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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창작

괴물꽃: 15. 늪지(1)

by 넴 박 2024. 7. 28.

엔젤라가 감기에 걸렸다. 빗속에서 꽃과 난리를 쳤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달뜬 숨이 방 안을 채워도 건강치 못한 온기가 몹시도 춥다. 헤나가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니 엔젤라는 부드러운 이불 안을 사랑스럽게 파고든다. 이불 밑에서 골골거린 채 빨갛게 익은 얼굴이 베개 위로 빼꼼 나왔다.

"목말라..." 기침을 오죽했는지 고왔던 목소리가 다 쉬어버렸다. 헤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시무룩하게 천에서 물을 짰다. 어제까지 생생했는데 이게 뭐야.

"네 탓 아니야." 엔젤라가 고개를 휙 꺾자 노란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개진 귀가 보였다. 드물게 솔직한 말을 내뱉은 그녀는 이불 밑에서 슬그머니 꽃을 살폈다. 그녀가 꽃을 가꿔도 헤나는 눈을 파란 공허로 채워간다. 빗속을 누비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감기에 걸릴 일은 없었는데. 그녀를 빗줄기 사이에 세워둬선 안 되었는데.

"야."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헤나." 재차 꽃을 불렀다.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 헤나는 시든 꽃처럼 군다. 헤나가 제게 집중하지 않자 홧김에 엔젤라는 발로 엉덩이를 퍽 찼다. 깜짝 놀란 충격에 헤나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인다.

엔젤라가 들었던 발을 툭 내려놓자 이불은 얌전해졌다. 볼록 튀어나온 천을 헤나는 멍하니 봤다. 엔젤라는 마음을 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녀가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콜록. 갈수록 기침이 심해졌다. 그러다 헉 하는 소리에 헤나는 이를 콱 깨물었다. 아작하고 이빨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꽃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조심스레 한 손으로 목을 바치고 다른 손으로는 축축한 등을 감쌌다. 엔젤라를 살살 일으키다가 꽃은 그녀를 폭 안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울림에 헤나는 작게 숨을 꿀꺽 삼켰다. 꽃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온몸이 뜨겁고 식은땀이 잔뜩이다. 생기가 빠진 병약한 신체에 헤나는 눈시울을 붉힌다. 제가 대신 아팠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기침이 너무 심해..." 콜록거림이 멈추길. 헤나는 신에게 닿지 않는 소원을 빌면서 노란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촉촉한 머리카락 속 습기가 싫지 않아도, 체온으로 가꿔진 분홍색 피부는 예뻐도, 꽃은 건강한 그녀가 훨씬 좋다.
꽃이 천천히 그녀를 쓰다듬었다. 폭싹 젖은 상의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엔젤라가 품 안에서 색색거리니 흉터투성이 손은 더욱 고요해진다.

"물 떠다 줄게." 엔젤라는 헤나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콜록. 그녀가 또 기침을 했다. 가슴을 붙들고 끙끙거리며 앓으니 꽃은 조급해진다. 엔젤라를 살살 떼어내고 물을 데워와야 돼. 꽃이 그녀의 팔을 붙들고 살짝 힘을 주려는 순간에.

"헤나, 가지 마." 그녀가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응..." 순종으로 피어난 꽃은 수긍밖에 모른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그녀는 키득거린다. 귀여운 웃음에 꽃은 긴장이 풀린다. 그녀가 얼굴을 헤나의 어깨에 비볐다. 기분 좋은 온기가 어깨에서 퍼진다. 헤나도 똑같이 어깨를 탐했다. 시선을 끈적하게 내리자 헐렁한 옷이 늘어나 목과 어깨가 훤해서... 꽃이 하얀 어깨를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흉터투성이 손에 땀이 묻는다.
엔젤라가 어깨에서 톡 얼굴을 떼는 순간 머리카락 사이로 땀이 삐질삐질 보였다. 헤나는 그녀가 비틀거리지 않도록 팔을 잡고, 하얀 목이 뒤로 꺾이기 전 조심스레 손을 목 뒤로 옮겼다. 까끌거리는 익숙한 촉각에 그녀는 헤나를 바라봤다.

"훗, 후후... 하하, 하하하... 바보 같은 얼굴." 꽃은 볼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었다. 이런 상황에도 짓궂다며 헤나가 그녀에게 투덜거리지만, 슬쩍 훔쳐본 연두색 눈빛에 힘이 없어서 꽃은 볼에서 바람을 조금씩 뺐다.
"하하..." 엔젤라의 실없는 웃음에 볼에 붙은 땀이 목으로 흘렀다. 축축한 광경에 헤나는 침을 삼킬 뻔했다. 꽃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바보야. 혹시 삐졌어?" 엇갈린 시선을 잠깐이라도 그녀는 용납하지 않았다. 엔젤라가 하얀 손으로 헤나의 턱을 짚고 휙 돌렸다.
누가 헤나를 괴물이라고 생각할까. 툭하면 눈물을 짜내는 파란 눈도 마냥 동그랗지는 않다. 코는 오뚝하고 입술도 탐스럽다. 날카로운 턱선을 어루만지다 엔젤라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의 꽃이 갈수록 인간을 흉내 내는 실력이 훌륭해지는 군. 엔젤라는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손길을 흠뻑 묻혀 턱선을 만끽했다.
"내 친구. 귀엽긴." 드문 칭찬에 헤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꽃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중얼거린다.
"뭐라고?" 엔젤라가 되묻는다.
 
"네가 더 귀여워..." 이런 대답은 상상 못 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엔젤라는 배꼽 빠지게 웃어댔다. 너무 웃어서 기침이 나왔다. 콜록거리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한없이 놀리니까 꽃은 부끄러웠다. 그래도 미소를 봐서 좋았다. 그녀가 영원히 웃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바람이지만 꼭 현실에 가까워지면 좋겠다. 아, 정말로, 엔젤라가 평생 행복하면 좋겠다...
 
 



   
꽃이 베푸는 정성스러운 사랑에 엔젤라는 기침이 줄어들었다. 잠을 방해할 정도로 기침은 성가신 상대였다. 그녀가 콜록콜록 밤잠을 설칠 때마다 꽃은 엔젤라를 꼭 안았다. 제 팔을 베개로 쓰게끔 그녀에게 줬다. 다른 팔로는 허리를 감았다. 본디 가냘펐는데 그녀의 허리가 더 얇아졌다. 헤나는 눈물이 고일 뻔했지만 꾹 참았다.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비밀스러운 일과를 꽃은 성실하게 지켰다. 새벽마다 사모하는 당신을 바라보면서 가끔 욕심을 냈다. 곱디고운 새하얀 얼굴을 흉터뿐인 손으로 어루만지고 이마부터 콧대까지 손가락을 쓸어내렸다. 손에 걸린 노란 잔머리는 귀로 넘겼다. 안락한 어둠 속에서 헤나는 오늘도 가지런하게 감긴 눈에 입을 맞추며 뺨을 탐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렇게 어두운데 연두색 눈이 똘망하게 반짝인다.

"미안해..." 올곧은 눈빛에 꽃은 제발을 저렸다.
"뭐가?" 연두색이 깜빡인다. 헤나를 따라 해 그녀도 옆으로 누워 꽃을 바라봤다.   
"그냥, 전부."
 
눈물이 옆으로 흐른다. 엔젤라가 손을 올려 눈가를 쓸었다. 누구보다 인간처럼 구는 주제에 인간과 동 떨어진 존재였다. 눈물샘이 바닥나도록 눈물을 뱉어도 헤나는 눈이 붓지도 않는다. 눈 정도야 애교였다. 꽃은 엔젤라의 성장속도에 맞춰 키를 응큼하게도 따라 했다. 엔젤라는 제 기억 속에서 헤나와 함께 자랐다는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사실은, 설령 착각이어도 괜찮다.

엔젤라는 제 어린 시절에서 꽃을 뺄 수 없었다. 무덤 옆에서 잠을 청할 만큼 그토록 고독이 미웠다. 혼자 뿐인 인생에 친구가 나타나니 그녀는 얼마나.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엔젤라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다. 용기 없는 꽃은 질문 대신 눈물을 거두는 손 위에 흉터를 올렸다.
 
"넌 내가 그렇게 좋니?"
그녀가 손을 가만히 내버려 뒀고, 꽃은 하얀 손을 붙들고 제 뺨을 쓰다듬게 했다.

"응석받이 같으니." 그녀가 볼을 살짝 꼬집었다.
"네가 받아주니까..." 꽃은 대꾸를 잘했다.

새벽은 이상하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대부분 새벽이었다. 엔젤라는 따뜻한 온기에 엄지를 움직여 뺨을 매만졌다.
그녀는 꽃을 아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 한결같이 제 편을 들어주는 헤나. 엔젤라가 다친다면 꽃이 대신 울었다. 나쁜 소문이 돌던 서쪽 동굴도 헤나가 같이 가주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삿대질을 한다면 꽃이 응징했다. 들키지 않았다고 여기겠지만 몰래는 무슨.
"후훗..." 만족스러운 웃음이 저절로 입가에서 샌다. 엔젤라는 헤나가 손을 붙잡든 말든 그저 하고 싶은 대로 굴었다. 볼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제 귀로 손을 옮겼다.

"헤나, 이건 꿈이야?" 나른한 목소리가 났다.
"왜 그런 걸 묻니?" 덩달아 대답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엔젤라는 키득거리다가 눈을 살짝 접었다. 드물게 수줍은 낯으로 그녀가 엄지로 귀를 꾹꾹 눌렀다. 귓바퀴, 귓불. 어디든 부드러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하얀 손길에 꽃이 귀엽게 빨개지지만, 새빨간 얼굴주제에 할 건 다 한다. 흉터투성이 손이 어루만지던 손을 꼭 붙잡았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네가 보여."
"네 꿈에 내가 있었어?"
엔젤라가 혓바닥을 빼꼼 내민다.
 
베고 있던 헤나의 팔을 고치고 그녀가 헤나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꽃은 인간을 따라 하던 호흡조차 멎은 채 멍하니 엔젤라를 봤다. 연두색 눈이 반짝거린다. 저 찬란하게 빛나는 녹색에 넘어가 꽃은 인간을 흉내 내었다.
 
이 새벽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기가 나으면." 그녀가 꽃을 빤히 바라봤다.
"늪지로 가자." 
"왜?"
꽃은 결혼식에서 울려 퍼지던 저주가 떠올랐다.

엔젤라가 소망하는 건 뭘까. 줄곧 함께였지만 그녀를 이해하기란 참 어렵다. 꽃은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봤다. 그토록 영리함을 자랑했는데 지금은 통 생각나지 않는다.

"우리 둘만의 아지트를 또 만들어야지." 엔젤라가 히죽거린다.
"그건 좋은데... 왜 늪지를 원해?" 꽃이 어벙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어루만지던 귀를 살짝 당겼다. 바보라고 작게 놀리는 소리가 품에서 났다.
 
"여긴 관계를 끝낼 때 늪에 빠지라고 저주하더라. 그만큼 아무도 안 와." 그녀가 헤나의 품속을 파고들면서 흉터투성이 목을 팔로 느릿하게 감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어..."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앙증맞다.

"뭐, 결혼식이라던가." 꽃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대로 얇은 허리를 꼭 껴안았다. 끅끅거리며 꽃은 울었다. 숨이 막히다며 엔젤라가 헤나의 팔을 가볍게 쳤다. 하얀 손짓에도 꽃은 억압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헤나의 보물이니까. 절대 놓아선 안 될 단 하나뿐인 보물이니까. 끄덕도 하지 않는 꽃을 엔젤라는 이제 가만히 뒀다. 오늘따라 새벽이 수다스럽다.
 
 



 
집 없이 방황한 세월이 길어서일까, 엔젤라는 잠잘 곳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재주를 가졌다. 제가 봐둔 곳이 있다며 엔젤라는 꽃의 손을 붙잡았다. 밑창을 더럽히는 진흙을 무시한 채 그녀는 성큼성큼 걸었다. 본디 식물이었던 헤나는 달라붙는 습기가 나쁘지 않았다. 꽃은 마주 잡은 손에서 겨우 눈을 뗐다. 영원히 축축할 땅에서 시선을 올려 주변을 살폈다. 더러운 늪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었다. 나무조차 음침하게 덩굴을 둘렀으니 누가 이곳에 함부로 발길을 옮기겠어. 헤나가 고개를 돌려 찍힌 발자국을 봤다. 발자국에 금세 물이 채워진다. 쉽게 푹푹 찍혀도 금방 틈이 메꿔진다. 바닥 없이 푹 꺼지는 땅을 보면서 제 마음도 이곳과 별 다를 바 없다며 헤나는 웃었다.

버려진 집 주제에 문은 달렸더라. 둘은 허락 없이 부서진 문을 열고 들어선다. 끼익. 나방이며 모기며 여러 벌레가 날개를 펼쳤다. 역겨운 날갯짓에 감탄하기도 전 작은 모기가 윙윙거리며 엔젤라를 점찍었다.
"쯧." 그녀가 허공에 하얀 손길을 그어대니 헤나는 슬쩍 향기를 뿌렸다. 그랬더니 벌레는 생명력을 몽땅 빼앗겨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헤나가 안쪽으로 넌지시 들어서니 발끝에서 껍질이 바스락 부서졌다.
 
아지트로 삼기로 한 이곳은 지붕도 벽도 구멍이 송송 났다. 창문이 있는 의미가 없다며 그녀가 투덜거린다. 꽃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지도 모를 늪지에 집을 지은 집주인에게 영광인 줄 알아야 된다며 꽃은 하늘에 중얼거렸다. 엔젤라가 아니었다면 이 집은 그저 쓰레기로 전락할 곳이었다고.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하라고 헤나는 까맣게 이죽였다.
 
허름하고 낡았어도 나름 구석은 갖췄더라. 먼지 쌓인 침대도 있고 부서진 탁자도 있다. 헤나는 고개를 돌려댔다. 방마다 유독 의자가 많았다. 눈을 비벼봐도 의자가 잔뜩이었다. 꽃은 활짝 웃었다. 헤나는 의자가 필요했다. 비밀스레 세운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의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바칠 결혼식을 위해서.

"딱 내가 원하던 곳이야!" 운이 좋다면서 꽃은 팔푼이처럼 방방 거렸다.
"취향 한 번 끔찍하군." 엔젤라가 들뜬 말꼬리를 붙잡는다.
"어떡하지. 뭐부터 할까." 집안 곳곳을 살피느라 바쁜 헤나는 비아냥을 전혀 듣지 못했다.

집은 볼품없었지만 방이 많고 의외로 널찍했다. 또 무엇이 있나 구경하던 식물은 곳곳에 흩어진 의자들을 죄다 가져와 한 곳에 모았다. 각기 개성을 뽐내는 의자가 방안에 널리니 엔젤라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내색 없이 친구를 팔짱 끼고 지켜봤다. 부스럭거리면서 온갖 장소를 헤집어댄다. 그 과정에 먼지가 날려서 엔젤라가 기침을 했다. 감기에 진저리를 뗐던 그녀는 헤나에게 적당히 하라며 등을 퍽 때렸다. 뒤돌아본 헤나는 눈썹이 축 처졌다. 불쌍한 표정과 달리 손은 어쩔 줄 모르더라. 빨리 의자를 옮기고 싶어서 근질근질한지 꽃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흐음." 그녀가 낑낑거리는 헤나를 뻔히 보다가 알아서 하라며 등을 돌렸다. 무심한 행동이었어도 꽃은 너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해맑게 말했다. 허황된 자신감이 우스워 엔젤라는 피식 웃었다.

의자가 끌리는 소음이 아까보다 덜하다. 사려 깊은 식물이로군.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었다.
꽃을 뒤로한 채 들어온 방에는 더러운 침대가 보였다. 천 위로 두텁게 쌓인 먼지가 소복했다. 그녀가 하얀 손바닥으로 이불을 칠 때마다 먼지가 뿌옇게 날렸다. 코가 간지러워 그녀는 기침을 했다. 진절머리 나는 기침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엔젤라는 손을 이마에 댔다. 지독한 감기에 시달렸던 그녀가 숨을 작게 내쉬자 피곤한 숨결이 먼지를 갈랐다. 얼추 깨끗해진 침대 위로 그녀가 풀썩 누웠다. 또 먼지가 가득 날렸지만 모르겠다며 소매로 입을 막았다. 문득 저번과는 달리 제 피부가 하얘서 신기했다.

"그때는 온몸을 벌레한테 다 뜯겼지..." 마음에 드는 구석은 없는 침대였어도 누우니 눈이 끔뻑거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거부하지 못하고 엔젤라는 머리가 닿자마자 잠에 빠져든다.
 
 




겨울이 너무 추웠다. 숨을 들이마시자 폐까지 차가움이 침식했다. 그 서늘한 기운에 손까지 떨렸다.
엔젤라는 화분을 품에 안고 숙소 앞에서 하늘을 봤다. 하얀 눈송이가 까만 하늘에서 빗발쳐 별 대신 눈이 하늘을 꾸몄다. 아름다운 하늘 아래 차가운 공기는 상쾌했다. 그래, 이토록 깨끗하고 예쁜데 그녀는 혼자였다. 안 풀리는 상황을 겨울 때문이라고 트집을 잡았다. 그녀가 비겁하게 계절을 탓해도 화분은 그대로였다. 엔젤라는 꽁꽁 언 손으로 잎사귀를 잡아당겼다.

"넌 안 춥니?" 친구는 대꾸를 잘했지만 화분은 아니었다. 엔젤라는 한숨을 쉬었다. 안고 있던 화분에도 눈이 작게 쌓였다. 괜스레 하얀 잎사귀를 그녀가 손으로 툭툭 쳤다. 착한 나의 꽃은 새하얀 세상에서 유일하게 파랬다.

친구가 겨울이 온 줄 모르나 보다. 엔젤라는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띵했다. 현기증에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친구가 보고 싶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치 없는 화분을 꼭 끌어안았다. 작게 어깨가 흔들리다가 손끝에 친구가 닿았다.
친구는, 소중한 친구는 무척 딱딱했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에 엔젤라는 코가 시큰했다.

"아, 추워." 목소리가 눅눅했다. 엔젤라가 숙소 앞 돌계단에 풀썩 앉았다. 하얗게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오들오들 떨었다. 손끝이 새빨개졌어도 그녀는 하얀색을 모방했다. 생기를 자랑하던 볼은 창백해졌다. 턱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바들거렸다.

사무친 냉기가 현명한 뇌까지 얼린 걸까, 항상 생에 집착하던 그녀였다. 그랬던 엔젤라가 화분과 함께 늪에 빠져 죽기를 바랐다. 하얀 세상은 고요하고 친구는 침묵을 지켰다. 화분을 냅다 깨버리면 친구가 화를 낼까 궁금했다.
늘 방에서 태연하게 책장을 넘겨도 머릿속은 태풍이 왔었다. 온종일 비바람에 천둥이 쳤다. 언젠가 머리에서 벼락이 제 머리를 갈라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말도 안 되는 가설에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샜지만 그 속에 즐거움은 없었다.

엔젤라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화분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지금은 화분을 집어던지기는커녕 가슴에 깊이 품었다. 벌써 물 줄 시간인 걸까. 오늘따라 박한 물줄기에 화분은 목이 마르겠지. 덩달아 엔젤라도 퍼석해졌다. 엔젤라는 친구가 언제 눈을 뜰지 몰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만약, 제가 잠든 사이에 헤나가 눈을 뜬다면. 그 정도도 기다리지 못했냐며 곧장 눈을 감는다면. 엔젤라는 공포로 이까지 딱딱하게 떨렸다. 이를 콱 깨물었더니 불면증에 시달린 눈이 퀭하게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눈살을 찌푸리고 화분을 봤다.

"네 잔소리가 그리워." 엔젤라는 눈앞이 흐려져 팔을 올렸다. 소매로 눈을 슥슥 문댔다. 옷색이 조금 진해졌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눈물과 달리 그리움을 막을 수 없다. 그녀가 터덜터덜 시체처럼 늪지로 걸어갔다. 품속에 화분을 안고서 걸어가는 엔젤라는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한 겨울이라 땅이 차갑게 딱딱해졌고 수면은 얇게 얼어붙었다. 그 위로 눈이 살포시 쌓여 신비로웠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새가 날아와 연약한 얼음을 부셨다. 하얗게 얼어붙은 물이 춥지도 않은지 조류가 푸드덕거렸다. 새 떼가 부리로 물을 콕콕 쑤시며 부산스럽게 굴자 엔젤라는 궁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한낱 미물도 살고자 저렇게 발악하는데 저는 죽을 생각이나 하다니.
 
"실없다. 진짜..."  신발로 땅을 얼추 정리했다. 그녀가 화분을 옆에 내려놓고 주저앉았다. 오랫동안 걸었으니 엔젤라는 다리가 욱신거렸다. 앉아서 종아리를 주물렀다.
"사람 사는 곳보다 시끄럽잖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데도 새는 활발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못생겨서 엔젤라가 피식 웃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인간이 신기한 모양인지 새 한 마리가 옆에서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다가왔다. 몸통은 하얘도 대가리가 까만 새였다. 이름 모를 새가 금세 엔젤라의 근처로 쫑쫑 오더니 부리로 화분을 쪼았다. 엔젤라는 깜짝 놀라 젖은 흙을 집어 새한테 뿌렸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벌떡 일어났다.

발로 새를 짓밟으려고 했다. 밑창이 보이자 새는 깃털을 날리며 도망쳤다. 엔젤라는 새 대신 질펀한 땅을 마구 뭉갰다. 화분을 다시 들어 올렸다.
"넌 동물한테 인기가 많았지. 예전에는 곰까지 홀렸고" 그녀가 히죽 웃었다.
엔젤라는 늪지를 화분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양인지 높게 들어서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때 허름한 집을 보았다. 호기심은 화분만큼이나 그녀의 단짝이었다.
 
소복소복 눈을 괴롭히는 소리가 끝나자 눈앞에 집이 보였다. 생각보다 집은 컸지만 볼품없이 썩었더라.
"집주인이 터를 잘 잡았군." 그녀가 발로 더러운 문짝을 툭툭 건드리다가 문을 뻥 찼다. 발길질에 부서진 낡은 나뭇조각은 날카로웠고 쿰쿰한 곰팡내가 확 퍼졌다. 그 충격에 숨어있던 벌레가 존재를 드러냈다. 겨울이 세상을 하얗게 꾸며줬어도 생명은 강인하더라. 윙윙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그녀가 작게 욕을 내뱉었다.
"헤나가 있었을 땐 벌레 따위..." 아, 지금까지 쾌적하게 지냈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노란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바닥에 축 쳐졌다. 엔젤라는 안고 있던 화분을 더욱 품 안에 넣었다. 사실 화분이 아닌 친구를 안고 싶었다. 딱딱한 가지가 아닌 부드러운 볼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녀가 처연하게 구는 동안 귀에 모기가 앉았다. 이내 손에도 목에도 모기가 붙었다. 자연스레 그녀는 손등을 벅벅 긁다가 손을 빤히 봤다. 살갗이 울긋불긋 툭 튀어나왔다. 손등에 또 모기 한 마리가 달라붙었다. 그때 손바닥으로 짝 내려쳤다.
"해충주제에 예쁜 건 알아봐선." 으깨진 모기에서 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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