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29 괴물꽃: 14. 결혼식(2) 온몸이 비에 젖어도 옷이 무거운 줄 몰랐다. 헤나는 터덜터덜 왔던 길을 돌아왔다. 하늘에서 무섭도록 비가 떨어진다. 빗줄기가 빈틈없이 촘촘해서 꽃이 봉오리를 도무지 들 수가 없다. 그대로 발을 옮겼다.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이 더럽게 남았다. 미처 뿌리를 잘라내지 못했는지 기다란 무언가가 쓸려간 흔적이 남았다. 오늘따라 비가 잔뜩 내려서 흔적마다 빗물이 고였지만, 곧 흙이 물에 풀어져 경계가 느슨해졌다. 헤나가 땅만 보고 걸었더니 벌써 숙소 앞까지 왔다. 문에 이마를 댔다. 들어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땅에 스며들고 싶다고 느끼던 참 끽하고 소리가 났다. 나무문이 안쪽으로 열리자 헤나는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기우뚱하던 몸이 폭신한 곳에 닿았다. "비 오는데 어딜 갔다 와?" 꽃이 .. 2024. 7. 28. 괴물꽃: 13. 결혼식(1) 식물한테 신발은 고역이다. 줄곧 맨발을 고집했으니 헤나는 발이 흙투성이였다. 성당은 더러운 발로 성스러운 이곳을 밟아선 안된다고 헤나에게 표했다. 버릇처럼 가지런한 양손으로 기도를 표했던 식물이 입장부터 막막하다."자네는 상식이라곤 없나?" 헤나가 어쩔 줄 모르며 끙끙거렸다. 어디 가서 말문이 막히진 않는데. 전제조건이 글러먹어서 돌파구가 없나. 실랑이가 길어지자 엔젤라는 쩍 하품을 했다. 아무리 졸라도 소용이 없자 꽃은 시무룩했다. 그 모습에 엔젤라가 묵묵히 팔짱을 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성당 내부를 살폈다. 벽에 걸린 신, 하얀 벽돌, 붉은 융단, 성스러운 촛대."오." 느릿한 시선이 불씨를 발견했다. 고운 흰 바닥 위로 융단이 가지런하게 깔렸다. 엔젤라는 휘파람을 불면서 촛대로 또각또각 걸어.. 2024. 7. 28. 괴물꽃: 12. 둘과 두 사람(2) 그간 참아왔던 호기심이 방출되는지 엔젤라는 중앙시장에서 눈을 반짝였다. 길을 다 외웠어도 제대로 된 구경은 오늘이 처음이라면서 그녀가 관심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그토록 좋아하는 장신구와 옷이 주변에 천지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은 죄다 빛이 나서 엔젤라는 질 높은 사치품을 매만지다 입이 감탄으로 벌어졌다. 곱디고운 옷감과 깔끔하고도 수려한 마감에 엔젤라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그녀가 옷에 매료된 사이 꽃은 엔젤라만 봤다.어두운 밤이어도 그녀는 보석보다 빛났다. 헤나는 반짝이는 눈빛을 제 속에 담고 싶다고 소원했다. 그동안 만끽하지 못한 관심을 모두 앗아갈 수만 있다면. 꽃은 그렇게 할 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까맣게 미소 지었다. 한참 까다롭게 옷을 만져대던 엔젤라는 상인과 눈이 마주쳤다. 상.. 2024. 7. 28. 괴물꽃: 11. 둘과 두 사람(1) 둘은 오순도순 바닥에 앉아 침대에 기댔다. 엔젤라는 습관처럼 무릎에 책을 뒀고 헤나는 그녀의 어깨를 탐냈다. 그녀가 익숙하게 책장을 넘긴다. 꽃은 책에 몰두한 엔젤라가 생소했어도 새로운 면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하필이면 왜. 제가 부재중일 때 왜, 왜! 잃어버린 시간에 헤나는 속이 새까맣게 탔다. 엔젤라에게 제 옹졸함을 들키기 싫어 눈을 감았다."4월이 감미로운 소나기로 3월 가뭄을 뿌리까지 꿰뚫고..." 그녀가 좋아하는 구절을 읊는다. 지금까지 그녀와 책을 엮어볼 생각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데."그러고 보니 하얀 도시는 어떻게 됐어?" 꽃은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와 수도를 향하던 길에 봉변을 당했지. 헤나는 마음속으로 그 남자를 죽이고 또 죽였다. 몇 번을 죽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수도.. 2024. 7. 28.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3 다음