지만 엔젤라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서 손끝은 보이지도 않았다.
"외부인이 그 오래된 전설을 어찌 아소?" 부담스러운 시선에 사내는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내가 팬이라서." 예의를 상실한 노란 머리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요새 유행하는 책이 있다더니 자네도 그중 한 명인가 보군." 
"옛날 같은 무서운 이야기는 이제 수명을 다 했어. 요새는 사랑이지. 사랑."
우락부락한 사내 입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나오니 엔젤라는 웃음을 힘주어 참았다. 
 
모든 건 결말을 위해서. 
"여전히 무덤에서 꽃을 볼 수 있나?" 

 



 
냄새나는 사내무리가 낯선 전설을 읊었다. 황금빛 여인을 안고 온 괴물꽃이 그대로 땅에 녹아들었다고. 그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드물다던 까만 꽃이 근방에 퍼졌다고.
 
황금빛을 머금은 토양은 풍요로웠다. 뽑지 못해 방치한 꽃은 넓게 자라 무덤마저 검게 덮었다. 괴물꽃 전설이 태어난 시골이었던 만큼 공포로 얼룩지더라. 동시에 귀하다던 괴물꽃이 사방천지에 피어나니 마을은 내심 그 존재를 반갑게 여겼다. 그간 이 마을은 세상의 끝이란 거창한 호칭에도 볼품없는 시골이었다. 어른은 그 꽃을 내세우며 마을에서 기반을 다졌고 어린이는 꽃밭에서 놀았다. 짜증이 가득했던 동네에 흐뭇한 미소가 전염됐다. 신기하게도 기적은 기적을 문다. 바뀐 전설에 관광객이 미어터졌다. 볼품없는 시골이었지만 이야기는 강력했다. 소름 끼치는 전설 속 사랑이야기라니 잘 팔릴 수밖에 없다.

본래 전설에서는 아끼는 이가 먹힐까 덜덜 떨었지만, 바뀐 이야기는 달랐다. 괴물꽃은 여인을 사랑했다. 모두가 돌을 던지는 그런 사랑이었다. 미움을 담아 던진 만큼 돌은 몹시도 아팠다. 괴물꽃이 날아오는 돌을 전부 막았다고 느꼈을 때 여인은 돌에 맞아 죽었다.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 괴물이 어떤 애도를 펼쳤는가. 두려움은 사라졌고 사랑만이 남았다. 전설 속 비극은 피하고 싶지만 동화에는 풍덩 빠져 자신을 이입하지 않는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하나같이 모두 괴물꽃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애달픈 사랑을 하길 바랐다.
 
얼마나 보고 싶다고 눈물을 뽑았으면 전설이 바뀔 정도냐며 엔젤라가 키득키득 웃었다.

엔젤라는 또각거리며 매일 낡은 담요를 덮고 자던 공동묘지로 갔다. 보이는 모든 풍경이 어느 곳보다도 익숙했다. 이곳에서 괴한이 제게 험한 짓거리를 행했고 친구가 구해줬다. 늑대가 어리숙한 소녀를 위협하니 꽃이 지켜줬다. 헤나가 있어서 엔젤라는 삶을 윤택나게 가꿨다. 그리움에 발걸음이 동동 가벼워진다. 엔젤라가 빨라진 만큼 까만 꽃이 점점 많아지더라. 일이 벅차 투덜거리는 묘지기가 이해될 만큼 꽃이 넘쳤다.
 
"헉!"
 
마음이 너무 급했던지 엔젤라는 덩굴에 발이 걸려 철퍼덕 넘어졌다. 여행가방이 뒤집어졌다. 충격으로 가방이 열렸더니 안에서 책과 옷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꽃에 파묻힌 채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었다. 까만 꽃밭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눈을 감아서? 캄캄한 시야에 엔젤라는 또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헤매지 않던 꽃이었다. 제 친구는 캄캄한 곳도 어렵지 않게 다녔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바닥에서 났다. 그녀는 하얀 손을 올려 얼굴에 덮었다. 손으로 눈을 꾹 눌러도. 눈을 감아도 왜 눈물이 나는지 엔젤라는 하나도 모르겠다.
 
엔젤라는 울었다. 이렇게 우는데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친구였다.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줬다. 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는 실재하는 헤나가 필요하다. 네가 만들어둔 길을 따라 다리가 뻐근하도록 걸었다. 변함없던 곳도 있었고 과거가 전부 사라진 장소도 있었다.
만약 친구가 사라졌다면 어떡하지? 헤나는 진정 엔젤라를 기다릴까? 기다릴 수나 있을까? 꽃을 향한 믿음은 접힌 적 없다. 그저 늦게 와서. 그녀가 백 년이나 늦어버려서. 슬픔에 몸부림치던 엔젤라는 이제 꽃밭을 헤집는다. 손이 흙으로 얼룩졌다. 풀 위를 뒹군 옷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엔젤라는 더러워진 손을 노려봤다.

그녀가 땅에 손을 짚고 상체를 세운다. 흙 범벅이 된 옷과 책을 봤다. 지긋지긋한 갈색. 부모가 땅으로 돌아갔을 무렵부터 갈색은 엔젤라를 괴롭히기만 했다. 곰도 남자도 전부 갈색이었고 이 빌어먹을 흙도 갈색빛이다. 토 나오도록 역겨운 갈색에서 마음에 드는 건 헤나뿐이야.
엔젤라는 간절히 보고 싶은 꽃을 떠올렸다. 앞으로 몇 걸음만 가면 돼.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줬다. 마음과 몸이 따로 노니 균형이 맞지 않았지만, 사랑에는 기적이 찾아오더라. 그리움이란 추가 둘의 무게를 맞추더라. 기우뚱거리던 엔젤라가 손을 털었다. 흙이 조금 날렸지만 손은 다시 새하얘졌다. 그녀가 널브러진 짐을 가방에 대충 쑤셔 넣었다. 일어나서 구겨진 옷을 정돈하는 손길은 차분했고 연두색 눈빛은 또렷했다.
 
제 비밀기지이자 아지트인 공동묘지에 엔젤라가 돌아왔다. 비석이 볼품없이 널브러졌던 곳이었는데 백 년이란 세월 앞에 죄다 바스러진 걸까? 어릴 적 직접 세웠던 넓적한 돌만 보였다. 회색 비석은 파란 덩굴로 치장했더라. 울퉁불퉁한 돌이 무너지지도 않고 비석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겠지. 엔젤라가 덩굴로 칭칭 감긴 비석에 손을 올렸다. 이 줄기는 분명 친구라고 느꼈다.
"헤나 녀석..." 꽃이 하찮은 돌 따위를 지키겠다고...
 
식물이 꼼꼼하게도 비석을 감쌌더라. 친구가 사랑스럽고 기특해서 엔젤라는 입꼬리를 슬쩍 당겼다. 만족스러운 미소에 이어 하얀 손이 다정하게 덩굴을 매만졌다. 손가락으로 줄기를 긋거나 자그마한 이파리를 잡아당겼다. 이파리를 살짝 들자 오래된 돌이 보였다. 어른이 되어 만져본 돌은 보잘것없이 작더라. 부모를 추모하기 위해 골랐던 돌이니 제법 웅장한 줄 알았다. 그녀가 실실 쪼개면서 비석에서 덩굴을 벗겼다. 요령 없이 감긴 치장은 쉽게 벗겨졌다.
 
휘파람만 불면 되는데 엔젤라는 몸이 자꾸만 앞으로 숙여졌다. 손이 벌벌 떨려서 단단하게 고정되었던 비석이 그녀를 따라 기울어진다. 바닥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그녀와 돌이 나란히 꽃밭에 널브러졌다.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그녀는 하염없이 바닥만 봤다. 제 몸이 땅에 붙어있음에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엔젤라가 절망에 파묻히기 전 바람이 불었다. 흔들거리는 풀잎에 눈이 간지러워 손을 올려 비볐다. 자연스럽게 엔젤라는 하늘을 보았다. 몽환이 섞인 파랑 물감 위로 하얀 별이 수놓아졌더라. 까만 꽃밭에서 빛나는 엔젤라처럼. 친구가 위를 올려다볼 때 장단을 맞춰줄 걸 그랬다. 별이 예뻐도 예쁘다고 말할 상대가 없다. 아아, 엔젤라는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그녀는 친구가 들을까 봐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겠다. 사실은 울어도 친구가 오지 않을까 봐. 앞으로도 영원히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엔젤라를 좀먹었다. 어둠이 외로움으로 그녀를 파고들었다. 손으로 입을 막고 입술로 숨을 막아도 울음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앞으로 딱 한 걸음이면 되는데. 엔젤라는 마지막 장을 펼치기가 무서웠다.
앞이 흐려져서 엔젤라는 눈을 깜빡였다. 고였던 눈물이 또록 흘렀다. 바로 앞에서 까만 꽃이 살랑거린다. 언제 봐도 꽃은 귀엽더라. 흐린 시야 속에서 손가락으로 꽃잎을 툭 건드렸다. 왠지 모르게 편안했고 엔젤라는 눈이 감겼다. 지쳤던 그녀는 모든 걸 놔버리기로 정했다.

그때 향기가 났다.
 
"달콤한 냄새..." 처음 맡는 향기였다. 호화로운 집에서도 이런 향기는 맡아본 적 없다. 엔젤라는 코를 킁킁거리며 서글픈 향기를 쫓고 싶었다. 만약 헤나한테 향이 있다면......



 

꿈에서 친구를 만났다. 환상답게 풍경이 마구잡이 바뀌더라. 애틋한 허상에서 둘은 웃으며 달렸다. 장소가 달라져도 나이를 먹었다 줄어들어도 둘은 함께였다. 걸음이 서툴던 헤나가 넘어졌다. 엔젤라는 깜짝 놀라 친구를 일으켰다. 꽃이 하얀 손을 잡고 일어났더니 헤나는 의젓한 어른이 됐다.

엔젤라는 단정한 얼굴을 곤히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서 엔젤라는 붙잡았던 손에 힘을 줬다. 그녀는 절친한 친구와 손을 꼭 잡아서 좋았다. 흉터투성이 손은 상처가 가득했어도 하나도 징그럽지 않았다. 해먹은 어린 시절부터 만지작거렸던 소중한 손이었다. 엔젤라는 제 지문으로 흉측한 흉터를 지우고 싶었다. 손으로 깍지를 쥐고 엄지로 꽃을 어루만졌다. 빈틈없이 연결되었던 손 중 하나를 풀었다. 잠깐 멀어진 틈조차 아까워서 엔젤라는 헤나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올렸다. 하얀 손은 느릿하게 손목을 타고 어깨까지 닿았다. 오돌토돌한 상처가 눈물샘을 자극했다. 동그란 어깨를 매만지다 엔젤라는 목에도 손을 댔다. 가장 상처가 많은 곳이었다. 엄지로 아무리 피부를 뭉개봐도 잔인한 흉터는 사라지지 않아서.

손이 힘없이 팔로 미끄러졌다. 자꾸만 맥없이 미끄러져서 그녀는 파란 옷가지를 꽉 붙들었다. 엔젤라는 헤나의 품을 제게로 당겼다. 노란 머리카락이 펼쳐진 등이 들썩였다. 그동안 입술로 꽁꽁 가둬놓은 비밀이 울음으로 샜다. 네가 보고 싶다. 보고 싶었다.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엔젤라가 품을 파고들자 둘은 하나처럼 보였다. 언제나 대꾸를 잘했던 꽃이 이번에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왜,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왜?" 그녀는 아늑한 품 속에서 칭얼거렸다. 연약한 팔은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팔로 꽃을 끌어안으면서 대답을 보챘다. 작게 흔들고 얼굴을 목에 비벼봐도 헤나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먼저 죽어서 그래?" 훌쩍거림이 짙어졌다.
"제발 이러지 마..." 처음 느껴보는 매정함은 소리를 지를 힘조차 앗아갔다. 그때 헤나가 엔젤라를 만졌다. 손으로 등을 토닥이다가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그리웠던 온기가 몹시도 좋아서 엔젤라는 고개를 들었다. 까만 입이 보였다.
 
꿈에서 깨도 세상은 까맸다.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어도 고즈넉한 어둠에서 빠져나갈 힘이 없었다. 만약 여기서 썩어버린다면 헤나의 일부가 되지 않을까? 눈물은 왜 눈을 감아도 나올까? 엔젤라는 눈물이 방해됐다.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려고 했다.
 
"어?" 제 손에 무언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설마, 설마...

엔젤라는 제 심장소리가 귓가까지 들렸다. 손가락을 움직여봤다. 익숙한 감촉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가 부족했다. 헛된 기대심이 들까 봐 어둠에 머물렀다. 대신 손에 힘을 꽉 줬다. 부러질 듯 우겨도 반응이 없다. 조급함에 다른 손을 삐꺽거리며 올렸다. 엔젤라는 팔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목표가 떡하니 있지만 하얀 손은 길을 못 찾았다. 천천히 손을 땅에서 뗐다. 연약하고 위태로운 손길이 위를 향했다. 그러다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엔젤라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서 손으로 그것을 마구 주물렀다.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던 손이 제 얼굴에 부딪쳤다.
맙소사, 엔젤라가 그것을 베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 내서 운다. 확실히 이것은 손이었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진 손이었다. 어깨가 너무 떨려서 마주 잡은 손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엔젤라는 이 손이 힘을 빼면 빠져나갈까 봐 떨렸다.
 
누군가 엔젤라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제야 엔젤라는 눈을 번쩍 떴다. 흉터투성이 손바닥이 보였다. 부드러운 살결은 허벅지였다. 제 머리는 멀끔한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안녕, 내 사랑."
 
결코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목소리가 내려왔다. 나긋하고 따뜻한 음색에 엔젤라는 이가 덜덜 떨렸다. 그동안 모아뒀던 그리움이 넘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그토록 많았는데 엔젤라는 엉엉 울기만 했다. 흉터투성이 손이 눈물을 대신 어루만졌다. 자상한 손길은 눈물을 그치게 하기는커녕 더욱 내뱉게 만들었다. 손이 움직이자 그늘이 사라졌다. 사무친 눈부심에 엔젤라가 위를 보았다. 줄곧 그려왔던 미소가 까맣게 폈다. 
 
"앤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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